지역이주를 망설이는 그대들에게

지역생존자의 10년의 생존기

2026.06.09 | 조회 1 |
0
|

나에 대한 이야기.

 

일단 지역이주를 선택하게 된 나의 개인적인 동기와 계기부터 시작해볼까 한다.

10년도 넘은 과거의 이야기라 제대로 기억을 하겠냐는 생각이 들수 있겠지만 

인간이 기억하는 오래된 기억중 대부분은 '충격적인 안좋은일' 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가 지역이주를 선택하게 된 동기도 그렇게 안좋은일에서 시작이 되었기 때문에 잊을수가 없다.

10년의 이야기를 하나의 글로 풀어나가기엔 쉽지 않겠지만 누군가에겐 지역이주를 결정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 글을 쓰게 되었다.

 

나는 비교적 운이 좋은 편이었다.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지만 치열하게 살아온 아버지의 자식으로 태어난 덕분에

초등학교를 과천, 중고등학교를 성남 분당에서 졸업했다. 성인이 되어서야 내가 얼마나 좋은 울타리

안에서 자란 것인지 알수있었다. 당장에 등록금 걱정을 할 필요도 살 집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스스로 많은 것을 이룬 아버지 입장에서는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는 못난 아들이었다.

하고싶은 것도 할수있는 것도 없는 상태로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공부에 흥미를 잃은 나는 대학도

가고싶지 않았다. 하지만, 남들 다가는데 안가기도 뭐해서 수원에 있는 2년제 대학을 가서 

시간만 보내다가 졸업을 하고, 군복무 대신 지하철역에서 공익근무 요원으로 근무를 했다.

 

아버지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오셨고, 대비도 열심히 하셨다.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1회때 취득하실 정도로 직장생활 이후도 준비를 해놓으시는 등 아버지는 평생

내가 넘을수 없는 벽으로만 느껴졌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온 아버지도 IMF를 기점으로 

은행에서 퇴직을 하셨고, 여러 벤처기업들에서 직장생활을 이어가셨었다. 

그러다가 2004년 두번째 공인중개사 사무소를 개업하시면서 잉여인력이었던 나는 아버지의 일을

돕게되었다. (참고로 첫번째 공인중개사 사무소는 권리금을 주고 인수하여 직원을 두고 운영하시다

가 권리금을 받고 넘기셨다고 한다. )

그당시 나는 아무것도 할줄 몰랐고, 하고싶은 것이 없었던 나의 첫 직장업무가 시작되었다. 

 

일의 시작

CGV 극장과 PC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본적은 있지만 제대로 된 일의 시작은 아버지 밑에서

배우면서 한 부동산중개사무소 일인것 같다.

부동산중개사무소에서 중개보조원으로 아버지 일을 돕고, 퇴근후에 유일한 낙이 혼자 극장가서 

영화를 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반복된 삶을 6년정도 살았을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하는건가? 목적없이 이렇게..."

그때 나이가 서른이었다. 부동산 중개업 특성상 영업활동을 잘하지 못하면, 즉 손님이 없으면

수입이 없는 구조이고, 불안정한 직업이었다. 부동산 상승기에는 운좋게 큰돈을 만질수도 있지만

분당 역세권 오피스텔 임대를 전문으로 했기때문에 그러한 호황도 내게는 남의 일이었다.

3년마다 찾아오는 현타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항상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물론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언가를 정말 열심히 하긴 했다. 손님을 끌어오기 위해 손님이 많은 

중개업소를 벤치마킹하여 인터넷 광고를 하고, 블로그로 진솔한 이야기를 매일 2-3시간들여

밤12시까지 작성하는 등 깨어있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일에 몰두했었다. 게다가 부동산중개업은

공휴일도 근무해야 하는 직종이라 쉴수있는 날은 명절 연휴와 일요일 뿐이었다. 

일요일은 거의 집에서 하루종일 밀린 잠을 자며 충전하는 시간이었다. 

그 덕분에 연애를 시작해도 오래 유지할 수 없는 그런 삻을 살았다. 

서른의 나이에 방황하기 시작했다. 나는 누구인가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살면 잘살수 있을까?

잘사는 것은 무언인가?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분명 최선을 다해서 전력질주를 하고있는데

남들과 비교하면 너무 초라해보였다. 그때 스스로에게 했던 질문이 이것이다

 

'내가 지금 맞는 방향으로 가고있는가?'

 

하지만 그만둘수 없었다. 목욕탕에 가서 아버지 등을 밀어드리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당당했던 아버지의 넓은 어깨가 너무 좁아졌고, 가족들을 부양하시느라 그동안 얼마나 

힘드셨을까 라는 생각에 다시 마음을 다잡고 열심히 했던것 같다. 그러면서도 육체적,정신적으로

강해지기 위해 꾸준히 수영도 하고, 절에 다니며 108배도 하고 합창단 활동도 하는등 최대한

생각할 시간을 주지않고 극복해보려 노력했던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불안한 환경에

초조했다. 

 

지역이주의 계기.

 

사실 내가 지금 살고있는 강원도는 나의 1옵션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한국에서의 치열한 경쟁이 너무 싫어서 아무도 모르는 다른나라로 떠날 생각을 했었다.

그렇게 생각했던 나라는 바로 '인도네시아'였다. 추위를 싫어했던 내 입장에서 더운나라는 비교적

견딜수 있을것 같았고, 대학졸업생 초임이 월40만원 수준이라 한국에서 월100만원 정도의 수입이

있으면 그곳에서 나혼자 살아가는것은 가능해보였다. 다행히 20대에 부동산 중개업을 하면서 

모은 돈으로 월80만원 정도 나오는 사무실을 하나 분양받았었기에 아예 실행이 불가능한 계획은 

아니었다. 그래서 인도네시아어 관련도서와 스터디모임도 나가보는 등 조금씩 준비를 해나갔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언어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한번도 해본적 없는 일이기도 했고, 앞으로 가족들을 몇년에 한번 볼수있을까 라는 생각들이

고민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한편으로는 고민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생계를 위해 일하던 어느날.

송파 문정역쪽에서 손님 응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검은 연기가 하늘높이 솟구치고 있는것을

보았다. 아무생각없이 돌아오는 길에 전화한통을 받게되었고, 사무실이 있는 건물에 불이 났다는

아버지의 전화였다. 토요일 오후였기에 금방 화재가 진압될것이라 생각했지만 소방차 진입이 쉽지 

않은 길이어서 결국 건물의 절반이 소실되는 대형화재사건이 되었다. 

 그 사건이후로 나의 의지도 건강도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이제 그만하고 싶어요.."

 

포기를 모르셨던 아버지도 왠일로 나의 결정대로 하자고 하셨고, 그렇게 아버지와의 10년의 

부동산중개업은 막을 내렸다. 더이상 출근할 곳이 사라진 나는 한동안 집주변을 한없이 걸었다.

그리고 한달에 한번씩 제주로 떠났다. 금전적인 여유가 없어서 게스트하우스를 이동하며 다녔고,

그곳에서는 나처럼 방황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날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위로가 되면서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하나 고민을 하며 하염없이 걸었다. 그러면서 어느날 한가지가 떠올랐다.

어린시절 전자게임을 많이 했던 경험때문인지 '한게임 고스톱'이 떠올랐다. 

한게임 고스톱을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초수,중수,고수,영웅,지존 등 가진 자본금에 비례하여 

등급이 나눠져있었고, 적은 자본금으로 높은 판돈의 경기장으로 입장시 한번에 모든 돈을 잃을수

있기도 했고, 나의 자본금에 적절한 판돈의 경기장에서 게임시, 심리적으로 우세하면서도 여유있게

게임에 임할수 있었다. 또한 운이 따를경우 다음 등급으로 올라갈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그때 나의 현실에 대입해보았다. 내가 경쟁하고 있던 서울,분당의 경우 내가 가진 자본금이 적기

때문에 한번의 실수로 모든것을 잃을수 있지만, 지방 대도시로 한 레벨을 낮춘다면 조금은 

여유있게 삶에 임할수 있을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부모님을 설득하여 오랜 수도권 생활을 정리하고

강원도 원주로 이주하게 되었다

 

지역 이주 이후.

 

태어난 곳은 강원도 강릉이지만 대부분의 학창시절을 수도권에서 보내서 나에게 강원도는 태어난

곳 이상의 의미는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강원도가 내게는 익숙했다. 부모님께서는 강릉으로 

이주하는 것은 원하지 않으셨고, 유일하게 좋아하는 취미가 극장에 가서 혼자 영화보는 것이어서

극장이 더 많았던 원주로 이주를 결정하게 되었다. 

 원주로 이주했던 2014년 8월. 이삿짐을 정리하고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다.

앞으로 어떻게 살지.. 그러면서 눈물을 흘렸던것 같다. 그때가 내 나이 서른넷이었다.

남들은 취업해서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리는 시기. 나는 0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한동안 원주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계속해서 매월 제주를 오갔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또래들을 제주에서 만나기 쉬웠고, 다른 조건과 상관없이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서였던것 같다. 부동산중개업을 그만두던 시기에 나는 번아웃상태였다.

사람이 싫었고,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는 것도 두려웠다. 지역에 이주하고, 제주를 오가며 나를

인간으로 대해주는 따뜻한 사람들을 마주하면서 나의 상태가 아주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게는 제주에 친척같은 사람들이 생겼다. 지금도 생각난다. 그들과 헤어진뒤 원주로 

돌아오는 길에 차 안에서 눈물을 흘렸다. 

 

심리적으로 조금씩 회복되던 시기에 우연히 원주지역에 흙집학교가 있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동안 사무실에서 머리를 쓰며 살았다면, 이제는 몸을 쓰며 사는 삶은 어떨까 싶어서 2주간의 교육

에 100만원을 투자하였고, 동기중 막내로서 형님들에게 짐이 되었다. 그 정도로 몸을 쓸줄 몰랐다.

2주간의 교육을 마치고 짝궁이었던 형님과 술 한잔 기울이고 헤어지던 그날 나는 펑펑 울었다.

그렇게 나는 좋은 사람들 덕분에 우는 날이 많아졌다.

 흙집학교의 교육은 내게 큰 교훈을 주었다. 나는 몸을 쓰며 먹고사는데는 경쟁력이 아주아주

떨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 이후로는 그쪽 방향은 확실하게 포기했다. 

 

첫번째 사업

지역에 와서 앞으로 뭘하면서 살아야 하나 싶었던 시기에 우연히 '쉐어하우스'에 대한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쉐어하우스 우주'의 기사를 보며 서비스를 살펴보니 위탁운영 임대업,

전대업의 성격임을 알수 있었다. 부동산중개업의 경우 업무 프로세스가

'영업 -> 접객 -> 계약 ->잔금 및 입주' 로 되어있다. 쉐어하우스의 경우 입주이후 '관리' 라는

측면이 더 들어가 있었고, 시스템 상으로는 내가 충분히 할수 있는 일임을 알수 있었다. 

부동산 임대차계약서는 수백건을 넘게 봐왔기 때문에 집을 꾸미는 것만 해결하면 시작할수 

있었고, 기존에 보유한 부동산(사무실)에서  3000만원을 대출받아 1500만원은 임대보증금

으로,1000만원은 시설비용, 500만원 예비비로 하여 원주 혁신도시 내 쉐어하우스 1호점을 

오픈하였다. 그때 개인사업자로 등록한 사업명이 '프로젝트집'이었다. 그렇게 지역에서의

첫 도전이 2014년 11월에 시작되었다. 그 당시 사업에 대해서 네이버 블로그에 작성했던 

글이 있어 링크를 달아놓으니 혹시 관심있는 분은 참고하길 바란다

 

첫 쉐어하우스 ( 2014, 강원도 원주 )
첫 쉐어하우스 ( 2014, 강원도 원주 )

 

 

해당 글에도 작성했듯이 첫 도전은 처참하게 실패했다. 

수요자 입장이 아닌 공급자 입장에서의 사업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첫 실패 이후 수요자 입장을

고려햐여 사업을 진행한 덕분에 조금씩 수익이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쉐어하우스 사업의 특성상

투자 대비 수익률은 상당히 낮은 편이었고 5개 지점을 꽉 채워도 1명기준 최저시급 기준의 월급

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기에 지점이 폭발적으로 늘어나지 않는 이상 사업성은 떨어졌다

 

창업지원사업

쉐어하우스 사업을 하면서 조금씩 지역에 적응을 하기 시작했다. 지역의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지역에서 진행되는 여러가지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원주의 경우 원주영상미디어센터에서 다양한

프로그램과 독립영화상영을 하고 있어서 내게는 놀이터 같은 곳이었다.

그렇게 쉐어하우스 사업을 하면서 지역사람들을 하나둘씩 사귀던 2017년 어느날 미디어센터 벽에

붙여진 포스터 한장을 마주하게 된다. 이름하여 '지역생활문화 청년혁신가 모집' 이었다. 

무슨 사업인지는 모르겠지만 약 5개월간 매월 50만원의 활동비를 지원해주는 사업이었다. 

한푼이 아쉬웠던 그 시절 나는 해당사업에 지원했고, 워낙 경쟁률이 낮았던 초기였던만큼 

해당사업에 지원대상으로 선정이 되었다. 그당시 춘천 강원대학교 내에 있던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

에 방문하여 오리엔테이션을 비롯하여 각자의 사업을 동기들 앞에서 공개 PT를 하는등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는 경험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당시 37세(만36세)여서 운좋게 해당사업을 지원할수 

있었고, 이 사업을 통해서 좋은 멘토님들과 동기들을 만나면서 나의 인사이트가 엄청나게 확장

하는 기초를 마련하게 되었다. 플랫폼사업,요식업,문화예술사업,광고홍보업 등 20여명의 동기들의

삶을 관찰하면서 지역에는 다양한 방법으로 생존할 수 있음을 알수 있었다. 지원기관 뿐만 아니라

동기들의 작은행사까지 틈만 나면 쫓아다니며 그동안 내가 몰랐던 강원도의 작은도시들을 경험

하게 되었다. 양구,화천,태백,정선,홍천 등 각각 지역의 생태계를 조금씩 알게 되었고 그렇게 

퍼즐을 하나씩 하나씩 모아가기 시작했다.

 5개월이 지난 후 본인의 사업이 어느정도 진전이 있었는지 공유를 하는 시간을 갖었다. 동기들의

발표를 보면서 나의 부족함을 한없이 느꼈다. 4명만 지원금을 지급하는 사업이어서 기대를 

안했는데 운좋게도 평가위원 분들이 좋게 봐주신 덕분에 추가지원을 받게 되었다. 그렇게 

기존의 쉐어하우스 사업을 '쉐어하우스 팔레트'라는 브랜드로 발전시키면서 조금 더 업그레이드

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시간이 지난후 그당시 평가위원 중 한분의 말씀을 들어보니 사업을

잘하는 사람이 아닌 잘하고자 하는 진정성이 느껴져서 지원대상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누구나 그랬겠지만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 무너졌고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진심이었던 것 같다. 잘하는 일이 아니라 할줄 아는 유일한 일을 했고, 그 일을 더 잘해내고 싶었다.

그게 전부였다. 

 

첫 지원사업 선정 ( 2017,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 )
첫 지원사업 선정 ( 2017,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 )

 

 2017년12월 기존의 개인사업자에서 '주식회사 프로젝트집'으로 법인전환하였다. 2018년 

공유주거 사업인 쉐어하우스 사업에 이어 공유주택 사업인 '인간문고' 공간사업을 강원도 태백에

신규 런칭하였다. 강원도에서도 아주 고립된 지역중 하나인 태백에 '자발적 고립'이라는 키워드로

나처럼 두번째 인생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편안한 휴식처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 조성된 공간이다.

2017년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의 동료 창업자로 알게된 동생과 제주를 오가며 알게된 목수 동생

에게 공간조성을 맡겼고, 이 공간은 2018년 조성후 지금까지도 태백에서 한주이상 머물길 원하

는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있다. 이 공간조성은 폐광지역의 폐공가지원사업(현.석탄산업전환지역 

창업활성화 사업 )을 통해 조성할 수 있었고, 2019년까지 2년차 지원사업을 지원받아 조금 더 

많은 프로그램들을 운영하며 강원지역의 '사람'을 모티브로 인큐베이터로서 역량을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이밖에도 2018년 하반기에 사회적기업가 육성사업을 통해 '사회적경제' 영역에 진입할수 있었고,

창업지원사업을 2년간 3가지 지원을 받으며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2019년 폐공가지원사업 2년차 지원이후 지원사업 지원을 그만하기로 마음먹었다. 

지원사업을 지원받아본 사람은 알겠지만 초기 1-2년차에 몇개의 지원사업에 연달아 선정이 되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잘하고 있는 건가? 이번에도 지원하면 또 선정되겠지?'

 

자신감에 취해 지원사업선정을 하나의 성취,타이틀로 생각하게 되는 착각의 늪에 빠지게 된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원사업이 매출로 전환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지역의 지원사업의 이슈와 내가 생각하는 성공적인 사례와 악용한 사례들을 이야기 하겠지만,

지원사업은 연료가 아닌 첨가제일뿐 첨가제로만은 사업을 지속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동안은 주거에 관한 공유공간이었다면, 다음 스텝으로 상업 공유공간을 조성하고 싶었다.

2020년,강원도 원주 중앙동에 위치한 '미로예술시장'에 '미로주방'이라는 커뮤니티형 공유주방을

조성했다. 공간조성 비용은 1500만원 정도 소요되었고, 지원금 없이 조성하느라 재정적으로는 

힘들었지만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해준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오픈하자마자 '코로나바이러스' 가 퍼지면서 개점휴업상태였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5인이상 집합금지인 점을 감안하여 4인모임 '미로주담'을 2년간 수십차례 진행하고, 음식을

매개로 한 여러가지 프로그램을 기획,운영하면서 '공간디벨로퍼'에서 '기획자'로서의 역량을

보여주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나처럼 지역에서 연고없이 사업을 시작하게 되면 마음을 굳게 먹어야 된다.

0초기 3년간은 매출이 없을 것을 감안하고, 지원사업의 대부분을 나의 사업을 홍보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휘발되는 온라인 홍보보다는 지역사람들이 평소에 경험할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새로운 방식의 프로그램을 진행함으로써 여러 동료들과 참가자들이 나를

알려주는 스피커가 된다. 돌이켜보면 난 2020년까지 적자였던것 같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20대부터의 경험들이 한조각,한조각 연결되며 2021년부터는

작은 그림들이 듬성듬성 나타나기 시작했던것 같다. 

 

원주 중앙시장 2층 미로시장 내 '미로주방' ( 2020년 )
원주 중앙시장 2층 미로시장 내 '미로주방' ( 2020년 )

 

피봇팅

사실 내가 쉐어하우스 사업을 하다가 지점을 늘리는 선택이 아니라 공유주택,공유주방 등으로

공유공간 디벨로퍼로서 변경한 이유는 따로 있다. 지역에서 쉐어하우스 사업을 하다보니 시장의

수익성과 확장성에 한계가 있음을 알수 있었다. 그래서 쉐어하우스 사업보다는 공간비즈니스를

기획,개발하여 시스템을 구축하면 공간활용을 필요로 하는 지자체와 공공기관 대상으로 용역을

수주하는 B to G 사업으로 전환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내생각일뿐 시장 논리와는 동떨어져 있다

는 것을 확인하는것에는 그리 오래걸리지 않았다. 시장 니즈와 구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덕분

에 덩치를 키운 대가를 제대로 치루게 되었다. 공간사업 이외에 디자인 역량과 영상제작 역량이

있는 직원들을 데리고 닥치는대로 일을 수주했다. 대부분이 처음하는 일이었지만 부분별로 

유경험자들에게 자문을 구해가면서 동료기업들의 급한 일들을 처리해주다보니 어느새 나에게

'강원도다이소,강원도119' 같은 별명이 붙어있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잘하는 기업들이 하지

않는 까다롭고,어렵고,급한 일들을 해결하는 해결사로 활동하며 겨우겨우 버텼다. 예전에 보았던

영화 '홍반장'의 역할을 내가 하고 있었다. 다행히 처음에는 서툴었던 일들도 두번째,세번째 하다

보니 조금씩 일의 숙련도,처리속도,결과물도 나쁘지 않은 수준이 되어가고 있었다.

 만약 수도권에서 치열한 경쟁과 빠른 속도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경험을 3년이상 했다면,

지역으로 이주할 경우 자기 자신이 꽤 경쟁력이 있다는 것을 어느시점에 느끼게 될것이다.

지역을 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지역의 시간은 수도권보다 느리다. 그리고 시한에 대해서도

엄격하지 않다. 나는 본의아니게 아버지 밑에서 중개업을 배우면서 빠른 일처리 속도와 시한에 대한

엄격함, 예상하지 못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상황을 수없이 마주했다. 그 덕분에 조금씩 지역사람들의

신뢰를 얻게 되었고, 지역이주 7년차부터는 조금씩 상황이 나아짐을 느낄수 있었다.

 

온세까세로 첫 공장에서 서로돕던 시기 ( 2019년 )
온세까세로 첫 공장에서 서로돕던 시기 ( 2019년 )

 

조력자의 삶

간혹가다보면 동료 창업가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내가 더 잘하는 것 같은데 나에게는 일을 주지 않는다'

 

처음에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당연한 이유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처음 은행계좌를 만들었을때, 휴대폰을 선택했을때를 생각해보면 왠만해서

는 거래처를 바꾸지 않는다. 더 편리한 서비스가 나와도 적응이 된 상태에서는 변화를 주기를 

원하지 않는다. 게다가 언제 떠날지 모르는 사업자에게 일을 주는 것도 그들 입장에서는 위험부담을

안는 것이기에 기존 거래처가 엄청난 사고를 치지 않는 이상 기회를 부여받는다는 것은 나만의 

희망사항이라는 것을 알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할수 있는 일들에 집중했다. 기존 거래처가 없

는 신규사업자 들의 여러가지 일들을 도왔다. 대부분이 1인 사업자여서 그들의 아이템을 조금 더 

고도화 하는 일이라던지, 야간에 제품을 제조하거나 포장하는 일들, 명절에 휴계소에 나가서 대신

제품을 판매해주는 일이라던지 대가를 바라지 않고 그냥 그들이 잘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내가 할수

있는 일들을 했다. 그렇게 도와주었던 팀들 중 몇몇 팀들이 지역에서 눈에 띄게 성장하면서 보람을

느꼈고, 그들 또한 어려운 시절 함께해 준것에 대해서 고마워 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생각보다 지역은 좁다. 그러한 일들이 기업들 기관들에 소문이 나면서 2021년에는 후배 창업자들

을 컨설팅하거나 평가위원으로서도 활동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 빛나는 주인공의 역할은 아니지

만 그들을 빛나게 해주는 조연으로서 자리매김하게 된것이다.

  그 덕분에 지금은 도시재생,창업 영역에서 행사 및 교육기획 업무들에 대한 연락을 자주 받는다.

돌이켜보면 무언가를 얻기위해서는 '거래(去來)'를 해야한다. 받기를 원하기 보다는 먼저 줘야한다

는 것이다. 수년간 대가없이 뿌린 씨앗들이 시간이 지나서 크고 작은 열매가 되어 돌아왔다.  

 

1인가구 자조모임 ( 2024~ ,서로건강돌봄 )
1인가구 자조모임 ( 2024~ ,서로건강돌봄 )

 

지역 이주를 결정하기 전에

가능하다면 매월 1주일 씩이라도 본인이 마음에 두는 지역을 살아보는 것을 권한다.

지역의 명소를 관광하는 것이 아니라 1주일씩 살아보면서 가고싶은 커피숍도 가고

행사에도 참여해보고, 밤거리를 돌아다녀 보는등 평소에 본인이 즐겨하는 분야를

지역에서 찾아보면서 하나씩 퍼즐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지역에 살고있는

사람들을 한명씩 사귀게 되기도 하고, 그들의 지인도 알게된다. 운이 좋으면 숨겨진 맛집정보는

덤으로 얻을수 있다. 여러 지역을 다니다보면 유난히 마음에 가는 지역을 찾게 될것이다.

지역에 살게 되는 이유는 경치가 좋아서일수도 있지만, 결국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좋아서

정착하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밖에도 내가 할일이 있는 지역을 찾는 것도 중요하다. 

결국 우리는 나의 쓰임새를 계속해서 되내이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Loc.ation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 2026 Loc.ation

글로벌 빅테크에 대항하는 로컬 생존 가이드

메일리 로고

도움말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채팅으로 문의하기

메일리 사업자 정보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특별시 송파구 위례광장로 199, 5층 501-2-31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