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직도 듣는다 유로파파 - 유로비전 2024

어쩐지 자존심이 상하지만 그런 날이 오고야 말았다. 스웨덴에 두고 온 삶을 그리워하는 중이다.

뭐가 그렇게 좋았냐 물어보는 지인들이 있어서 생각해 봤는데, 딱히 어떤 점을 그리워하기 보단 그냥 그 곳에서 내가 일궜던 터전이 그리운 것 같다. 두고 온 친구들, 우울할 때 혼자 가서 한 잔 때리기 좋았던 펍과 바, 자주 가던 영화관, 친구들의 고양이와 강아지들, 자주 사 마셨던 음료수, 드디어 익숙해진 hej då와 tack så mycket, 휴대폰의 SV 키보드, 뭐 별일 없이도 가끔 어디선가 들려오는 ABBA, 끝내 핀만 찍어두고 가보지 않은 레스토랑들.. 그런 것들의 총합이다.

그리고 유로비전 2024가 끝난 지 한 달이 지났다. 유로비전도 그 ‘두고 온 삶’의 일부다. 2022년에는 내가 좋아했던 내 방 침대 위에서 트위터를 새로고침 하면서 봤고, 2023년에는 친구들과 모여서 유로비전 빙고*를 하면서 봤다. (*뷰잉 파티를 하면서 할 수 있는 빙고인데, 25칸을 유로비전 클리셰로 채우고 TV에 그 장면이 나오면 하나씩 지우는 빙고다. 예를 들면 '비 오는 무대', 'Thank you Europe! 함', '노래 중에 의상 체인지' 등등이 적혀있다)

솔직히 나 자신을 유로비전 팬이라고 부를 정도의 사랑은 아직 없지만 유로비전이 특별한 의미로 기억되는 이유는 유로비전이 내가 스톡홀름에 살면서 배운 ‘유럽’의 정수처럼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뭐 거창한 의미부여일 수도 있지만.. 내가 그렇다면 그렇(?).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이상이하 유로비전)는 유럽 방송 연합(EBU)이 주관하여 연 1회 열리는 노래 경연대회다. 특이한 점은 ‘국가 대항‘이라는 것이고, ‘생중계’ 된다는 점이다(2023년 기준으로 최종 결선 시청자가 1억 6천만 명..). EBU에 가입된 ‘방송사’ 기준으로 참가 여부가 정해지기 때문에 이름은 유로비전이지만 호주도 참가한다. 스웨덴은 국영 방송 svt가 주관해서 ‘멜로디페스티발렌Melodifestivalen’ 이라는 이름의 자체 콘테스트를 통해 공개적으로 후보를 선발하는 반면, 영국은 BBC가 모종의 내부 절차를 통해 후보를 선발한다. 솔직히 국프의 나라 출신에게.. 여기까지 알았을 때 이미 외면하기 힘든 도파민의 향기가 느껴지지 않는지..!

이렇게 선발된 각국의 대표들은 반반씩 나눠 세미파이널을 진행하고, 각 세미파이널에서 최고점을 득점한 10개 국, 그리고 세미파이널 없이 바로 결승 진출하는 Big 5(*유로비전에 돈 많이 내는 순이다) — 프랑스, 독일, 영국, 이태리, 스페인 — 와 당해 호스트 국가까지 총 26개국이 결승에서 겨루게 된다. 우승국은 다음 해 유로비전을 개최하게 된다. 우승국은 어떻게 정해지냐. 각국의 ‘Jury’가 정한 점수와 일반인 유료 투표(전화, 문자, 앱)를 합산하는데 이 Jury 점수는 각국이 자국을 제외한 10개 국가에 1-8, 10, 그리고 12점을 주는 방식이다!

2022년에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불법으로 침공하면서 러시아와 벨라루스 방송사들이 EBU에서 퇴출되는 통에 두 나라가 참가 자격을 잃었고, 올해 유로비전은 이스라엘의 참가 여부를 두고 안팎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다. 심지어 결선 하루 전 진행된 프레스 컨퍼런스에서 이스라엘의 참가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표했던(견해를 표할 것까지도 없다 티를 좀 낸 것일 뿐) 네덜란드의 Joost(위 Europapa의 주인공)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실격 처리 되면서, 그리고 복수의 참가자들이 동의 없는 촬영 등 이스라엘 참가자 크루가 저지른 행동들에 대해 공식적인 항의를 제기했고, 역대 가장 많은 ‘emergency meetings’을 거쳐, 우승자인 스위스의 Nemo가 수상 후 공연에서 실수로 트로피를 까부수면서… 아름다운(?) 피날레를 맞았다.

유럽은 하나인데 하나는 아니다

어쨌든 사람이 살다보면 일반화를 하게 된다(?). 스톡홀름에 살면서 나는 스톡홀름 사람을, 그것도 ‘내가 만난 스톡홀름 사람’을 기준으로 스웨덴 사람을 일반화하고, 그 다음엔 스칸디를, 노르딕을, 그 다음엔 유러피안을 일반화했다. EU로 묶여 있기도 하고, 긴 세월 다양한 국적의 선조들의 영향을 받는 게 자연스러운 ‘유럽인’들을 생각하면, 유럽 사람들 다 비슷하지..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또 자세히 뜯어보면 하나하나 다르다. 북유럽놈들(…) 다 차갑고 인사도 안 하고 웃지도 않는다고 했지만 노르웨이 베르겐의 대중교통에서 눈이 마주친 사람들은 모두 나에게 활짝 웃어줬다. (나의 스웨덴인 친구들은 그건 그들이 오일 부자들이어서 그렇다고 했다..👀) 스페인 사람들은 저녁을 9시에 먹지만 스웨덴 사람들은 5시에 대충 먹고 운동하러 간다. 유로비전에는 각자의 차이와 즐거움과 아픔을 나누고, 사랑하고 수용하고 지지하는 노력이 있다.

이기는 건 중요하지만 중요하지 않다

누군가 처음으로 나에게 유로비전의 컨셉에 대해서 설명해줬을 때 나의 첫번째 반응은 ’아니 그럼 왜 안 유명한 가수가 나와?‘ 였다. 콘테스트라며. 그럼 이겨야지. 텔레보팅이 들어간다며. 그럼 유명한 사람이 나와야지. 스웨덴은 자라 라슨 나와주야지. 그럼 영국은 아델 나오나?

정말 이기는 것‘만’ 중요했다면.. 뭐 저런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본 유로비전은 그런 의미에서는 그냥 마냥 이기는 게 중요한 대회는 아닌 것으로 보였다. 오히려 유로비전을 통해서 국제적인 유명세를 얻는 경우가 더 많다. ABBA의 커리어에서 유로비전을 빼놓을 수 없다고 하고, 가깝게는 2021년 유로비전에서 우승한 밴드 Måneskin도 그렇다.

하지만+그래도+이왕이면 이기면 좋으니까(?). 아티스트들은 어떤 언어로 노래를 부를지 - 영어로 부를지, 자국어로 부를지 고민을 많이 한다고 한다. 영어로 부르는 게 어쨌든 전달력은 커질텐데, 그래서 영어에 비교적 더 친숙한 북유럽 국가들은 영어 노래로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하지만 올해 화제성 1위 'Europapa'는 네덜란드어, 2023년에 2위를 했던 'Cha Cha Cha'는 핀란드어로 불렸다. 이것도 때마다 트렌드가 있다는데, 그 트렌드는 사회를 반영하기도 한다.

역시 스토리텔링도 중요하다 

올해 화제성 1위 Joost의 Europapa는 중독성 넘치는 멜로디도 한 몫 하고, 밈 같기도 하고 농담 같기도 한 비주얼이 먼저 눈과 귀를 혹하게 하지만 사실 이 노래는 Joost의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것 때문에 Joost가 실격 처리 되었을 때 더 많은 분노가 일었다고 (나는)생각한다.

작년에 스웨덴을 대표한 Loreen은 2013년에 이후 10년 만에 스웨덴을 '다시' 대표했고 두 번의 참가에서 모두 우승을 이끌어내면서 유로비전에서 2회 우승한 최초의 여성 아티스트로 기록되었다. 올해 스위스에 우승을 안긴 Nemo는 유로비전에서 우승한 최초의 논바이너리 아티스트로 기록된다. 이런 외적인 요소가 텔레보팅에 영향을 안 줄 수 없다..!

그래도 일단 노래와 무대가 중요하다

말 그대로 어쨌든 음악 경연대회이기 때문에.. 노래와 당일 무대 컨디션도 매우 중요하다. 작년에는 이미 초반부터 핀란드의 Käärijä와 스웨덴의 Loreen의 각축이 예상되었는데, 내 친구들에 따르면 Loreen이 자꾸 무대 연출에서 실수가 나오거나, 중요할 때 노래를 못 한다, 한 마디로 자꾸 무대를 저는.. 데 이것 때문에 최종 결선에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얘기를 했었다. 결선에서는 문제 없이 멋진 무대를 보여줬지만!

올해 Nemo는 회전하는 디스크 형태의 무대 장치 위에서 눕고 앉고 뛰어다니면서도 고음을 소화하는 미친 퍼포먼스를 보여주면서 무대를 찢어버렸는데, 세미파이널에서 처음 공개된 후 엄청난 반응이 있었고 이후 우승으로 이어졌다. 반면 핀란드의 Windows95man은 안개 효과가 과해서 처음 몇 초간 얼굴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거나 하는 연출 상의 문제들을 겪었는데 이런 일은 생각보다 흔하게 일어난다. 뭔가 실험적이고 혁신적인 무대 연출이 들어가는 아티스트 일수록 그런 위험을 더 부담하게 되기도 한다.

유로비전은 올해 다양한 이슈에 직면하면서 유로비전 팬들에게 불미스러운 뒷맛을 많이 남긴 모양이다. 내가 배운 유럽 살이의 최고 장점은 ‘다양성’이었다. 물론 사람 사는 곳이니까 무지한 사람도 악의로 똘똘 뭉친 사람도 있지만, 노력이나마 생각으로나마 다양한 삶의 양식을 포용하고, 약자를 보호하고, 지지하는 사람과 생각의 목소리가 더 크거나, 최소한 들리는 사회. 올해의 유로비전은 그간 유로비전이 지켜 온 덕목을 느끼기에 어려운 사건들이 있었고, 그건 어쩌면 실제 사회의 반영이기도 할 것이다. 과연 내년 유로비전 때는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보게 될 지—를 생각하며. 

마지막으로 이 레터를 쓰게 된 궁극의 이유 - 그냥본다 선정 유로비전 무대 Top 3를 남겨본다. 

추신.

이 멜로디가 익숙하신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이 노래를 성당에서 '주님의 기도'로 가사를 만든 버전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 노래도 1973년 유로비전 송이었다. 그 다음 해 1974년 유로비전 우승곡은 우리도 잘 아는 ABBA의 '워털루!'다. 

인스타그램 @__ofcl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