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지독한 고추 사랑 1

핑크의 반란 1

2022.08.01 | 조회 8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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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던이의 썩 무던하지 않은 하루

할머니를 추억하며 이런저런 생각 정리

요즘 세상에 부모를 모시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20대에 덜컥 가장이 되어버린 아빠는 평생 할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예전 같으면 '내가 널 이만큼 키웠으니 앞으론 네가 나를 먹여 살려라'고 할 수 있었다지만, 사실 그렇게 따져도 할머니는 아빠를 오래 키우지도 않았다. 아빠는 중학교때인가부터 연무대 이모할머니댁에 맡겨져서 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도 아마 기숙사에 살았던 것으로 안다. 그러니까 아빠는 십 여 년 부모의 보살핌을 받고 50 여 년을 할머니를 모시고 산 것이다. 아무래도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효도가 아닌지? 아빠는 어린 나이에 한 집안의 가장이 되기도 했지만, 할아버지 쪽 친척들, 할머니 쪽 친척들 통틀어 기둥같은 존재 였기 때문에 모두가 아빠 하나를 바라보고 의지를 많이 했다. 나는 모든 친구들이 이렇게 친척들을 자주 만나는 줄 알았는데, 대부분의 친구들은 '이모할머니'나 '외숙할아버지'가 누구인지 그 단어 자체를 알지도 못했다. 우리집엔 거의 매 주 친척들이 놀러 왔는데, 특히 가까이 사는 할머니 바로 아랫 동생 연무대 할머니댁 식구들을 자주 만났다. 할머니는 별 것도 아닌 일로 매번 연무대 할머니와 싸웠고 전주 외숙할아버지, 부산 외숙할아버지에게는 호통을 쳤다. 막내 이리 이모할머니는 할머니가 학교를 못 가게 된 결정적인 마지막 존재이기 때문에 제일 미워 했고 전화도 몇 분만에  "아 몰라, 나 바빠, 끊어!"하며 오래 하지도 않았다. 나는 어렸을 때 부터 집순이었는데, 하교 후 집에 있으면 엄마 아빠가 퇴근 할 때까지 거의 3~4시간을 할머니가 전화로 소리지르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할머니는 매일 전화로 몇 시간 씩 본인 동생들을 드잡이 하면서도 평생 친구라 할 만한 사람은 동생들 밖에 없었다. 

나는 이 온 집안의 기둥의 첫 딸로,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오롯이 혼자 받았다. 나는 태어나자마자 스타였다. 온 친척들이 나를 예쁘다고 물고 빨았다. 외가 쪽으론 사촌 언니가 한명 있고 내가 둘째인데 언니가 어릴때부터 미국에 산 기간이 더 길어서 양가 친척에게 모두 나는 귀여운 첫 손녀, 첫 조카 대접을 극진히도 받았다. 불 같은 성격으로 아빠 사촌들 사이에 호랑이라 소문 난 아빠도 내 앞에선 무장해제였다. 친척들이 "아빠 무섭지?" 물어도 나는 아빠가 혼낼까봐 무서웠다기 보다는 아빠를 실망 시킬까봐 무서웠던게 다였다. 아빠는 "딸, 아들이 자라면서 엄마랑만 친하고 아빠랑은 데면데면해서 서운하다"고 하는데, 그건 어디서 보통의 집안 얘기들을 듣고와서 보통의 아빠들의 서운함을 옮아와서 하는 말이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는 아이들에게 지겹게 퍼붓는 통과의례 같은 질문에 늘 속으로 '아빠가 좀 더 좋아'라고 생각하면서 말론 "둘 다" 라고 대답했고 지금도 아빠랑 친한 흔치 않은 딸이다. 아빠는 할아버지 닮아서 정도 많고 장난기도 많아서 어릴 때 고모들한테도 장난이나 농담을 자주 했다고 한다. 작은 고모는 아빠가 놀려서 울다가도 아빠가 웃겨줘서 다시 웃으면, 엉덩이에 털 난다고 또 놀렸다. 다른데선 근엄하고 점잖은 아빠가 내 앞에선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웃겨주곤 했다. 내가 아기 때 감기에 걸려서 코가 막히면 아직 아기에겐 '흥!'기능이 없기 때문에 아빠 엄마가 빨대 같은걸로 콧물을 빨아 올렸다고 한다. 교수인 아빠는 엄마보다 근무 시간이 비교적 자유로워서 나는 아빠 학교에 따라 가서 자주 놀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아빠 방에 놀러 가면 아빠는 항상 동전 몇개를 쥐어주면서 음료수를 뽑아먹게 했는데 그게 난 참 좋았다. 

이렇게 공주처럼 온 가족의 사랑을 받던 나에게 동생이 생긴 것이다. 동생이 생기면 받던 혼자 독차지 하던 사랑을 나눠야해서 샘이 난다는데, 나는 넘치게 많은 사랑을 받은 덕인지, 동생이랑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그런지, 동생이 태어나기 전부터 동생이 좋았다. 나는 동생과 다섯 살하고도 한달이 차이가 난다. 그 다섯살 차이가 얼마나 크냐면, 여섯살의 나는 "오빠 낳아달라니까 왜 동생을 낳아줘~"라는 농담을 스스로 만들어하면서 웃을 정도로 머리가 커 있었다는 뜻이다. 기저귀도 내가 갈아줄게, 호언장담 했지만 사실 막 태어난 애는 생각보다 귀엽지가 않다. 빨갛고 쭈글쭈글하고 똥 냄새도 지독하다. 그래도 외계인 같던 동생이 크니까 제법 귀엽고 순해서 미니미 처럼 어딜 가든 데리고 다녔다. 좀 귀찮은 점도 있었다. 할머니는 내가 친구들하고 놀러 갈 때 마다 동생도 데려가라 했는데,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통에 나는 큰 애들만 탈 수 있는 활동적인 놀이기구를 전혀 이용할 수 없었다. 남자 친구들은 "아~동생을 왜 데려와!" 하면서 자기들끼리 놀았고 나는 동생 엉덩이 받쳐주면서 미끄럼틀에나 올려주고 그랬다. 같이 놀이터에서 놀다가 동생이 집에 안 간다고 고집을 부려서 "넌 여기있어 그럼, 난 갈거야!"하고 돌아섰는데 동생이 헐레벌떡 따라오다가 그네 타던 동네 오빠의 발에 치여서 넘어진 적이 있다. 얘는 별로 다치지도 않았고 놀라서 가만히 있는데 내가 놀라고 미안해서 와앙 울었다. 우리 집은 15층 꼭대기였는데 얼마나 크게 울었는지 할머니가 그 소리를 듣고 내려왔다. 내가 혼자 우니까 할머니는 내가 다친 줄 알았다. 동생도 같이 울기 시작해서 할머니가 자초지종을 듣는데는 한참이 걸렸다. 동생은 원래 좀 울보였다. 내가 TV를 돌리다가 어떤 채널에서 귀신이 갑자기 튀어나와서 소리를 꽥 지르고 울었는데, 동생은 TV를 보고 있지도 않았는데 내가 소리지르는 것만 보고는 같이 울었다. 애가 원래 잘 우는 앤데 내가 울렸다고 괜히 내가 혼났다.

나이차이 많이 나는 남매의 단점은, 나는 어린 애 수준에 맞춰서 놀아야하고, 동생은 어릴 때 해야하는 놀이를 건너뛰고 누나에 맞는 윗단계 과정을 밟아야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생은 나보다 동요를 많이 모른다. 누나 따라 동요보다 가요를 먼저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동생 한글은 자음 모음 자석으로 내가 다 가르쳤다. 이 때 경험으로 외국인 (전)남자친구들에게 한글은 기깔나게 가르친다. 동생이 좀 커서는 바둑학원, 미술학원을 같이 다녔는데, 당연히 5살 많은 누나가 더 잘할 수 밖에 없는 것 들인데도 동생은 누나를 이길 수 없는 분야에는 흥미를 빠르게 잃었다. 오고 가는 길에 동생을 업어주기도 했던 이 두 학원 가는 길을 나중에는 나 혼자만 다녀서 좀 심심했다. 동생은 승부욕이 강해서 가족끼리 카드놀이를 할 때에도 지면 울었다. 화장실에 가서 안 우는 척 질질 짤 때 아빠랑 내가 몰래 좋은 패가 동생에게 들어가게 조작해두면 이기고는 좋다고 벌개진 눈으로 멋적게 웃었다. 할아버지도 장난꾸러기라 맨날 아빠랑 게임을 하다가 얄밉게 이기고는 놀려서 아빠를 울렸다고 한다. 

이렇게 알아서 서로 꽁냥거리고 잘 지내는 남매 사이를 이간질 한 것은 주변 어른들이었다. 우리 집은 양가 모두 내 친구들의 할머니, 할아버지에 비해 지독히도 옛 사고에 묶여있다. 책 <87년생 김지영>의 김지영이 87년생인 설정인 이유는 그 나이 또래가 변해가는 사회와 그렇지 못한 가족들, 시댁들의 괴리감을 겪는 '중간 세대'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 또한 89년 생으로 평생 남녀 차별을 보고 겪으며 살고 있다. 진짜 남녀 차별이 당연했던 시대에 사는 것이 마음 편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에야 사람들이 남녀 평등을 외치지만, 그리 오래 전도 아닌 89년에 내가 태어났을 때, 내 첫 앨범 표지에 엄마 아빠 지인들이 쓴 모양인 롤링페이퍼에는 "꽝입니다! 다음 기회에! 다음엔 아들 낳길!"이 쓰여 있다. 나는 고추를 달고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날 때부터 꽝이었다. 동생의 첫 앨범엔 5살 많은 누나의 "오늘은 동생을 난는날"이란 일기가 들어있다. 비록 그 누나는 엄마가 죽을 뻔 하고 동생을 낳는 날 '작은 할머니 댁에서 선풍기를 쐬고 그림 그린 것'과 '병원에서 뽑아먹은 음료수'에 대해 더 자세히 썼지만 꽝보다는 낫잖아? 

동생이 태어나기 전 할머니는 내 옆에서 김치를 물에 씻어주면서 밥을 먹였다. 동생이 태어나면서 나는 매운 김치든 뭐든 혼자 알아서 밥을 먹었다. 혼자 먹을 만한 나이가 되었을 때라서 그게 서운하지는 않다. 동생이 이유식을 떼고 밥을 먹기 시작하면서 밥상은 홍해를 가르듯이 둘로 나뉘었는데, 동생과 아빠쪽엔 고기 반찬이, 내 앞에는 김치와 나물들이 놓여졌고 할머니가 그렇게 앉도록 자리를 지정해 주었다. 앉으란 데 안 앉고 눈치없이 다른 데 앉으면 반찬이 상 위를 날아다니며 위치가 바뀌었다. 오늘 새로 한 밥은 아빠와 동생이 먹었고 어제 먹던 찬 밥은 데워서 엄마, 나, 할머니가 먹었다. 어린 나이였다면 몰랐을수도 있었겠지만 이때 이미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이었고, 동생이 막 태어난 6살 때에도 눈치가 이미 빤 한 나이었다. 눈 앞에 벌어지는 차별을 충분히 인지할 만한 나이였다. 외가는 더 심했다. 외갓집은 설날에 가면 목을 혼자 못 가누는 갓난아이도 아들이면 식탁에 앉아서 며느리들과 외할머니가 차려주는 상을 받았고, 여자 사촌들과 나, 외숙모, 엄마, 이모, 외할머니는 다 차려드리고 난 뒤 앉은뱅이 식탁에 앉아서 따로 밥을 먹었다. 바닥에서 밥을 먹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남자들 식후 과일을 챙겨드렸다. 

그렇기 때문에 할머니가 "너는 왜 조르질 않아, 가끔씩 갖고싶은거 조르기도 하고 그래" 해서 주주 인형을 산 날도, 내가 맨 처음 든 생각은 '내가 갖고 싶은게 있으면 사 주게?' 였다. 그 때가 7~9살 그 나이 쯤 이었는데, 어린 나는 가족들이 날 위해 뭘 해줄 수 있다는 사람들이었단 사실을 이미 잊고 있었다. 막 태어난 빨갛고 쭈글쭈글한 외계인에게는 내가 없는 뭔가가 달려있었는데, 나는 그게 그렇게 중요한건지 외계인이 태어나기 전까진 몰랐다. 엄마 뱃 속에서 미리 알았다면 달고 나왔을텐데. 나는 화장실에서 몰래몰래 서서 오줌을 눠 봤는데, 처음에 오줌 줄기가 강할 때는 변기 안으로 잘 들어가도 나중에 남은 오줌이 쫄쫄거리면 다리로 흘러내렸다. 어떻게 해도 이 신체 구조로는 오줌을 변기 안으로 골인 시킬 방법이 없었다. 차를 타고 이동중에도 동생은 급하면 차를 갓길에 세우지 않아도 페트병에 멋지게 오줌을 눌 수 있었다. 그 깔때기 같은건 달고 나오면 참 쓸모가 많아보였다. 엄마는 차별 받는 내가 너무 불쌍해서 뭘 더 챙겨주려고 했었다고 한다. 그 정도로 누가봐도 티나게 차별을 받았다. 똑같은 행동을 해도 나는 뭐라고 혼을 내더니 "그거 쟤가 한건데?" 했더니 "그래? 괜찮아" 하면서 180도 변하길래 꼭지가 돌아서 할머니보고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동생이 태어나기 전 나는 할머니와 같은 침대에서 잤는데, 할머니는 늘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드라마나 전설의 고향 같은 걸 틀어두고 잤다. 그런걸 보면서 알게 된건지 '죽음'에 대해 4살때 쯤 깨달은 뒤로 "할머니 죽지마~"하면서 매일매일 울면서 잤던 나였다. 동생이 태어나고는 할머니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매일매일 생각했다. 

할머니는 작년 내가 한국에 갔을 때 스웨터를 뜨고 계셨다. 나이드니 눈이 침침하고 손에 힘이 없어서 자꾸 코가 빠진다고 한숨을 푹푹 쉬셨다. 내가 하기 힘들면 할 수 있는걸 찾아서 하시라고 왜 그렇게 작은 코로 스웨터를 뜨냐고 물었더니, "으응, 이거 입고 우리 손주들 내가 죽으면 장례식장에서 입으라고" 하셨다. 그때 어디가 딱히 크게 아프실 때가 아니어서, "지금 건강한데 뭐 벌써 장례식을 생각하냐"고 츤츤거리면서 빠진 코를 잡아드렸다. '내가 죽으면 장례식장에서 입으라'는 손주들에는 내가 포함되지 않는다. 손자 셋을 말하는 거였다. 아빠와 고모 둘 다 딸하나 아들하나를 낳았다. 연무대 이모할머니네 아들과 딸들, 그러니까 나에게 삼촌과 고모들은 다 첫째를 아들로 낳고는 더 낳지 않았다. 첫째가 딸이었다면 외동으로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시골 집에서는 할머니가 동네 사람들 농작물 빼앗아 오는 것 말고는 자유롭게 뭘 사기가 쉽지가 않다. 인터넷 쇼핑은 할머니에게 너무 어렵다. 그놈의 스웨터를 뜬다고 이 실은 너무 얇네, 이 실은 칙칙하네, 이건 너무 굵네, 하면서 며느리에게 인터넷으로 실을 사달라고 들들 볶았다. 그렇게 어찌저찌 작은 고모가 도와 뜨면서 스웨터인지 조끼를 3개 완성하긴 했던 모양이다. 스웨터를 입을 건 남자애들인데 그것 때문에 고통받는건 여자들이었다. 그래놓고 한여름에 돌아가시면 어쩌라는 것인지. 할머니 장례식에 손자들은 스웨터는 커녕 땀을 뻘뻘 흘려서 기절할뻔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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