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한, 두번째

할머니는 정이 없는 사람이다.

2022.07.22 | 조회 2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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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던이의 썩 무던하지 않은 하루

할머니를 추억하며 이런저런 생각 정리

할머니는 정이 없는 사람이다. 평생 개를 여러번 여러마리 키우면서도 한 번 쓰다듬어 준 적이 없다,고 아빠가 그랬다. 생각해보면 어릴때부터 돌아가신 지금까지 할머니가 누굴 안아준 기억이 없다. 엄마 아빠가 출근했을 동안 할머니가 나와 동생을 봐주셨으니 안아 들어올릴 일이 없진 않았겠지만 어쨌거나 내 기억에 뒷통수 납작해지지 말라고 요리조리 머리를 옆으로 굴려 뉘인 것 외에는 할머니가 누굴 만지거나 쓰다듬은 기억도 없다. 친척이나 아는 사람 애를 봐도 예쁘다거나 귀엽단 소리를 일절 한 적이 없다.

아들 딸들, 며느리, 사위들, 손자손녀들은 할머니의 보물이자 '자랑'이었지만 '사랑'은 아니었던 것 같다. 부모의 사랑은 이유없는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데 할머니의 사랑은 확실히 조건부였다. 아들과 손자가 딸과 손녀보다 좋았고, 잘 생긴 애가 덜 잘생긴 애보다 좋았고 공부를 잘하는 애가 못하는 애보다 좋았다. 큰 아들과 큰 딸이 서울대를 갔는데 막내딸이 그에 못미치자 "어디가서 남들이 대학 어디갔냐하면 재수한다고 해라" "큰 사람 될 오빠에 누가 되지 않게 흠 잡힐 일 하지말고 어디서든 말과 행동을 조심해라"며 비수를 꽂았다. 

할머니가 이렇게 정이 없는 데에는 할머니의 두번째 한이 큰 몫을 했을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할머니의 인생에 큰 역할을 한 남자가 셋 있다. 할머니의 아버지, 남편, 그리고 큰 아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한 명의 남자가 더 있다. 할머니의 인생에 큰 역할을 한 남자는 네명이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3남매를 남기고 떠나셨지만 사실 이 부부에겐 아들이 하나 더 있었다. 

"무던아, 너한테 삼촌이 몇 명이지?"

내가 막 학교에서 가족관계와 호칭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을 때 할머니가 물었다. 할머니는 텔레비젼에서 퀴즈쇼가 나오면 종종 나를 시험하곤 했기에 이번에도 그런류의 질문이겠거니 하고 열심히 대답했다.

"삼촌? 작은 할아버지 아들들이랑 외숙할아버지, 이모할머니 아들들 말고는 친삼촌은 없지. 고모들 말고는? 왜요?"

나는 그 때 할머니가 오열하는걸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것 같다.

어느 고부관계가 좋겠냐마는, 할머니는 할머니의 시어머니와 애초에 사이가 좋지않았다. 작은할아버지와 우리 할아버지는 다른 배에서 나온 형제인데, 그래서 본처의 아들인 할아버지를 새어머니가 미워했다고 한다. 그 새어머니를 본처의 아들과 며느리가 모시고 산 것이다. 할머니가 아들, 딸, 아들 이렇게 셋을 낳고 둘째 아들이 막 뽈뽈 기어다닐 무렵의 일이다. 

"걔가 또 잘생겼었어. 빼쪼롬, 하니 연예인 해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 애기때부터 남다르게 이뻤다고."

그렇게 이쁘던 둘째 아들이 잠시 할머니가 한눈을 판 사이 사이다병에 든 농약을 마신 것이다. 근데 그 헷갈리기 쉬운 사이다병을 바닥에 놓은 사람이 누구냐, 반전없이 할머니의 시어머니였던 것이다. 병원에 데려갔지만 손쓸 수 없이 고통스럽게 죽었다고 한다. 그 작고 유난히 이뻤던 아들이 내 눈 앞에서 목이 새카맣게 타 죽는걸 보다니. 거기서 정신줄 놓고 미치지 않은 할머니가 대단하다. 그렇게 나는 할머니가 세상에 정을 뗐다고 생각한다.

아들을 보내고 넷째를 임신하게 되었을 때, 할머니는 내심 둘째 아들이 다시 환생해 돌아오길 바랐다. 그런데 태어난 아이는 둘째 아들과 하나 닮은 구석도 없는 딸이었다. 예뻐보일리가 없었다. 원래 막내는 부모와 사는 시간이 가장 짧아서 억울한 법인데 그 와중에 할머니는 철저히 막내를 외면하고 큰 아들과 큰 딸에게만 집착했다. 할아버지만 유일하게 작은고모를 예뻐하셨었다고 한다.

"공부는 느이 오빠랑 언니가 잘하니까 너랑 나랑은 그냥 이렇게 재밌게 살자" 했던 할아버지는 너무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셨다. 

아빠 결혼 전에 돌아가셔서 나는 뵙지도 못한 할아버지지만 나는 할아버지가 그립다. 초등학교 때 내가 기쁠 때와 슬플 때를 그리라고 했는데 나는 슬플 때 그림으로 할아버지 제사를 그렸더니 아빠가 뵙지도 못한 할아버지 제사가 왜 슬프냐며 가식적이라고 했다. 근데 난 정말 할아버지 제사에 슬펐다! 온 친척이 나보고 할아버지가 환생하신 것 같다고, 성격이 똑 닮았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정이 많고 외향적이어서 어딜가든 친구를 만들었다. 술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고 어떤 일에든 "허허~괜찮여~"하면서 태평해서 할머니 속이 터졌다. 할아버지가 따뜻한 노란색이면 할머니는 피멍같은 보라색이다. 가슴에 아픔이 있어서 그런가보다. 할아버지도 같은 아픔을 겪으셨지만 할아버지도 무던이었나보다. 원조 무던이. 할머니가 나랑 동생을 차별할 때마다 나는 뵌적도 없는 할아버지가 그리웠다. 할아버지는 내 편을 들어줬을텐데! 서로 너무 다른 두 사람이 부부로 지낼 때 어느 쪽이 더 힘들었을까? 할머니 할아버지 둘이 사랑하긴 했을까? 할머니는 할아버지 얘기를 잘 안하셨는데, 좀 캐물어볼걸 후회스럽다. 할아버지가 잘 생겼었단 얘긴 하신 것 같다. 할머니한테 MBTI 테스트를 좀 해보라할걸. 분명 T였을 것 같다. 

정 없는 우리 할머니. 하늘 나라 가셔서 유난히 이쁘던 둘째 아들 만나셨을까. 먼저 가신 할머니의 오빠, 남동생, 여동생, 그리고 정 많은 우리 할아버지 만나서 간만에 회포 푸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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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odong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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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ver 1 year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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