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니 무서운 영화 도대체 왜 보냐고 아 그래서 보는구나

예전에 일하던 직장에서 '일 때문에' 영화 <미드소마>를 봐야할 일이 있었다. 

정확히는 글을 쓰기 위해 이 영화를 봐야 하는 사람이 있었고, 내 역할은 그 글을 편집하고 업로드하는 것이어서 나까지 필수로 봐야 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안 보고 글만 편집하면 다 스포일러 일텐데?, 그럼 이 사람 혼자 보란 말임?, 재밌을텐데? 등등의 이유로 끝까지 끝까지 고민을 하다가... 결국 안 봤다. 정 그렇게 무서우면 아침 상영으로 보자고 했는데도 안 봤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 년 뒤 나는 스웨덴에 가기 전 공부삼아(?) 결국 이 영화를 보게 된다..)

어지간해서 장르를 딱히 가리지는 않지만... 이라고 쓰고 싶지만 나는 역시 장르를 편식하는 편이다.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장르 중에서도 호러는 원탑. 어릴 적의 내가 제일 싫어하던 단어는 아마 '담력 훈련'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어두우면 혼자 걷기 싫고 길에 사람이 하나도 없으면 무섭고 사람이 있어도 무섭고.. 놀랄 때는 어디 내놔도 모자람 없게 화들짝 놀란다. 겁쟁이임.

그 시절엔 '담력 훈련' 말고 '납량 특집'이라는 것도 있었다. 어째 지금은 사라진 말처럼 되었지만, 그 때는 여름만 되면 꾸준히 '납량 특집' 드라마가 나왔고, 인기 예능 프로그램들도 '납량 특집' 편을 편성했다. 어릴 적부터 남다른 쫄보였던 나로서는 참으로 팍팍한 시기였다. <전설의 고향>은.. 그 쪽으로 고개도 안 돌렸다. <토요 미스테리 극장>과 <이야기 속으로>는 화면 우상단에 로고만 나와도 채널을 돌렸다. 그 중에서도 내 장기기억까지 침투해 자리 잡은 것은 역시 드라마 <M>의 사운드트랙.. 모르는 게 참 많은 그 노래였다.

다행히 쫄보임을 부끄러워 하는 대신, 무서운 걸 어쩌라고요 하면서 어엿한 어른 쫄보로 성장한 나는 <기담>을 끝으로 영화관에서 호러 영화 보기를 그만 두었다. 그때의 나는 호러 장르를 이렇게 이해했다 - 무서운 것을 보면서 스스로를 깜짝 깜짝 놀래키는 재미(= 나는 평생 이해할 수 없는)를 느끼기 위한 장르. 그러니 이것은 일종의 변태적인 재미다.. 라고 정의를 내리고 나니 더욱 편안한 마음으로 호러 장르를 피해다닐 수 있었다. 나는.. 변태가 아니니까.

그 이후 위에서 언급한 회사를 다니면서 몇 번의 고난이 더 닥쳤지만 나는 미꾸라지 마냥 피해 다녔고, 호러 '소설'은 어쩐지 호러 '영화' 보다는 나아서(?) 일하는 데 큰 무리는 없었다. 그러다 올 초에 이 영화의 시놉시스를 읽게 되었다. 

아...

작년에도 이렇게 '이야기'로 나를 꼬드긴 호러 영화가 있었다.

스톡홀름 영화제는 매진이 그렇게 빨리 되는 편은 아닌데, <잠>은 꽤 빨리 매진된 영화 중 하나였다. (사실 상영관이 좀 작긴 했다 그러나 그 똑같은 관이어도 매진 안 된 영화 많음) 사전에 철저히 점프 스케어가 있는지, 무서운 장면은 어떤 무서움인지 조사했고, 다행히 한국에서 개봉된 후 6개월이나 지난 시점이라 정보는 충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서울 수 있으니 친구 2명을 양 옆에 끼고 영화를 봤고.. 유유상종은 역시 사이언스였는지 영화 초반에 우리 셋만 꺄아아악 으악을 몇 번 했다. 심지어 내 친구는 '야 점프 스케어 읍드므..!' 하고 속삭였다. 솔직히 그건 점프 ㅅ 정도 였는데도..

아무튼 그래서, 이야기는 너무나도 구미가 당기지만 어쩐지 또 속을까 두려웠던 나는 <악마와의 토크쇼> 보는 것을 미루고 미루고 또 미뤘다. 그러다 거의 영화관에서 내려가기 직전에, 이 영화의 주인공 역을 연기한 배우 데이비드 다스트말치안의 GV가 있는, 오전 11시 50분! 상영을 마주치게 된다. 그래.. 그래도 햇빛 쨍쨍하게 보다가 들어가고 나와서 또 햇빛 쨍쨍하면 괜찮지 않을까(?) 하면서 예매를 했다. 

배우가 내한한 것도 아닌데 왜 굳이 화상으로까지 배우와 GV를 잡았을까, 했던 나의 의문은 GV 시작과 동시에 날아갔다. 뭔가 단단히 컨셉을 잡으신 듯 올블랙을 입어 놓고 열정에 찬 말투로 호러 장르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이 배우는, 단순히 이 영화에 배역을 맡아 연기한 배우를 넘어 이 영화에 '크리에이터'로 참여한 거구나, 그래서 이렇게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대표해서 할 수 있는 거구나를 깨달았다. 또 이 영화를 넘어 호러 장르, 그리고 영화 제작에 대해 크리에이터로서 언급한 여성 창작자들의 중요성, 역할, 그리고 한국 공포 영화에 대한 감상 같은 것을 듣고 있자니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의 이 장르에 대해 가진 진정성 마저 느낄 수 있었다.

특히 호러는 결국 '불안'에 대한 이야기라는 설명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악마와의 토크쇼>가 혹시 내가 ㅁㅁ에(스포일러) 최선을 다하지 않은 건 아닌지, 하는 죄책감과 성공하고 싶은 마음에 동반하는 불안을 다뤘다면, <잠> 역시 막상 같은 침대에 매일 매일 눕게 된 사람을 내가 정말로 아는지에 대한 불안함을 이야기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미드소마>의 결말 또한 평생의 불안을 해결하는 궁극의 답에 도달한.. 대니를 보여준 건 아닌지 싶고. 조예은 작가의 호러 장르 이야기를 읽으면서 들었던 감상도, 결국은 인간의 불안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나에게공명이 있었구나 하는 뒤늦은 깨달음도 있었다.

'불안' 쪽으로 역시 할 말이 많은 나로서는 지금까지 호러 장르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던 오해 때문에 많은 좋은 콘텐츠를 놓쳐 버린 것은 아닌지 - 조바심과 '불안감'이 들었다. 그렇다고 당장 또 다른 공포영화를 보지는 않을 거지만. 그래도 무조건 피하진 않고, 열심히 골라 몇 편 쯤은 이제 편하게 볼 수 있지 않을까. 

ps. <악마와의 토크쇼>는 지금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

ps2. 그 날의 아름다웠던 GV는 영화사 '찬란'의 트위터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x.com/challanfilm/status/1817796712767070469

인스타그램 @__ofcl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