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지독한 고추 사랑 2

핑크의 반란 2

2022.08.05 | 조회 4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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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던이의 썩 무던하지 않은 하루

할머니를 추억하며 이런저런 생각 정리

동생은 지금도 그렇고 어렸을 때 부터 똘똘했다. 코를 찔찔 흘리면서 퍼즐을 기가막히게 맞췄다. 그래서 그런지 머리가 큰바위얼굴인데, 그에비해 목이 가늘어서 '사과에 이쑤시개'라고 놀리곤 했다. 이 큰 머리는 엄마 뱃속에서 나올 때 큰 문제가 됐다. 작은 병원에서 자연분만을 시도하던 엄마는 애 머리가 껴서 빠지지도 들어가지도 않는 상태로 앰뷸런스도 없어서 아빠 차를 타고 큰 병원으로 옮겨졌다. 내가 작은 할머니 댁에서 선풍기 앞에서 아아~하면서 놀고 병원에서 음료수를 뽑아먹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동생이 태어나고 나서 샤워를 같이 할 때 보니 엄마 배에는 전에는 없던 큰 빨간 줄이 생겨있었다. 빨간 망또 이야기에서 늑대의 배를 갈라 할머니를 꺼낸 것처럼 동생을 엄마 배에서 꺼낸 것 같았다. 요즘은 제왕절개를 하나 자연분만을 하나 큰 차이 없다고 하는데 동생이 어렸을 때 좀 비리비리 약한 것이 자연분만을 못해서 그런가 하면서 엄마는 미안해했다. 아무튼 나는 학교에서 별명이 '보스'일 정도로 남자애들을 때려잡고 다니는 씩씩이였고, 동생은 좀 약하고 조용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같은 학교에 다닐 수 있었던 건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동생이 1학년일 때 였는데, 동생을 건드리는 애가 있으면 가서 한마디 해주는 나름 멋진 누나였다,고 (혼자서) 기억한다. 지금의 나는 '남자 다운 것, 여자 다운 행동' 처럼 gender role을 나누는 것 조차도 싫지만 아무튼 어릴 때 부터 나는 '머스마 같이' 왁자지껄하게 놀았고, 동생은 '기지배 처럼' 소심하고 툭하면 찔찔 울었다. 나는 여자 친구들도 별로 없고 남자 애들이랑만 놀았다. 나는 교복 말고는 치마도 입지 않았는데, 왜 바지만 입혔냐고 엄마한테 물으니 "니가 남자애들이 아이스께끼 한다고 안 입었지"라고 했다. 목소리도 변성기가 오기 전까지 동생이 더 하이톤이였다. 나랑 둘이 목소리가 비슷했는데 내가 살짝 더 굵어서 80퍼센트 정도의 확률로 동생이 전화를 받으면 "무던이냐?"하고 내가 전화를 받으면 동생인 줄 알았다. 난 그렇게 내가 더 남자같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엄마 뱃속에 두고 온 내 고추를 동생이 잘못 달고나왔다고 박박 우겼다. 주말 농장이 생기고 아빠가 트리 하우스를 만들거나 정원을 가꿀 때 도와달라고 하면 내가 달려가서 무거운것도 나르고 톱질 못질도 하고 그랬다. 내가 뭔가 터프한 행동을 하면 아빠는 "나는 아들이 둘인가벼" 했는데 난 그게 참 듣기 좋은 칭찬이었다. 

하도 내가 '두고 나온 고추'에 대해 징징거려서 그랬는지 원래 그냥 남매끼리 짝으로 맞춰주려고 했던 건지 모르지만 어른들은 신발이나 옷을 살 때 동생과 같은 디자인으로 사줬다. 텔레토비 운동화를 신기엔 이미 나는 나이가 너무 많았는데도 '동생이랑 차별없이 똑같이'가 나에게는 더 중요했다. 뽀짝뽀짝 텔레토비 신발을 신고 좋다고 다녔다. 사과에 이쑤시개는 어려서 운동화 왼쪽 오른쪽도 잘 몰라서 내가 신겨줘야할 때였다. 아무리 똑같은 디자인을 사줘도 여자옷은 핑크색, 남자옷은 파란색으로 나뉘는 경우가 많았다. 여자는 핑크고 남자는 파랑이라는 법은 누가 만들었는지 나는 또 그게 화가 났다. 나는 대학에 갈 때까지 내가 옷을 골라서 산 적이 없고 그냥 엄마가 사주는 옷을 입었는데, 핑크색 내복은 억지로 입긴했지만 너무 싫었다. 나는 고등학교 때까지 핑크색을 보면 경기를 일으키고 싫어했다. 분홍색만 고집하고 '여성스러움'을 강조하는 친구 옆에선 헛구역질이 나서 멀리했다. 지금은 많이 나아지고 분홍색도 좋아하지만 옷이든 물건이든 내가 분홍색을 고르는 일은 매우 드물다.

대학을 서울로 가면서 나는 외갓집에서 살면서 학교를 다녔다. 우리 집에선 서울대를 가지 않는 것이 왠지 이상한 일이고, 나도 공부를 썩 잘했기에 모두가 내가 서울대를 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수능을 말아먹고 (-이 수능 날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지만 다음 얘기에.) 이화여대에 붙었더니 다들 축하보다는 '얘가 재수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고3 때 담임 선생님도 당연히 내가 재수를 할 것이라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유일하게 이대에 붙은걸 축하해 준 두 분이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였는데 이 축하 이유가 대단하다. "그래, 서울대는 남자들 가게 자리 비워줘야지. 여대 중에는 이대가 제일이잖니? 너무 잘했다."고 하셨다. 외할아버지는 서울에 길이 막히는 것도 '여자들이 운전을 해서'라고 하셨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 약간 할아버지의 기억력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무던아 서울에 차가 왜 막히는 줄 아니?",  "그 뭐지, 중국에는 여자들 못 도망가게 발을 작게 만든다는 그걸 뭐라고 하더라?"라는 레퍼토리를 3년 내내 매일매일 저녁먹으며 들었다.  '여자애니까 위험해서'라며 대학 수업 시간표를 달라셔서는 마지막 수업이 끝나고 1시간 뒤부터 전화를 하셔서 어디냐고 물으셨다.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집에 와서 할아버지와 매일 2시간씩 바둑을 뒀다. 누가 20대 초반에 밖에서 친구들이랑 저녁도 못먹고 집에와서 할아버지랑 노는지. 나를 본보기로 본 사촌 동생들은 아무도 바둑을 배우지 않았다. 그렇게 잘해드린 착한 손녀인데 내 생일에 외할머니가 외식을 하러 가자고 하니까 여자 생일을 내가 왜 챙겨야하냐, 정말 진심으로 의아해 하시며 집밥을 드시겠다고 고집했다. 집밥을 차려놓고 둘이 나가 먹으라고 하셨다. 참고로 할아버지는 평생 냉장고를 본인이 열어본 일이 없다. 의사가 치매 검사 하려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뭘 꺼내려고 했는지, 냉장고 문을 어떻게 여는지 모르겠던 적 있으세요? 물었는데 할아버지가 모른다,고 했다. 의사가 치매가 진행됐나 싶어 띠용하는 표정을 하자 할머니가 옆에서, 이 양반은 원래 냉장고 열줄을 몰라요, 하고 안심시켰다.

우리 외할아버지는 90세가 넘으신 지금도 딸셋에 아들 하나인 것이 평생의 한이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할머니를 깨워서는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졌길래 당신과 결혼해서 아들이 하나밖에 없소, 하셨다. 첫 딸 뒤로는 둘째 딸 셋째 딸 이름을 남자 이름으로 지었다. 덕분에 나는 엄마 택배를 받을 때마다 "수취인과 관계가 어떻게 되세요? 00씨가 아빠죠?" "아뇨 ^^ 엄마에요" 식의 대화를 피할 수가 없다. 첫 딸인 큰이모는 또 딸만 둘을 낳았는데, 사촌 언니가 어릴 때 나에게 소곤소곤 "할아버지는 나랑 내 동생이 여자라 싫어하잖아"라고 알려준 적이 있다. 사촌 언니는 진작 할아버지한테 사랑받을 기대를 버린 것 같다. 나도 언니의 말을 허투루 듣지 말았어야하는데. 언니는 백인 미국인과 결혼을 했는데, 결혼할 때 할아버지께는 교포와 결혼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외국인과 결혼한다고 하면 충격 받으실까봐 그랬는데, 아무래도 '딸의 딸'의 결혼은 크게 관심이 없으셨던 것 같다. 외숙모는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아들 하나 더 낳으라고 할아버지가 고집하셔서 셋째를 낳으셨다. 딸이었다. 꽝입니다. 다음 기회에. 이 외삼촌네도 온다고 하니까 그제서야 내 생일 외식에 따라 나서셔서는 남자 외사촌 옆에 앉으시고 그 애에게만 용돈을 주셨다. 뭣 때문에 애초에 외식을 하게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우리 핑크들은 이 차별대우에 지쳤다.  이렇게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차별을 할 수록 여자 사촌들과 나는 강해졌다. 딸, 아들, 딸 이렇게 누나와 여동생 사이에 낀 남자 외사촌은 기운이 제일 약했다. 정말이지 남녀 차별은 여자들한테만 악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다. 지나친 기대와 아들에만 의지하는 것, 아들들도 이 차별에 숨이 막힌다. 사촌 누나의 생일 저녁에 와서는 할아버지를 오롯이 혼자 담당해야하는 외사촌의 마음은 어땠을까. 어쨌거나 강해진 핑크들은 조용한 반란을 시작한다. 외가 쪽 모든 손녀들은 다 미국에 나와산다. 100 퍼센트 남녀 차별 때문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나는 나와 사는 이유 중 그것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나는 요리를 좋아하고 잘 한다. 손재주가 좋아서 그림도 잘 그리고 뜨개질도 잘한다. 나는 이 소중한 나의 취미들이 '여성스러운 취미'로 치부되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뚝딱뚝딱 요리를 하니까 할머니가 "아이고~우리 무던이를 누가 데려갈꼬 이렇게 시집 갈 준비가 되었는데." 했다. 내가 요리를 잘 하는 것과 시집을 가는 것이 무슨 연관인지 도대체 나는 모르겠다. 나는 요리를 잘 하는 남자가 좋다. 전 남자친구 대부분이 요리를 잘했다. 한국인 남자친구를 사귀지 않은지는 오래되었다. 미국에 와서 만난 한국인 대학원생 모임의 남자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한 쪽은 술마시며 옆에 앉은 여자 허벅지를 슬쩍 더듬었고, 다른 한 쪽은 같은 과 남자들이었는데 음식 재료를 사서 내가 사는 집에 쳐들어와서는 요리를 만들어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나보다 나중에 대학원에 와서 따지고보면 후배들이면서 내가 전 해에 들은 수업의 노트 필기를 달라고 한 것도 모자라, 내가, 필기를 빌려주는 내가, 도서관에 가서 4부로 복사해서 4명에게 나눠달라고 뻔뻔하게 부탁했다. 내가 니들 종인 줄 아냐고 나도 똑같이 여기 공부하러 온 거라고 했더니 "너는 기가 세서 남자친구 못 만나는거다"라고 했다. 아침에 아내가 된장찌개를 끓이는 모습이 로망이라길래 나도 아침잠이 많은데 아침밥 해다가 침대로 갖다주는 남자가 이상형이라고 받아 쳤다. 내가 내 의견을 말하는 것이 '기가 센 것'이고 그게 '여성스럽지'않기 때문에 남자친구를 못 만나는 거라면 나는 남자친구를 만들고 싶지가 않다. 그 이상한 무리에서 나와서 내가 기가 세지 않다고, 아니 기가 세서 좋다고 말해주는 외국인 남자들 만나서 잘 사귀고 헤어지고를 반복 하고있다. 나이가 슬슬 차니 다들 결혼을 잘 하는 것 같던데, 종처럼 부려도 네네 하면서 순종적인 여자가 이 시대에도 있기는 한가보다. 엄마가 내가 한국인 남자 만났으면 좋겠다고 하길래 이동네는 저런 남자들만 있다고 얘기를 해줬더니 "기 세지 않은 척, 순종적인척 해서 한국 남자랑 결혼하고 결혼 한 뒤에 본색을 드러내면 안돼?"라고 하길래 기가 막혔다. 내가 왜 '내가 아닌 사람', 그것도 '내가 원하지 않는 여성상'을 연기해야하는지, 그것도 '저런 애들'과 결혼 하기 위해서 싫지 않은 내 모습을 덮어야하는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어렸을 때 내가 엄마 뱃속에 고추를 두고 나온게 한이라고 했더니 엄마가 "그럼 달고 나오지 왜 그랬냐"고 무심하게 쌀쌀맞은 말을 했다. 그 후로 나는 이 집에서 남녀 평등 외치기를 포기했다. 수십년 굳어온 사고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사회는 세대가 교체 되면서 천천히 변할 것이다. 나는 내 딸이 아이스께끼를 당하고 오면 내 딸에게 바지를 입히는 대신 가서 아이스께끼 한 남자애들을 훈계할 것이다. 물론 내가 결혼을 할지, 딸이 생길지는 모를 일이지만. 

작년에 결혼 얘기도 오가던 백인 남자친구와 헤어졌을 때 할머니는 다시 잘 해보지 그러냐, 걔만한 애도 없는 것 같다,고 할 정도로 그 애를 마음에 들어 했었다. 할머니는 내가 유학을 가기 전부터 내 손을 잡고 백인, 흑인은 절대 안된다, 한국인 사위가 좋다고 노래를 불렀던 사람이다. 그런 할머니가 다시 사귀라고 할 정도였으니 전 남자친구에게 할머니 마음을 바꾼 그 점에 대해선 박수를 쳐주고 싶다. 아무튼 다시 붙잡아 보는 건 어떻냐고 하시길래 속도 모르는 소리 하지말라고 짜증을 냈다. 내가 좋은 얘기만 전해서 그렇지 얘랑은 이런이런 문제가 있었다, 다시 사귀는 일은 없을거라고 못박았다. 그러고나서 좀 있다가 할머니는 "그래, 한국인이 역시 좋지." 라며 뭔가 새삼 깨달은 듯 말을 꺼내셨다. 내가 "왜?" 했더니 "한국인 남편이 있어야 사돈댁도 한국에 가까이 지내고 그렇지"라는 엉뚱한 소리를 했다. 내가 왜, 대체 왜!, why!, 시댁이, 한국인 시댁이 가까이 있는게 좋단 말인가. 엄마가 할머니를 모시고 사는것이 참 행복하고 좋다고 큰 착각을 하고 계셨던 모양이다. 본인도 어릴때부터 남자 형제들과 차별을 받아왔고, 시집살이도 했으면서 왜 손녀에게 한국인 시어머니를 가까이 두게 하고 싶었는지 아직도 미스테리다. 할머니 속은 할머니만 안다. 

그 후로 할머니에게 새로운 남자친구를 소개시켜주지 못했다. 그 사이 스쳐간 남자들은 많은데 그 때마다 할머니 걱정 덜으시게 조잘조잘 얘기해드렸으면 좋았을까 싶다. 할머니는 어떤 손주손녀의 결혼식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근데, 몇 년 더 사셨어도 큰 손녀 결혼은 못 보셨을 것 같다. 큰 손녀는 아무래도 기가 너무 센 것이다. 고추를 엄마 뱃속에 두고온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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