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팠던 배가 여행을 먹고 나았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다정함을 무기로 싸워나가기로 했습니다

2023.05.30 | 조회 219 |
0
|

마파멘터리

비상업적이지만, 개인적인 생각과 영감이 가득한 뉴스레터

“아, 여행 먹어야겠다"

스트레스성 장염을 달고 산다. 보통 분기에 한 번씩 아파질때가 되면 혼자 여행을 간다. 작년의 대구, 부산여행이 그랬으며 올해의 전국 여행이 그렇다. 특히 올해는 일과 대인 관계가 유난히 안 풀려 유튜브에 '아홉 수'를 검색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죄송해요. 제가 내일 여행 계획 짜느라 바빠서요."

첫 번째 무계획 여행지, 강릉
첫 번째 무계획 여행지, 강릉

강릉의 게스트하우스에서 함께 맥주를 마시자는 투숙객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평소의 외향적인 나라면 먼저 말을 걸었겠지만, 매일 같이 업무 전화와 연락에 시달리며 인류애가 떨어질만큼 떨어졌기 때문일까?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 맺는 것이 지겨웠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으면 했다. 고래책방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아무 생각없이 송정해변을 걸었다. 평소 혼자 여행을 떠나면 묵언수행이라도 하듯 내 안의 깊숙하게 숨겨진 I성향을 발현한다. 이번 여행 역시 그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으려 했다. 

 

두 번째 무계획 여행지, 안동
두 번째 무계획 여행지, 안동

두 번째 여행지로 안동을 선택한 이유도 이때문이었던 것 같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안동의 치암고택에서 그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으려 했다. 처음 고택에 도착했을 때, 그리고 안동 로컬 주민들이 아니면 잘 가지 않는다는 낙강물길공원에 간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친구라도 데려올껄 그랬나..."

하염없이 걸으며 잡념이 많아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가족, 연인, 친구들과 함께 야경을 보러 온 여행객들을 봤기 때문일까. 갑작스럽게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기억하기도 했다. 사이좋게 다니는 연인들을 보며 이전에 만나던 친구와의 행복했던 기억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 친구의 행복을 바라지만, 물리적인 외로움은 어쩔 수 없기 때문일까? 순간 혼자 여행을 온 것을 후회하게 되었고, 도망치듯이 택시를 불러 숙소로 빠져나왔다. 

혼란스러웠다. 보통은 이렇게 혼자 여행을 다니면 마음이 안정되고, 생각도 정리돼서 배가 다시 아프지 않게 되던데... 왜 오히려 잡념이 사라지지 않고 복통은 더 심해질까? 사람들과 관계 맺는 것이 질려서 혼자 여행을 왔는데 나는 더 외로워 하고 있는 것일까? 

 

"결국엔 다정함이 우주를 구한다"

두 번째 무계획 여행지, 제천
두 번째 무계획 여행지, 제천

그랬던 나를 구한 것은 '다정함'이었다. 쓸쓸한 마음으로 짐을 싸며 우연히 연 서랍에 적힌 방명록에는 각자의 소회가 담겨 있었다. 모두 뭔가 잘 풀리지 않는 답답한 마음에 여행을 왔다는 글이었다. 그 모든 글의 마지막엔 '글을 본 사람들의 행복'을 바라는 다정함이 있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누군가 답글을 남긴다 해도 볼 일이 없는 글에 다른 사람의 행복을 빌다니, 정말 가성비가 떨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 혼자 잘 살아내기도 바쁜데 말이다. 그럼에도 답례로 그 사람의 행복을 바라며 나도 글을 남겼다. 

 

"멀리서 온 손님이잖아요. 당연히 친절해야지."

아팠던 배가 뜬금없이 멀끔히 나은 것은 제천의 짜글이로 유명한 식당이었다. 평소 TV출연으로 손님이 북적거릴 법한 식당이었지만 비 소식이 있어서인지 나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돈도 별로 되지 않는 혼밥 손님이었음에도 아주머니는 나를 친절히 맞아주셨다.

밥이 맛있는 것은 물론이고, 더 먹고 싶은 것은 없는지부터 밥은 부족하지 않은지 다정하게 챙겨주셨다. 낡고 허름한 공간에 손님은 나 뿐이었지만, 이방인을 맞이하는 아주머니의 다정한 시선으로 물리적인 공간의 허전함이 가득 채워졌다. 

 

"남는 자리가 있는데, 여기 앉아 가세요."

복통을 회복시키는 것의 화룡정점은 집으로 돌아가는 KTX 기차 안이었다. 입석으로 2시간 가량을 서서 가야 하던터라 뒷좌석에서 불편하게 서있던 내게 한 아저씨께서 아기를 안으시면서 하셨던 말씀이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됐었다. 하지만 그 분께서 내게 보여주신 다정함으로 나는 편히 앉아 갈 수 있었고, 마지막 기억이 좋지 않았던 청량리역을 행복한 기억으로 덮어쓸 수 있었다. 

 

"다정함, 여전히 내가 싸우는 방식"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에서 웨이먼드는 이렇게 말한다. 뭐가 뭔지 혼란스러울 땐, 다정함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이다. 사실 지금의 난 내가 살아왔던 방식인 '다정함'에 대해 회의감을 느껴 여행을 떠나온 것인데 말이다. 

'내 다정함을 상대방은 이용해서 호구 잡히는 것 아닌가?' '내가 현장을 진심으로 대하는 태도가 윗사람들에게는 안 보이지 않을까?' '나도 그저 싸가지 없는 사람으로서 할 일만 하고 미련두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닐까?'

이런 생각을 최근 했었다. 특히나 지난 2년 간 다정함을 무기로 삼으며 살아왔으나 윗사람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내가 굳이 다른 사람에게 다정함을 보여줘야 하나?'라는 회의감까지 들기도 했다.

 

그러나 현장에 도움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나의 노력을 조금씩 알아가는 사람들이 생기고 있다. '힘 매니저님은 지금껏 스태프들과는 다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고 있다.

대인관계 역시 그렇다. 누군가는 나를 싫어하고, 배신하며, 이용하겠지만 그럼에도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가진 다정함과 친절함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으며 분명히 난 회사와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치며 유의미한 변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아팠던 배가 완전히 나은 오늘부터, 난 다시 다정함을 무기로 싸워나가기로 했다. 이 무기를 기반으로 내가 내린 다정한 선택들에  후회하지 않으며 내가 선택한 삶을 사랑하며 살아가려 한다. 

내가 내린 잘못된 선택들이 분명히 있다. '그때 그렇게 행동하지 말 걸'이라는 후회를 할 때도 많다. 그럼에도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의 에블린처럼 다른 선택을 한 다중우주의 삶이 아닌 '다정함에 충실하며 선택한' 지금의 삶을 그대로 사랑하려 한다. 

 

이 글을 보는 구독자도 자신의 한 선택에 대해 후회가 되거나, 지금 살아가는 방식에 회의가 생긴다고 해도 너무 괴로워 하지 않길 바란다. 때때로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자기 혐오로 이어지는 것은 좋지 않기 때문이다.

그 보다는 지금 자신이 한 선택 역시 다중우주 속의 누군가에겐 꿈만 같은 삶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면 좋겠다. 결국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삶을 꾸려나가는 것이 최선의 삶이기에 오늘 하루도 다정함을 잃지 않는 하루가 되길 바란다.

마파 드림.

피드백을 남겨주세요!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마파멘터리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 2024 마파멘터리

비상업적이지만, 개인적인 생각과 영감이 가득한 뉴스레터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 서초구 강남대로53길 8, 8층 11-7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070-8027-28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