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66] 🌻 치열하고 싶지 않은 늦여름의 오후에는 이 노래를!

한 주간 잘 지내셨나요? 처서가 지난 뒤 레터를 쓰고 있는 숑🌻입니다. 말 많고 탈 많던 이 여름도 슬금슬금 물러나는 듯 보입니다. 처서라는 절기의 한자 풀이가 담백하게도 '더위를 물리친다'는 뜻인 만큼 이번 주는 밤 산책의 공기가 제법 쌀쌀하기까지 하더라고요. 이렇게 한 주 만에 날씨가 천연덕스럽게 바뀔 수가 있는 건지 한번 놀라고 24절기의 정확성에 두 번 놀라게 됩니다. 매년 이맘쯤 반복되는 현상임에도 늘 처음처럼 의식하는 스스로가 재밌기도 해요. 별안간 제 꿈을 말하자면 모쪼록 평생 이렇게 매사에 새삼스러운 사람이 되는 거랍니다.

문득 느끼는 사실인데, 여름은 왕성한 생명력 탓인지 나머지 계절 중에서도 (좋고 나쁜 쪽 모두) 존재감이 돋보이고 계절이 치러낸 뒤 찾아오는 헛헛함도 큰 것 같아요. 저는 항상 여름을 '네 번째로 좋아하는 계절'이라 꼽아왔는데요. 소스라치게 싫어하는 벌레가 활개를 치는 데다 땀을 줄줄 흘리는 스스로의 모습이 싫다는 이유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여름이어서 더 낭만적인 순간과 긍정적인 편견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려면 좋아하는 것이 많아진다는 건 삶에서 행복할 경우의 수가 늘어나는 셈이겠죠.

그러고 보니 다들 여름 휴가는 잘 다녀오셨나요? 저의 올해 휴가는 해변 대신 초록빛 산과 강의 풍경으로 가득했어요. 요즘 즐겨 듣는 세 곡은 딱 열흘 전쯤 다녀온 제 휴가의 이미지를 필름처럼 비춰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구독자님의 여름은 어떤 음악 위에 겹쳐질지, 어떤 오감의 시간이었을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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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없는집 - 방학을 기다리던 날들

기다리던 휴가를 떠나는 날의 하늘은 금방이라도 온 초목을 축축하게 적실 듯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아무려면 상관 없었다. 오히려 더 좋았다. 나의 휴가 계획은 오로지 숙소 안에 머무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목적지는 강원도 영월. 숙소에만 있을 거면 굳이 그곳까지 왜 가냐고 물을 수 있지만 나로서는 기왕의 장소들과 물리적인 거리감이 간절했다. 연휴가 겹쳐 고속도로가 꽉꽉 막혔지만 도시에서 멀어지는 체감만으로 그저 기꺼웠다.

휴가지에서의 일과라면 숙소에 딸린 작은 수영장에서 물장구 치기, 수박 잘라 먹기, 밀린 책장 넘기기, 프랑스 영화 보다 졸기, 알람 맞추지 않고 낮잠 자기, 아무런 인기척 없는 주변 산책하기 정도였다. 이 글을 쓰는 시점으로부터 열흘 전이지만 제법 굵은 빗줄기가 지나간 뒤여선지 공기는 대체로 쾌청했다. 어렴풋하게나마 여름의 끄트머리에 다다랐다고 느꼈던 것 같다. 일상으로 돌아온 뒤 이 노래를 들으며 자연히 휴가의 조각조각을 떠올렸다.

문없는집은 2019년 데뷔 앨범을 낸 한국의 인디밴드로 '일상과 상상이 마주친 음악'을 표방한다고 한다. 문 없는 집이라니, 과연 관대한 상상력과 동심이 느껴지는 이름이다. <방학을 기다리던 날들>이 수록된 소곡집 [한가로운 생각]은 약 일주일 전 발매되었다. 오르간 연주로 시작하는 도입부부터 동아리 밴드처럼 싱그러운 모습의 뮤직비디오가 인상적이다. 메아리치듯 주고받는 후렴구의 노랫말이 특히 맘에 든다. "유월의 풀잎 같던 내 친구여, 타들어가는 잎도 버리지 않길"

🌻 Takako Mamiya - Midnight Joke

휴가지에서 성실히 지속한 행위를 꼽자면 틈틈이 위스키를 홀짝인 일이다. 어느 친구로부터 '여행지에 위스키 한 병을 사 들고 가서 모조리 비우고 돌아오는데, 마치 기념품처럼 그곳의 분위기를 위스키의 맛과 향으로 기억하게 되어서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곧장 솔깃해서 작년부터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이번에 고른 위스키는 버번에 속하는 버팔로 트레이스였다. 미국 위스키라면 괜히 더 독할 것 같지만, 더욱이 돌진하는 물소가 그려진 패키지가 위협적이지만 생각보다 마일드한 맛의 위스키다. 숙소에 배치된 머그컵에 온더락이랍시고 편의점에서 사온 돌얼음을 우악스럽게 붓는다. 위스키는 계곡물에 발을 담근 한국인처럼 '캬~' 소리가 절로 나게 차가운 대신 얼음이 빠르게 녹아 금세 밍밍해진다. 그렇게 묽어진 술을 달그락달그락 부담 없이 기울이며 마음껏 게으를 수 있었다.

독주에 어울리는 음악은 어떤 걸까? 몹시 주관적인 영역이지만 나는 시티팝이 꽤 높은 순위를 차지할 거라 생각한다. 2000년대 이후 등장한 청량하고 발랄한 시티팝보다 훨씬 녹진한 분위기의, 이 장르가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는 일본의 버블경제 시기 발매된 것으로. 최근 친구의 추천으로 듣게 된 타카코 마미야(Takako Mamiya)는 1982년 한 장의 앨범 [Love Trip]만을 발매하고 종적을 감춘 미스테리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2010년대 이후까지 우리나라에서 여러 번 재발매되었다고 하니 시티팝의 도시전설이자 고요한 고전이라 할 만하다.

다시 돌아온 일상에서 마신 위스키는 휴가지에서의 기억보다 쓰고 강했다. 술은 어디서, 어떤 온도에서, 누구와 마시느냐에 따라 기묘할 만큼 풍미가 좌우되는 액체다. 휴가지의 소파에서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마신 위스키의 맛은 당분간 느끼기 어려울 테니, 한동안은 독주의 벗이 되어줄 시티팝을 안주로 삼아야겠다.

🌻 Rialto - Summer's Over

휴가 이후의 시간은 그때의 여유를 곱씹거나 그리워 할 틈도 없이 빠르게 흘러갔다. 영험한 비밀을 품은 듯한 산맥이나 나무의 엽록소를 그대로 삼킨 양 초록빛으로 춤추는 강물에 먼 시선을 던지던 일이 몇 달 전처럼 느껴졌다. 어떤 시기는 왜 이리 빠르게도 흐르는지. 아마 처서가 지나 찬바람이 팔뚝을 스치지 않았다면 눈앞의 마감을 좇기 바빠 계절의 테두리를 느끼지 못했을 거다.

아마 90년대 영국 밴드의 클리셰를 좋아하는 취향을 가졌다면 작용 반작용의 법칙에 따라 이 노래에 스며들 수밖에 없을 거라 생각한다. 홀딱 빠져 칭송하지는 않을지언정 체온과 같은 물에 몸을 담그듯 편안함을 느낄 것이다. 거친 듯 서정적인 목소리, 금세 흥얼거릴 수 있을 만큼 단순하게 흐르는 후렴구, 전반적으로 아일랜드 어딘가의 축축한 땅을 떠올리게 하는 이 분위기와 전개! 옆구르기하면서 들어도 이들은 영국 밴드다.

1998년 데뷔해 두 장의 앨범을 남긴 밴드 리알토(Rialto)는 실제로 본토인 영국보다 한국에서 인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고 한다. 동양인의 감성을 건드리는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아무려면 치열한 한때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노래에서 은은히 풍기는 우울한 감성이 나는 좋았다. <Summer's Over>라는 제목에서 체념 대신 한 시절을 무사히 치러낸 후련함을 느꼈다. 뜨거운 계절을 통과하는 동안 달궈진 머리를 이제는 식힐 시간이다. 그 과정에 이 곡은 요란하지 않은 BGM이 되어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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