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사이도 아니야 '프롤로그'

연애와 탈연애 사이 '본격 리얼리티 소설' 시리즈

2022.01.01 | 조회 4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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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리얼리티소설 연애편 ㅣ 아무 사이도 아니야

연애와 탈연애 사이, 결혼과 비혼 사이에 놓인 R의 연애담을 그린 연작소설

아무 사이도 아니야

 

마지막 연애는 언제인가요?

 

  화면에 잡힌 R의 얼굴이 흐릿해졌다가 점점 더 선명해졌다. 그녀는 귀뒤로 단발머리를 넘기며 잠시 고심하는 표정을 했다. 기울어진 고개와 위로 살짝 올려 뜬 눈 때문에 쌍꺼풀 선이 옅게 생겼다. 질문지를 앞에 쥐고 있는 작가와 눈이 마주치자 R은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려는, 곧 대답하겠다는 긍정의 의미가 담긴 미소였다.

 

“편하게 얘기해주세요. 시간 충분하니까.”

“예.”

 

R이 입매에 힘을 주자 왼쪽 보조개 부분이 살짝 패였다. 카메라 너머로만 R을 지켜보던 H가 옆으로 몸을 뺐다. 프레임 밖으로 보이는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허벅지를 손으로 두어 번 가볍게 치고 있었다. 곧 고개를 끄덕인 R이 입을 떼었고 H는 2번 카메라로 다가갔다. 그녀는 왼쪽 얼굴이 화면상 잘 받는다는 건 일찍이 파악했다. 그는 카메라 줌을 더 당겨보라고 지시했다. 그 말을 들은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카메라를 만졌다.

 

“작년에 헤어졌어요. 이 방송이 1일에 나간다고 하셨죠?”

“네.”

“그때가 11월이니까.”

“2개월인가요?”

“2개월 밖에 안 됐네요. 아직은. 시간이 참 안 가네요.”

 

H는 걸음을 옮겨 R의 시선이 닿는 곳에 섰다. 처음이었다. 그녀를 가까이서 보는 건. 멀리를 응시했다가 다시 가까이를 보는 R의 눈매 끝이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환한 조명 아래, 얼굴이 더 하얘보이는 아이보리색 니트를 입은 그녀가 떨고 있었다. 어딘가 겁에 질려 아까보다 창백해보였다. 

 

“끊었다 갈까요?”

 

굳이 끊고 가자면 지금이 낫다. H가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R의 시선이 그녀의 시선 끝에 서있는 그에게로 닿았다.  지금까지 1시간 넘게 촬영하면서 곤란한 질문에도 막힘없이 잘 대답한다 싶었다. 보통 한 번 정도는 화장실을 가거나 물을 더 달라고 하기 마련인데 그녀는 아니었다. 어느새 다들 이야기에 빠져들어 R의 다음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였다.

 

“끊고 가죠. 다들 한 번 숨 한 번 돌려야 하니까.”  

 

H의 말에 작가가 먼저 질문지를 내려놓았다. 세팅된 장비를 잡고 있던 사람들은 손을 떼고 허리를 피거나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몇몇 무리들은 담배를 태우러 나가는 모양이었다. 프로의식이 투철한 작가는 R에게 너무너무 잘하고 있다는 칭찬을 건네고 일어났다. R은 주변에 사람들이 하나 둘씩 떠나 다들 각자의 시간을 갖는데도 움직일 생각이 없어보였다. 마치 촬영장만이 자신이 있어야 하는 곳이라도 되는 것처럼. 계속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H가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커피라도 마십시다.”

“네?”

“생각 좀 덜 나게.”

 

R은 자신의 연애 속에 남긴 과오를 반추하는 습관이 있었다. 본인이 아프고 힘들어도 그것을꼭 안고 가야 하는 이상한 버릇이 있었다. 지난 연애들은 늘 그녀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주었다. R은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보통 사람보다 심적으로 약한 편에 속했다. 그런데 중저음의 H가 ‘생각 좀 덜 나게’라고 내뱉은 그 순간은 달랐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재생되던 영상 하나가 힘없이 툭 끊기며 옆으로 밀려났다. 처음으로, 자신의 앞에 서있는 낯선 남자로, 그전의 과오가 잠깐이나마 밀려났다. 그건 그녀에게 앞으로도 오래도록 잊지 못할 한 순간이 왔다는 뜻이었다. 

 

“저 바닐라 라떼 좋아해요.”

“그래요? 저는 아이스로 마실 건데.”

“저도 얼죽아라서.”

“바닐라 라떼 아이스 두 잔이요.”

 

어느새 그녀는 H의 말을 따라 스튜디오 근처에 있는 테이크아웃 전문점 앞에 서있었다. 조곤조곤 말하는 그의 대화를 따라잡은 건 ‘바닐라 라떼’라는 단어가 들리고나서부터였다. 주문을 마친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금방 나와요”라고 말했다. 낯설지만 따스한 눈길이었다. 

 

“다들 손이 빠르거든요.”

 

그랬다. 그녀가 이 영화에 출연을 결심한 건 순전히 친구의 부탁 때문이었다. 분명히 그랬다. 자신의 아픈 기록을 어딘가에 남겨지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출연 대상자로 적합했다는 걸 알아서. 더 이상 연애도 결혼도 안 할 거는 아는데. 살면서 영화에 출연해보는 거도 나쁘지 않을까란 설득에 넘어가서였다. 

 

“그래보여요.”

“오늘처럼 매니저가 있는 날은 열 잔도 금방 나와요.”

 

아니어야만 했다. 지금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 때문이면 안 되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약간은 옅은 갈색의 눈동자. 그 사실을 발견해버린 순간부터 그는 이미 다른 존재였다. 그렇게 인식되는 걸 그녀는 필사적으로 부인해야만 했다.

 

잘 읽어보셨나요? 이번 시리즈는 출근길에 가볍게 꺼내 읽을 수 있도록 '세 쪽 소설'(약 30매)로 2주에 한 번 찾아뵙고자 합니다.

해당 소설은 기획적으로 재미있는, 일종의 연애사전 같은 느낌으로 다가가고자 하며, 다양한 연애 이야기를 담고자 합니다. 책은 아직 출간 계획이 없으며, 저의 꾸준한 소설쓰기를 위해 연재로 전환하였습니다.

혹여라도 추후 책으로 발행 시 기존의 구독자분들께는 혜택을 제공할 예정입니다(미공개분 따로 제공 혹은 책 구입 시 할인 등)

* 구독 시에는 세 쪽 소설이 2주에 한 번 찾아갑니다.(월 7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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