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숫자에 강한 공대 남자다. 가격이나 수량, 연도나 날짜 등 숫자로 된 데이터는 한두 번만 봐도 금방 외울 정도다. 그러나 그런 남편이 7년 동안이나 알아내지 못한 숫자가 있으니, 본인 와이프가 체중계에 올라갔을 때 액정에 뜨는 수치다.
나는 그 두 자리 숫자를 철저히 숨겨왔다. 가끔 내가 방심한 틈을 타 남편이 기습 질문을 던져도 절대 속지 않았다. 그토록 헐렁한 나도 이 문제에 대해서 만큼은 매우 꼼꼼했다.
한번은 건강검진 결과지가 집으로 배달된 적이 있었다. 나는 우편함에 꽂힌 그것을 발견하고는 남편이 볼 세라 얼른 갈기갈기 찢어 쓰레기통에 넣어버렸다. 그리고 앞으로는 절대 우편으로 결과가 발송되는 일이 없도록 조치했다.
워낙 먹는 걸 좋아하는 탓에 결혼 이후 내 체중은 완만한 상승 곡선을 그렸다. 출산과 휴직, 복직을 거치면서 곡률은 더 커졌다. 난생 처음 맞닥뜨린 인생의 중대사와 워킹맘 생활에서 온 스트레스를 주로 먹는 행위로 풀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체중계가 만삭 때의 그것과 비슷한 수치를 보여주었을 때, 나는 절망했다. 예전엔 애가 내 뱃속에 있기라도 했지, 지금은 저기 거실에서 신나게 놀고 있는데 몸무게는 왜 똑같냔 말이다.
특단의 대책을 강구해야 했다. 그것은 균형 잡힌 식단과 꾸준한 운동이 아닌, 그리 건강하진 않지만 빠르고 간편하고 효과가 확실한 방법이었다. 다이어트 한약 복용하기다.
그 한약은 하루에 600칼로리만 먹되, 부족한 영양과 체력을 보충해 주는 용도로 제조된 것이다. 600칼로리라니, 사실상 굶어 죽지 않을 만큼만 먹으라는 소리 아닌가? 그 정도까진 못하고 대신 800칼로리 정도로 먹고 있다. 3주만에 5킬로그램이나 빠졌지만 배고픔이 극심하다.
이렇게 해서라도 살을 빼야 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큰 사이즈 옷을 사는 데 돈이 든다. 콜레스테롤 수치도 걱정된다. 요새는 아이들도 엄마가 예뻐야 기가 산다던데, 나중에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식에서 한껏 아름답게 치장하고 온 엄마들과 비교 당할까 겁도 난다. 그리고 자기 관리가 되지 않은 모습을 남편에게 보여주기가 미안하다. 기를 쓰고 몸무게를 숨긴 이유도 그 비밀의 숫자를 알면 남편이 나를 이성으로 보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문득 남편의 생각이 궁금해져, 쓸데없는 질문을 하나 해 보았다.
“여보, 여보는 내가 백 킬로 되는 거랑 사치하는 거랑 뭐가 더 싫어?”
그의 대답은 상상 이상으로 단호박이었다.
“난 그래도 사치가 더 싫어. 차라리 백 킬로가 나아.”
헐. 이 남자의 사치에 대한 트라우마는 대체 어디서 온 건지 궁금하다. 옛 애인이 명품 마니아였기라도 했나?
아무튼, 다행히 남편은 내게 다이어트를 종용하지 않았다. 내가 점점 둥글어져 가는 것을 보면서도 단 한 번도 살을 빼라고 한 적이 없다. 이 사실만으로도 이미 그의 인성은 검증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난 남편을 잘 골랐다.
그러나 그의 배려와는 별개로 남편에게 미안했다. 소개팅 당시의 외모 컨디션을 계속 유지하리라 예상하며 나와 결혼했을 텐데, 지금의 나는 도저히 그때와 같은 여자라고 보기 힘들 지경이기 때문이다. 본의 아니게 사기 결혼을 한 것 같다. 뮤지컬 배우 김소현은 남편 손준호보다 언제나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듦으로써 한 번도 맨 얼굴을 보여준 적이 없다던데. 내게 결여된 부지런함이다. (여보 미안. 그치만 게임은 마음껏 하게 해주잖아.)
예전부터 나는 외모를 가꾸고 치장하는 데 별로 취미가 없었다. 한껏 꾸며서 예뻐진 모습을 싫어하진 않았지만 일상이 바쁘고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엔 그 일이 우선순위에서 한참 밀려나곤 했다. 단적인 예로 이곳 울산엔 교보문고 바로 옆에 의류 매장이 입점해 있는데 서점에 50번 갈 동안 옷 가게에는 1번을 갈까 말까 할 정도였다.
여자로 태어나 평생 가꾸는 일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버거워 남자들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최근엔 외모에 신경쓰는 남자들도 많지만 여전히 그쪽으로는 여자들에게 더 엄한 기준이 적용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운명>이라는 노래에 나오는, 차라리 이럴 땐 남자가 되고 싶어~ 라는 가사처럼 남자로 태어났다면 더 편했을지 종종 궁금해하곤 한다. 내 망상은 여기서 출발했다.
본투비 INFP로서 숨 쉬듯 망상하기가 특기이자 취미인 나는 만약에 ~로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인생을 살아보고 싶을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이 뇌 내 망상 중 세 가지 정도만 공개해 보겠다.
망상 1. 잘생긴 남자로 태어나기
여기서 잘생김이라 함은 적당한 수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훈남도 아닌 존잘이어야 한다. 보이그룹의 비주얼 멤버를 예로 들어보자면, BTS의 진이나, 세븐틴의 민규, 엔시티의 재현 정도면 적절하겠다.
왜냐하면 연애 먹이사슬에서 최상위 포식자는 예쁜 여자가 아니라 잘생긴 남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최상위 포식자가 되어 유유자적한 태도로 살면 된다. 좋아하는 여성을 두고 속앓이할 필요도 없고, 크리스마스 때마다 외로움에 몸부림칠 필요도 없다. 그렇게 매사 여유롭고 느긋한 태도로 삶을 즐기는 것이다.
망상 2. 예쁜 여자로 태어나기
만약 나도 모르게 이번 생에 저지른 어떤 잘못으로 인해 1번을 선택할 수 없다면, 차선책으로 예쁜 여자로 다시 태어나도 좋다. 목표는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청순하고 가녀린 여성이다. 걸그룹으로 치면 트와이스의 미나, 오마이걸의 아린 같은 스타일이 나의 워너비다. 아니면 소녀시대의 태연이나 에스파의 윈터 같은 귀염상도 괜찮다.
그렇게 청순가련하게 태어나서 대부분의 인간관계에서 우위에 서본다. 이번 생에서 해 보지 못한 연애 갑질도 해 보고, 나쁜 여자도 되어 보는 것이다.
이 때 반드시 그 유명한 대사를 날려야 한다.
"고마워. 오빤 너무 좋은 사람이야."
물론 같은 여자들에게는 동경과 질시의 대상이 된다. 후훗, 후후훗, 후후후훗.
망상 3. 끝내주는 실력자로 태어나기
이번 목표는 앞의 두 개와 결이 다르다.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누구도 넘보지 못할 실력과 능력의 소유자로 태어나는 것이다.
분야는 가리지 않는다. 김연아처럼 세계적인 운동선수가 되거나, 메릴 스트립처럼 연기의 신이 되거나, 소위 말하는 전문직에 종사해도 좋다. 어딜 가든지 내 능력으로 돈을 벌 수 있고 사람들의 존경까지 받을 수 있는 그런 실력자가 되고 싶다.
아니면 미치도록 공부에 매진해 봐도 좋겠다. 예전에 마리 퀴리의 평전에서, 냉방도 되지 않는 하숙집에서 밥도 안 먹고 공부만 하다가 쓰러졌다는 일화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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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모든 게 다 망상일 뿐, 현실에는 오늘도 먹어야 할 한약 팩과 넘지 말아야 할 칼로리 한계선이 있을 뿐이다.
니체는 분명 지금의 삶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했다. 그의 영원회귀에 따르면 절대 내 망상대로 환생하지 못할 게 틀림없다. 흑.
잘생긴 남자, 예쁜 여자 다 필요 없고, 제일 되고 싶은 인간 상은 먹는 것에 관심 없는 사람이다. 주위에 그런 사람들 분명히 있다. 한 번도 뭐가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 없고, 조금만 스트레스 받아도 음식을 먹지 못하는 사람들. 부럽다. 내가 가진 모든 탤런트를 다 줄 수 있을 만큼 심각하게 부럽다.
이번 주말에 가족 여행을 가기로 했는데 새로운 장소에서 맞닥뜨릴 맛있는 음식을 참을 수 있을까? 그동안 열심히 해서 빼 놓은 것이 도로아미타불이 되어서는 안 될 터인데 걱정이다. 소식의 신이 있다면, 제발 가호를 내려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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