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애들은 <무한도전>이나 <1박2일>도 모른다지만 그 훨씬 전에 <가족오락관>이란 예능쇼가 있었다. <전국노래자랑>만큼은 아니어도 꽤나 롱런하고 인기 많았던 퀴즈쇼였는데, 보통 남자팀, 여자팀으로 나뉘어서 게임을 했다. 지금 예능에서 <고요속의 외침>이라고 헤드셋을 끼고 크게 음악을 튼 상태에서 단어를 설명하고 맞추거나 다음 사람으로 전달 전달 하는 게임의 원조가 바로 <가족오락관>이다. 우리 가족은 이 <가족오락관>의 애청자였다. 허참 아저씨는 얼마나 진행을 맛깔나게 하는지, 유재석 아저씨나 강호동 아저씨도 그 연륜을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예능 게임에서는 이기고 지고가 중요하지 않다. 허참 아저씨는 노련하게 어떤 사람한테는 시간을 좀 더 주거나 실수도 눈감아주고, 어떤 사람한테는 약오르게 초를 빨리 세면서 게임을 쥐고 흔들었다. 할머니의 지독한 고추 사랑은 여기서도 발현되어서는, 여자팀이 이기면 화가 나서 자기 전까지 분통해 했다. 할머니도 여자면서 왜 그렇게 남녀를 차별하냐고 볼멘소리를 하면 할머니는 "그래도 남자가 이겨야지" 했다. 허참 아저씨는 주로 여자팀에 유리하게 룰을 바꿔댔기 때문에, 할머니는 결국엔 <가족오락관>을 안 보는 것으로 혼자만의 보이콧을 하기에 이른다. 허참 아저씨가 "몇대~몇?" 하기 전에 TV를 얼른 꺼버리곤 했다.
이 정도로 여자의 위치를 남자의 한참 아래에 뒀던 할머니가 작년에 내가 한국에 갔을 때, "나는 남녀 차별을 한 적이 없고 똑같이 좋다", "니가 누나니까 양보하라고 했겠지 설마하니 여자라고 그랬겠냐"며 소름끼치게 뻔뻔하고도 새로운 이론을 제시 했다. 그 때 할머니가 정신이 온전하지가 않다, 곧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야했는데. 그때는 신체적으로 큰 문제가 없을때라서 나는 할머니가 다 기억하면서 변명하는거라고 생각되어 짜증이 잔뜩 났다. 연무대 이모 할머니도 "내 딸들은 살찐 적이 없다"고 기억 조작을 하시더니 얼마 안 가 돌아가셨었다. 본인의 기억을 아름답게 조작하는 것이 죽음의 징조인가.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 것은 이해하지만 이 '역사왜곡'에 반박해야하는 나는, 순식간에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된 것 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잔인하다. 양쪽 할머니 할아버지 모두 따지자면 아들의 아들>>>>딸의 아들>아들의 딸>>>>딸의 딸 순으로 우선순위를 매겼고, 같이 산 세월이 있어서 그런지 친근감은 아들의 아들>>>>아들의 딸>딸의 아들>>>>딸의 딸 순으로 중간 순위만 바꿔서 느끼셨던 것 같다. 나는 20년을 친할머니와, 대학 3년을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살았는데 그동안 늘 말 그대로 찬밥신세였다. 그래놓고 80세 쯤 넘어가시니 그렇게 무던이 어딨냐고, 언제 오냐고 찾아대시는 것이다. 정신이 나름 온전하실 때는 나를 고모 이름으로, 엄마 이름으로 가끔 잘 못 부르시더니, 흐려가는 정신에는 왜 내 이름만 또렷이 남는 건지. 이제는 젊은 여자만 보면 "무던이냐?" 하신단다. 내가 할머니 할아버지 사랑과 관심을 갈구할 때는 내 손에 든 것마저 빼앗아서 동생을 주시더니 이젠 나도 바쁘고 나만의 삶이 있는데 이제서야 손녀를 애타게 찾으신다. 잔인하고 이기적이다. 나를 평생 차별한건 할머니, 할아버지면서 그걸 미워한 나를 가해자로 만든다. 아주 미워 죽겠다. 미워서 가슴이 아프다.
연무대 이모할머니는 우리 할머니랑 매일 싸우면서도 자주 놀러오셔서 서로 의지하면서 살았다. 연무대 할머니는 딸 셋에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이 집도 만만찮게 아들 하나만 보고 사는 집이라 딸들이 뿔이 많이 났다. 그런데 우리 할머니와 연무대 할머니의 차이점이 있다면, 우리 할머니는 TV에 나오는 생판 남인 여자들도 미워하는 반면 연무대 할머니는 당신 자식이 아닌 아이들의 성별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는 점이다. 연무대 할머니는 나를 예뻐했다. 연무대 할머니는 우리 할머니에 비해 체격도 좋으시고 털털하신 편이었다. 그래서 나를 뭘 섬세하게 챙겨준 것 까진 아니지만 연무대 할머니가 나를 아끼는건 그냥 표현하지 않아도 느낄 수가 있었다. 학부 마지막 학기에 나는 졸업과 미국 대학원 진학 준비를 병행 하느라 서울에서 매우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그래서 연무대 할머니가 편찮다는 소식을 듣고도 못 뵈러가고 있던 와중에 하루 날 잡고 큰 고모네랑 같이 내려간 것이다. 의식 없는 할머니 손을 잡고 인사를 했는데 내 목소리를 들으셨는지, 나 오는 걸 기다리셨다 가시는 것 처럼, 그렇게 손 잡고 1시간 뒤 서울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왜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말년에 무던이를 무던히도 찾으시나요. 나는 비자 문제도 문제지만, 우리 할머니도 나를 기다렸다가 보자마자 돌아가실까봐 무서워서 일부러 한국에 가지 않았다. 최애 손녀 12월에 가니까 그때까지 기다리실 거라고 믿었다. 할머니는 내 생각보다 독하지 못한 사람이었나보다. 아니면 하도 손녀가 안 오니까 아픈 몸은 버리고 정신만 미국 땅 날아오셔서 보고 가셨나. 꿈에서 할머니가 나와서 인사를 했는데, 그 날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막내 이모할머니와 작은 고모, 작은 고모의 딸. 이렇게 세 막내 여자들은할머니의 사랑을 가장 적게 받은 대표 주자들이다. 엄마는 할머니가 딸들이 선물해 드리는건 잘 쓰시면서 며느리가 사드리는 건 취향 아니라고 쓰지도 않으신다고 서운해 했지만, 실제로 할머니는 고모들보다 며느리인 우리 엄마를 좋아했던 것 같다. 딸들 칭찬은 한 적이 없는데, 며느리 칭찬은 자주 했다. 나한테도 "너네 엄마는 어쩜 저리 꼼꼼하고 똑부러질까. 너도 엄마 닮아서 이런걸 잘하나보다, 잉" 했다. 서울에 있는 병원에 검사 받으러 가시고 치과에서 치료 받으시고 하면서 두 고모네에서 잠깐잠깐 머무실 때에도 집에 가고싶다, 집에 가고싶다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집에 뭐 꿀 발라놨냐하면 그것도 아니다. 썩 살갑지 않은 아들과 며느리 밖에 없고 그마저도 하루 종일 아들, 며느리 일하는 동안엔 예쁘지도 않아하는 개 한마리와 혼자 지내야하는 집이다. 닭은 알을 낳아주니 개보다는 예뻐했다. 그렇게 아들, 며느리 좀 쉬게 딸 네서 좀 지내고 가시라고 해도 답답하다, 심심하다, 집에 가야겠다, 고집을 부리셨단다. 고모네 집에서도 무를 사러가자, 털실을 사러가자, 나를 데려가야 잘본다, 하고는 모셔가면 시장 사람들이랑 실랑이를 하고 집에서도 미운 소리만 해대니 자기 엄마지만 고모도 질려버렸다. "나도 이런데 너네 엄마는 딸도 아닌데 어떻게 모시고 사냐, 너네 엄마 진짜 대단하다."고 고모가 그랬다. 치과 치료가 끝나는 대로 우리 집에 내려 드리고는 할머니가 "저기 닭좀 구경하고가~" 하시는데 도망치듯이 서울로 돌아간 것이 아마 고모가 할머니를 입원 전 마지막으로 본 모습일 것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별로 이쁨 받지도 못한 막내 딸이 장례식장에서 제일 서럽게 울었다. 때린 사람은 기억 못하고 맞은 사람만 기억한다고 그랬던가. 막내딸을 평생 구박한 할머니는 눈을 감아 속이 편히 발뻗고 계실텐데 산 사람들 마음이 미안하고 아리다. 할머니가 손'자'들 입으라고 뜬 스웨터. 나는 몰랐는데 손녀들 용으로는 목도리를 떴나보다. 똑같이 스웨터를 뜨거나 아예 뜨지 말 것이지 목도리는 또 뭐람? 이런 디테일에 사람 빈정이 상한다는걸 돌아가실때까지 몰랐던 모양이다. 작은 고모의 딸은 제일 바닥 순위인 '딸의 딸'인데다가 늦둥이라, 할머니의 관심과 사랑을 한... 뒷마당에서 키우는 닭 정도는 받았을까? 정말 많이 못받았다. 근데 그 사촌동생 혼자서 이 여름에 그 목도리를 장례식 내내 두르고 있었단다.
할머니는 솔직히 준 사랑보다 많은 사랑 받고 떠나셨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