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한, 그 첫번째

할머니의 학구열

2022.07.22 | 조회 174 |
0
|

무던이의 썩 무던하지 않은 하루

할머니를 추억하며 이런저런 생각 정리

할머니는 위로는 오빠 하나, 아래로 남동생 둘, 여동생 둘이 있었다. 이 많은 형제 자매들은 할머니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적 이었다. 할머니의 아버지는 할머니가 첫 딸이란 이유로 학업을 포기하고 동생들을 돌보게 시켰다. 나중에 동생들이 어느정도 자란 뒤에는 학교에 가도 된다고 허락했지만 본인보다 훨씬 어린 동생뻘 아이들과 한 학급에 있기 싫었던 할머니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학교에 가지 않았다. 이는 할머니의 평생 한이 되었다.

할머니는 몸이 불편해지기 전까지 정말 열정적으로 여기저기 다니며 새로운 것들을 배우셨다. 버스를 몇번이나 갈아타고 가서 서예를 배우고 복지관에서 일어와 영어도 배웠다. 은행에 다니는 둘째 사위가 얻어다 준 노트에 빼곡이 신문에 나오는 "오늘의 영어 회화"를 배껴 적었다. 그 노트가 열 권이 됐을 때 내 방에 자랑스럽게 들고와서 자랑하셨다.

"이거 봐라, 내가 이렇게 열심히 했다"

"이거 한 글자도 안 틀리고 다 쓰지않으면 난 오늘 밥 먹을 자격이 없다"하면서 맥아더 장군의 "자녀를 위한 기도"를 서예 작품으로 완성하셨다.

아무리 생각해도 박사는 내가 아니라 할머니가 했어야하는 것 같다. 가방 끈 긴 자식들, 손주손녀들이 할머니의 한을 좀 풀어드렸길.

종종 이것을 어떻게 발음하냐고 손녀를 붙잡고 영어발음을 물어봤다. 고추 달고 나온 손자가 더 좋았지만 손자놈은 무뚝뚝해서 무던한 손녀를 찾았다. F나 th, z 같은 발음들은 어렸을 때부터 영어를 배우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어렵다는걸 새삼 느꼈다. 영어 발음을 한글로 써달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하면 영어 발음을 배우기는 더 어려워졌다. Four를 포라고 기억하는 것 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아이고~어떻게 그렇게 꼬부랑 글씨를 예쁘게도 쓴다" 하면서 내가 학년이 올라가면서 쓰고 버린 노트들을 만지작 만지작 하면서 칭찬했다. 

동생과 내가 서울로 대학을 가게 되면서 집을 나와 살게 되자 아빠 엄마는 왔다갔다 하며 정원을 가꾸던 시골집으로 아예 이사를 갔다. 아파트 집도 그대로 두고 할머니 거기서 계속 사시면서 다니던 복지관, 서예도 다니시고 친구분들도 만나시라고 했지만 기어코 아들 내외를 따라 같이 갔다. 같이 산다고 별로 대화도 안하는데 뭐 좋다고 재밌는 도시생활 버리고 심심한 집에 따라갔는지 아직도 나는 그 결정이 아쉽다. 그 즈음 할머니 베스트 프렌드이자 첫번 째 여동생이었던 나의 이모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부터 할머니는 빠르게 늙어갔다. 손이 떨려서 서예를 그만두고 눈이 침침해서 영어공부 일어공부도 시들해졌다. 

할머니는 35년생 답지 않게 스마트폰도 쓸 줄 알았는데, 그건 5할은 차근차근 잘 가르쳐드린 내 덕이고 나머지 5할은 신문물을 배우려는 할머니의 열정덕이다. 종이에 휴대폰을 켜는 것부터 하나하나 순서대로 그림과 방법을 써 드렸더니 곧잘 하셨다. 문제는 중간에 실수로 다른걸 눌러서 돌발 상황이 생기면 응용능력이나 대처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경우의 수를 다 써드리자니 스마트폰은 너무 스마트해서 한계가 있었다. 그저 돌발 상황이 생기면 홈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미국에 오면서 내 소식 쉽게 보시라고 내 이메일 주소로 페이스북 계정을 만들어드리고 폰이 앱을 깔아드리고 왔다. 처음엔 "맨 고양이 사진만 올라오네", "오늘은 바다에 갔네, 예쁘다." 하며 잘 보시더니 페이스북은 아무래도 카톡에 비해 복잡했던 모양이다. 웬 이상한 사람들 친구추가를 다 받아주시거나 실수로 팔로우를 눌러버리셨는지 이메일로 잔뜩 이상한 알림이 떠서 가끔 할머니 계정으로 들어가 정리를 해 드렸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금도 계속 할머니의 실수로 눌러진 페북 친구가 새 게시물을 올렸다는 알림이 온다. 내 마지막 카톡은 "할머니 수술했다며 괜찮아요?"인데 할머니 답장은 안오고 이상한 페북 알림만 온다.

저세상에도 스마트폰이 있을까. 드라마 도깨비에선 저승사자랑 도깨비가 스마트폰을 배우던데. 요즘 시대가 어느땐데 저세상도 발 맞추어 변화할 필요가 있다. 할머니 계신 거기에도 무던한 젊은 사람 붙잡고 찬찬히 물어서 손녀 소식 접하시길.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무던이의 썩 무던하지 않은 하루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 2024 무던이의 썩 무던하지 않은 하루

할머니를 추억하며 이런저런 생각 정리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 서초구 강남대로53길 8, 8층 11-7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070-8027-28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