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6] 🍄 풀 내음 짙은 여름밤엔, 사랑 노래 아니겠어요?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잘 지내셨어요? 7월의 첫날에 인사드리는 로이입니다. 요 며칠 간 변화무쌍한 날씨에 몇 번 곤욕을 치렀어요. 일기예보만 믿고 우산을 챙기지 않았다가,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편의점 우산을 사기도 했답니다. 집에 쌓여있는 편의점 우산만 몇 개인지. 

어느새 우리나라도 스콜(squall)이 익숙해진 기후가 된 것 같아요. 저에게 스콜은 학창 시절 교과서에 '열대 지방에 빈번하게 나타나는 벼락같은 비바람'이라고만 여겨졌거든요. 그게 우리나라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스콜과 무더위를 누가 좋아하겠습니까마는, 그래도 단 한 가지 여름이 좋은 점은 길가에 퍼지는 풀 내음이 점점 짙어진다는 것입니다.

집 앞 공원이나, 회사 근처 숲을 걸을 때면 한층 무성해진 나무와 이름 모를 풀, 꽃들을 만난답니다. 진한 향기를 뿜어내는 그들에게서 마치 청춘과 같은 생기를 느낄 수 있어요. 생각해보면 여름은 그런 것 같습니다. 작열하는 태양, 해변을 뛰노는 사람들, 노래하는 매미, 풀 내음 맡으며 걷는 저녁 길 등을 생각하면, 왠지 모르게 청춘이 떠올라요. 그리고 여름 햇볕만큼이나 따끔하고 강렬했던 사랑도요.

오늘은 여름을 닮은 아이돌의 사랑 노래를 소개해드려요. 이들의 가사를 빌려 세 가지 가상의 짧은 이야기를 담아보았답니다. 여러분도 강렬했고 설렜던 여름 추억이 있으신가요?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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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HINee - ROMANCE

늦은 아침, 매미 소리에 눈을 떴다. 어젯밤이 꿈처럼 스친다. 다시 생각해봐도 미친 것 같다. 처음 본 여자와 함께 도시를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그녀는 카페에 홀로 앉아 그저 식은 커피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굴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아니 누구와 같이 있었던 걸까?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수다, 멈추지 않는 에스프레소 추출 소리, 달그락거리는 설거지 소리에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그녀의 눈은 공허했다. 홀린 듯 다가가 말을 걸었다. 이 순간을 놓치면, 다시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 가지 기억나는 건 시종일관 무표정이던 끝자락에 옅게 피어난 미소였다.

도시의 불은 꺼질 줄을 몰랐다. 네온사인 간판 가득한 거리, 만달라키 조명이 비추는 힙한 골목길을 지나 공원으로 걸어갈 때까지 어디든 빛은 있었다. 뛰는 심장 박동만큼 왠지 우리의 걸음은 빨랐고, 가쁜 호흡에, 무더위에 목 뒷줄기가 뜨거워졌다. 이따금 그녀의 블라우스 사이 목걸이가 반짝였다. 빛이 날수록 눈이 갔다. 그녀도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있었다. 목 뒤가 더욱 뜨거워졌다.

잠시 벤치에 앉아 쉬기로 했다. 걸음도 빨랐거니와 끊임없는 대화에 목이 말랐다. 편의점에서 맥주 대신 싸구려 와인 한 병을 챙겼다. 와인잔은 다 떨어졌단다. 어쩔 수 없이 50개나 되는 종이컵 한 줄을 샀다. 기다란 종이컵을 들고 오는 내 모습을 보던 그녀는 황당해하면서도 피식하고 웃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건, 한병철의 책, 유유출판사의 표지,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영화들이었다. 전혀 관심이 없지만, 최대한 아는 척 했다. 평론가라도 된 양 입을 놀리느라 더욱 진땀이 났다. 

머리가 아팠다. 아마 어제 목이 말라 물처럼 마셔댄 싸구려 와인 때문인가보다. 어제 일이 정확히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한창 이야기를 하다, 그녀의 목, 손목, 발목을 힐끔힐끔 쳐다보기도 했다. 택시를 불러주겠노라며, 휴대폰을 꾹꾹 눌러댔다. 그녀는 굳이 부르지 않아도 된다며, 손을 뻗어 택시를 잡았다. 정신은 오락가락하면서도 문은 열어주었다. 저 멀리 떠나는 택시 번호를 외우려고 눈을 부릅떴다. 눈을 부릅... 부릅... 부릅떴다! 정신이 확 들어 휴대폰을 켰다. 전화번호? 페이스북 메시지? 인스타그램? 아! 문자 한 통이 들어와 있다. "어제 정말 재미있었어요."

🍄 TWICE - ALCOHOL-FREE

난데없이 오키나와에 왔다. 스트레스에 못 이겨 덜컥 휴가를 냈다. 아무리 자유로운 스타트업이라 해도 눈치는 보였고 업무 대체자도 없었지만, 당장 어디론가 떠나지 않으면 더 견디기 힘들었다. 내가 꿈꾸던 30대는 이게 아닌데. 지난해 선교지로 다녀온 오키나와가 너무 좋았다는 교회 언니의 말이 생각나 퇴근하자마자 저녁 비행기를 탔다. 아무 준비도 없이 온 탓에 그 흔한 버킷햇도 못 챙겼다. 

J는 아메리칸 빌리지 근처의 한 소바집에서 만났다. 무더운 오키나와 날씨에 점심으로 시원한 판 모밀 소바를 생각했지만, 내 앞에 놓인 건 칼국수였다. 그것도 아주 설익은. 내가 뭘 잘못 시켰나? 메뉴판에 그림이라도 그려주지. 어디선가 웃음이 들렸다. 나 말고 손님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저 까무잡잡한 놈이다. 뭐야 기분 나쁘게. 혼잣말로 미친X이라고 읊조렸다. 근데 저 사람 갑자기 왜 일어나는 거야? 내 테이블에 앉는 건 뭔데? 잠깐만 지금 싸우자는 건가? 웬 미소?

선셋비치의 한 바에서 음료를 기다리는 동안 J가 근처 아메리칸 빌리지에서 대충 쓸만한 버킷햇 하나를 사 왔다. 오키나와의 여름 태양은 매우 강력해 화상을 입을지도 모른다며, 선크림도 주었다. 워터프루프 스포츠 선크림. 이걸 바르면 화상 없이도 예쁘게 태닝이 잘 된다나 뭐라나. J는 교환 학생으로 오키나와에 왔다. 외모는 누가 봐도 서퍼 같은데, 인류학을 공부한다고 했다. 오키나와는 원래 류큐 왕국이었고 특유의 역사적 지리적 배경 때문에 본토와는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어 관심이 생겼다고 한다. 그는 어린아이 마냥 자신이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술술 쏟아냈다. 아무리 봐도 공부는 안 하고 서핑만 하는 것 같은데, 꼬시려면 차라리 서핑 이야기와 네 굵은 팔뚝이 낫지 않겠니.

J는 쉴 새 없이 눈을 반짝이며 매력 어필을 이어갔다. 어느덧 내리쬐는 태양은 사라지고 바다는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그의 철 없는 이야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마치 소년-실제로 나보다 훨씬 어려 보이지만-같은 얼굴로 천진난만하게 떠드는 모습에 점점 서울에서의 내 모습도 잊히는 듯했다. 괜히 매일매일 신경질에 구겨질 대로 구겨진 내 미간과 푸석해진 머릿결, 피부가 신경 쓰였다. 

평소에도 술을 잘 먹지 않던 나는 논 알코올 레모네이드를 시켰다. 톡 쏘다 못해 머리가 띵해야 하는데, 왜 이렇게 자꾸 나른해지고 취하는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모히토를 시킨 건 J인데, 왜 내 심장이 이렇게 엇박자로 뛰는지. 저 반짝이는 눈빛 때문일까? 나와는 너무도 다른 삶을 살며, 행복한 꿈을 꾸는 이 사람 때문일까? 선셋비치의 노을이 조명이 되어 J를 비춘다. 사랑이란 것이 이렇게 쉬웠나?

🍄 LOVELYZ - AH-CHOO

그는 홍대에 올 때마다 항상 밀로커피로스터즈에서 만나자고 했다. 파도에 밀려 홍대입구역 8번 출구를 빠져나와 카페의 문을 열면, 마치 다른 세계에 온 것 같다고 했다. 그가 항상 시키는 메뉴는 '몽블랑'. 그는 카페 사장님이 얼마나 멋있는지, 여기 몽블랑이 다른 비엔나커피와는 어떻게 다른지 매번 했던 이야기를 반복하곤 했다. 

그와 나의 다음 코스는 연남동이었다. 여름밤 공기를 느끼며 걷는 연트럴파크의 무드를 좋아했다. 그와 나는 공통된 취향이 많았다. 드립 세트와 원두를 구비해 놓을 만큼 커피에 관심이 많았다. 홍콩 영화에 심취해 왕가위 영화 중 최고는 무엇인지 토론했으며, 사람들이 주성치가 얼마나 슬픔을 잘 이야기하는 배우인지 알아야 한다며 침을 튀겼다. 엘지 트윈스는 언제 우승을 할 수 있을지 이야기하다 쓴웃음으로 마무리하기도 했다. 그는 나와 본인을 두고 '취향의 공동체'라고 명명했다. 나는 그에 동조하며,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 모임을 만들자고 선언하기도 했다.

그렇게 오늘 우리가 모인 것이다. 나, 그, 그리고 그녀. 더는 없을 줄 알았던 특별한 '취향'을 가진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의 회사 후배인 그녀 역시 커피를 좋아했고, 장국영에 빠진 사람이었다. 잠실에서 태어나 2대째 엘지 트윈스의 팬이었다. '취향의 공동체' 멤버에 들어오기에 손색없었다. 아니, 오히려 자격으로 따지면 이미 VIP였다. 

난 사실 커피와 홍콩 영화를 좋아했지만, 야구는 딱히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엘지 트윈스의 팬이기에 관심을 가져본 것이다. 마침 친구들을 따라간 야구장의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고, 팬 활동을 할 만한 적당한 스포츠팀도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무엇보다 야구를 주제로 그와 더 많은 대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우리는 연트럴파크를 걸으며, 같은 취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성북동 리이케커피에 방문해보기로 했으며, 양조위가 마블 영화에 나온다는 사실에 환호했다. 마지막으로 더 이상 어린 세대들이 야구를 보지 않는다는 문제에 KBO의 구체적인 노력을 촉구했다. 중간중간 쉬어가며 이야기를 나누다 어느새 사천교 부근까지 걸어왔다. 여기서부터는 집 방향이 달라 담화를 이어가기 어렵다. '취향의 공동체'가 자연스럽게 헤어지는 장소다.

그와 그녀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내가 먼저 다음에 또 보자는 인사와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도 자신의 갈 길을 갔다. 몇 걸음 걷다 뒤를 돌아보았다. 그와 그녀는 같은 방향으로 걸어갔다. 내가 있어서 잡지 못했던 손을 잡으며. 아마 저들은 집으로 가는 길에 더 깊은 취향 담화를 나누겠지? 새로 발견한 원두에 대해서, 장국영을 추모하며, 엘지트윈스의 선전을 축하하며. 망할 취향 같으니라고. 갑자기 코끝이 간지럽다. 재채기가 나올 것만 같다. 여름밤 매미 소리가 숲길에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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