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의 단상』 롤랑 바르트
오늘 아침 나는 급히 어떤 일의 승패가 달려 있는 아주 '중요한' 편지 한 통을 써야만 했다. 하지만 대신 나는 아무에게도 보내지 않을 사랑의 편지를 쓴다. 찬란한 사랑의 의무에서 온, 그러나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을 위해, 나는 세상이 내게 부과하는 그 침울한 임무들을, 분별 있는 조심성, 반응의 처신 등을 즐겁게 포기한다. 나는 내 광기의 유일한 증인이다. 사랑이 내게서 노출시키는 것은 에너지이다. 그러므로 내가 하는 것은 모두 의미(그래서 내가 불평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를 가진다. (…) 문학에서 태어나 그 낡은 코드의 도움을 받고서만 말할 수 있는 나는, 그렇지만 내 스스로의 철학에 매달린 채 홀로 내 힘과 더불어 존재한다.
"기쁨은 상속자도 어린이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기쁨은 그 자체만을 원하며, 영원을, 같은 것의 반복을 원한다. 그것은 모든 것이 영원히 그대로이기를 바란다." —니체
언어는 살갗이다. 나는 그 사람을 내 언어로 문지른다. 마치 손가락 대신에 말이란 걸 갖고 있다는 듯이, 또는 내 말 끝에 손가락이 달려 있기라도 하듯이. 내 언어는 욕망으로 전율한다.
소크라테스는 "아름다운 소년 곁에 아름다운 사람으로 가기 위해 이렇게 치장했다네"라고 말한다. 이렇듯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닮아야 한다.
"아무리 해도 당신을 잘 모르겠어요"라는 말은 "당신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말 모르겠어요"라는 뜻이다. 당신이 나를 어떻게 해독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나 역시 당신을 해독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하면 할수록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사랑의 행위를 통해 내가 체득하게 되는 지혜는, 그 사람은 알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리하여 나는 미지의 누군가를, 그리고 영원히 그렇게 남아 있을 누군가를 열광적으로 사랑하게 된다.
독창적인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대중 문화란 욕망을 가르쳐 주는 기계이다. 그것은 "여기 당신의 관심을 끌 만한 것이 있다"라고 말한다. 마치 인간이 혼자서 욕망의 대상을 발견하는 게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는 것처럼.
"사랑이 시작되기 전 아름다움은 그 표지로서 필요하다. 그것은 우리가 사랑하게 될 사람을 칭찬하게 함으로써 그 사랑을 좌우하게 된다." —스탕달
홀로 명상에 잠겨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조용히 생각해 본다. 모든 해석을 유보하고, 무의미의 밤 속으로 들어간다. 어둠은 계속 진동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붙잡으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소득(non-profit)의 밤, 정교하고도 눈에 보이지 않는 소비의 밤이다. 나는 어둠 속에 있다. 나는 여기 사랑의 어두운 내부 안에 그저 조용히 앉아 있을 뿐이다.
"이 어둠을 어둡게 하는 것, 바로 거기에 모든 경이로움의 문이 있다." —도(道)
내 고통이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내 자신에게 증명해 보이기 위해, 나는 눈물을 흘린다. 눈물은 표현이 아닌 기호이다. 나는 내 눈물로 하나의 이야기를 하며, 고통의 신화를 만든다. 그렇게 하여 나는 고통에 적응할 수 있으며, 또 그 고통과 더불어 살아나갈 수 있다.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가장 '진실한' 메시지, 혀의 메시지가 아닌 몸의 메시지를 거두어 주는 한 과장된 대화 상대자를 자신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말, 그것은 무엇인가? 한 방울의 눈물도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얘기하리라." —슈베르트
내게 있어 '최고 가치'는 존재하며, 그것이 내 사랑이다. 나는 결코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나는 허무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끝에 대한 질문은 하지 않는다. (…) 사랑이 완벽하게 만든 이 나를(그렇게도 많이 주고, 또 그렇게도 행복하게 만들어 준)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플로베르는 쓸 말이 생각나지 않으면 의자에 몸을 내던졌다고 한다. 이것을 그는 '소금물에 절이기(marinade)'라 불렀다. 무엇인가가 지나치게 격렬하게 울리면, 그것은 내 몸속에서 대소동을 일으켜 나는 모든 작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면 나는 침대 위에 드러누워 아무 저항없이 이 '내적인 폭풍우(tempête interieure)'에 몸을 내맡긴다.
결국 내가 매달려 있는 질문은, 그리하여 내가 그 사람의 얼굴에서 끈질기게 그 대답을 요구하는 것은 난 당신에게 어떤 가치가 있죠?라는 질문이 아닐까?
프로이트는 약혼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단지 내 사랑을 당신에게 증명해 보일 수 없다는 그 불가능성이오"라고.
나는 그 사람을 그의 자질(계산할 수 있는)이 아닌, 그의 실존에 의해 사랑한다. (…) 나는 그의 사람됨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임(qu'il est)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 사람은 내 재산이자 내 지식이다. 나만이 그를 알고 있으며, 나만이 그를 진실 속에 존재케 한다. 내가 아닌 그 누구도 그를 알지 못한다. (…) 또는 반대로 그 사람이 나를 진실 속에 자리잡게 하며,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에만 나는 '내 자신임(moi-même)'을 느낀다.
사랑은 눈을 멀게 한다라는 속담은 거짓말이다. 사랑은 오히려 눈을 크게 뜨게 하며, 명석하게 만든다.
"그는 자신을 과시하지 않기 때문에 빛날 것이요,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지 않기 때문에 위압할 것이다. 그의 작업이 성취되었다 할지라도 거기에 집착하지 아니하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의 업적은 길이 남으리라." —도(道)
비소유의 의지를 소유하지 않으며, 오는 것을(그 사람으로부터) 오도록 내버려두며, 가는 것을(그 사람으로부터) 가도록 내버려두며,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아무것도 물리치지 아니하며, 받되 보존하지 않으며, 만들되 제 것으로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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