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꽃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꽃은 뭐였을까.

2022.07.31 | 조회 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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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던이의 썩 무던하지 않은 하루

할머니를 추억하며 이런저런 생각 정리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꽃은 뭐였을까. 비자 문제 때문에 큰 손녀가 할머니 장례식장에도 가질 못 했는데, 아빠가 찍어보낸 화환들 사진을 보니 문득 궁금해졌다. 할머니도 내가 좋아하는 꽃이나 색, 동물이 뭔지 전혀 관심이 없었으니 쌤쌤이긴 하지만. 할머닌 애초에 돈도 안되고 먹을수도 없는 꽃 보다는 고추나 토마토 같은 농작물을 좋아했다. 할머니 마지막 가는 길 화려하라고 수많은 화환이 들어왔는데, 할머니는 하늘에서 보시고 아이고 돈 아깝다, 꽃 대신 돈으로 주지, 했을 것 같다. 부의금 들어 온 것 모두 기부한다는데 그 소리까지 들으셨으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뛰어나오실지도 모른다.

꽃을 너무 좋아하는 아빠는 내가 열살 쯤 시골에 땅을 사서 매주 주말 정원을 가꾸었다. 동생과 내가 독립한 지금은 그 집으로 아예 이사를 가서 꿈에 그리던 생활을 하고 있다. 어렸을 때에는 매주 주말 친구들과 약속도 못 잡고 거길 따라가야하는게 썩 달갑지 않았다. 겨울에 그 집에 가면 주중에 차가워진 바닥을 달구는 동안 이를 딱딱 떨면서 기다려야했고 여름엔 모기가 득실거렸다. 한 번은, 아니 꽤나 자주 쥐가 들어와서 이불에 독한 오줌 똥을 갈겨대고 쌀 포대고 뭐고 닥치는 대로 먹어대서 온 가족이 '쥐 채'라는 걸 만들어서 부여잡고 쥐 몰이를 했다. 너무 징그러워서 쥐가 내 근처에 왔는데도 쥐 채로 때려 잡질 못했던게 2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때려 잡질 못해서 그렇지 찍찍이 쥐덫에 붙은 쥐를 버리는 건 쉽다. 몇 년 전 같은 과 대학원생 오빠들이 찍찍이에 붙은 쥐를 어쩌질 못하고 있길래 툭 버려줬더니 눈이 동그래졌다. 벌레 잡는게, 쥐 버리는게 뭐 대수라고? 남들이 안해 본 경험을 많이 해 볼 수 있었던 덕에 할 수 있는 일이 다양해졌다. 

아무튼 어렸을 땐 그저 그랬던 이 주말농장이 좋아진 건 고등학교에 갈 때 쯤이었나 그렇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 집은 우리 모두에게 아주 좋은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우리 가족들의 친구들과 친척들이 자주 모여 놀 수 있는 아지트가 되었고, 맑은 공기 마시며 좋은 경치를 보니 머릿 속, 마음 속 세계가 커졌다. 도시의 색은 무채색인데, 시골집은 온갖 화려한 색들이 저마다의 소리를 낸다. 아빠가 언젠가 내 생일선물로 지어 준 연못 옆 원두막에 누워서 맴맴 매미소리도 듣고 만화책도 봤다. 아빠는 시간을 허투로 쓰는걸 싫어한 반면 나는 청개구리처럼 멍 때리고 가만히 있는걸 좋아했다. 청개구리 하니까 말인데, 청개구리나 뱀, 고라니를 직접 보는 것도 요즘 세상 사는 내 또래에겐 흔치 않은 경험이다. 최근에 친구들과 얘기하다가 나는 남들보다 상상을 많이하고 다양하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혼자 조용히 가만히 있는 것 같아도 머릿속에 온갖 알고리즘이 돌아가고 있어 무척이나 바쁘다. 웹툰 <유미의 세포들> 처럼 내 세포들을 볼 수 있다면 한 놈은 우주를 동동 떠다니고 있을 것이다. 전생이 있다면 나는 달을 낚는 방랑시인이나 히피였지 싶다. 지금 쓰는 이 글도 그렇고, 추상화를 그리거나 연구 발표 준비를 할 때에도 나는 몇 날 며칠을 머릿속으로'만' 구상해서 실제로 글로, 그림으로, 발표 슬라이드로 구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비교적 굉장히 짧아 보인다. 대학교 때 동기 언니가, "너는 맨날 노는 것 같아 보이는데 숙제를 어떻게 다해오지? 왜 성적이 좋지? 공부는 언제 하는거야?" 했다.  도시에서만 사는 것 보다 이렇게 새소리, 개구리 소리, 바람 소리 들으면서 저마다 개성있는 꽃들을 보고 자란 것이 혼자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 주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 3년 내내 봄에 뒷산에 핀 수선화들을 잔뜩 꺾어서 교실에 가져갔다. 가을엔 작약. 칙칙한 교실이 밝아졌다. 꽃은 그런 힘이 있다. 수수한 색으로 화려함을 담아낸다. 친구들은 수선화나 작약이 뭔지 몰랐다. 내가 아빠 덕분에 꽃 이름들을 많이 아는구나 하는걸 그 때 알았다. 지금도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그 때 그 노란 꽃 뭐였지? 너 맨날 들고 왔잖아" 물어본다. 담임 선생님은 "무던이가 꽃을 보고 자라서 마음이 여유롭구나, 부럽다" 하셨다. 

푸른 잎들, 흰 벚꽃, 노란 수선화, 파랗고 빨간 수국, 보라색 작약. 아빠는 온 계절 꽃을 볼 수 있도록 꽃밭을 계획했다. 이렇게 소중히 땀 흘려 가꾸는 아빠의 꽃밭에 할머니는 어디서 얻어온 농작물 모종들을 툭툭 던져놨다. 꽃이나 작물들은 심어둔다고 저절로 잘 자라지 않는다. 눈 깜짝 하는 사이에 잡초가 공주님같이 연약한 꽃과 나무들을 덮어버리기 일쑤다. 잡초를 매거나 물을 주는건 늘 아빠의 몫이었다. 할머닌 그저 열매를 따는 그 시기만 좋았다. 장에 모시고 가면 고추, 토마토, 상추 같은걸 사다 심자고 졸랐다. 누가 키우게? 하면 본인이 잡초도 뽑고 물도 주겠다고 지키지도 않을 약속을 했다. 어린 애들이 뭣도 모르고 강아지 키우고 싶다고 조르면서 똥도 치우고 밥이랑 물도 챙겨주겠다고 큰소리 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흐드러지게 핀 봄 꽃들을 앞에 두고 할머니는 땅만 보고 다녔다. 쑥이랑 고사리를 찾느라고. 온 산을 누비면서 얼마나 캐셨는지 일년 내내 먹고도 남아서 새 봄이 올 때마다 냉동고에 작년, 재작년 고사리가 쌓이고 또 쌓였다. 작은 고모는 어렸을 때 자기 엄마가 예쁘고 옷도 세련되게 입어서 늘 친구들 앞에서 으쓱했다고한다. 그런 자랑스런 엄마가 부끄러운 적이 한 번 있었다는데, 쑥 캐는게 재밌어서 정신없이 산을 타다가 고모 학교 뒷쪽으로 뿅 나왔을 때라고. 할머니는 입원하시기 직전까지 봄마다 산을 탔다. 한번 심하게 넘어진 뒤로 다리가 많이 불편해 지셨는데도 봄만 되면 고사리 파워가 솟아났다. <애로부부>란 TV 프로그램에서 봤는데, 고사리가 남자들한테 안 좋다고 한다. 할머니가 그 사실을 진작 알았더라면 끔찍이 아끼는 아들과 손자한테 안 좋다는거 캐러 다니진 않았을텐데 싶다.

할머니랑 같이 찍은 사진들을 찾다보니 꽃 앞에서 찍은 사진들이 많다. 찍어준 사람은 보통 아빠니까 아빠의 취향이 반영된 것인지 할머니도 꽃을 좋아하긴 했는지 궁금하다. 할머니 나는 수국이랑 데이지, 아네모네를 좋아해요. 장미를 흔하고 뻔해서 나는 별로 안좋아해. 할머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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