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에세이

스페인 화가_라몬 카사스

우리에겐 잃어버린 시간이 아니었어

2024.03.18 | 조회 1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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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 드 까뮤

그림과 글로 내 안의 나를 만나는 시간

라몬 카사스 <무도회가 끝난 후>,1899년, 몬트세라트 박물관
라몬 카사스 <무도회가 끝난 후>,1899년, 몬트세라트 박물관

우리에겐 잃어버린 시간이 아니었어.

나라는 사람은 무언가에 꽂히면 감자밭을 캐듯 캐는 습관 때문에 항상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처럼 옆길로 새는 일이 다반사다. 이번 글쓰기도 그렇다. 나는 단지 작가의 이름이 생각 안 나서 검색창에 작가의 제목만 눌렀을 뿐인데 이것이 하루 반나절 짜리 놀이가 될 줄 몰랐다. 구글 검색란에 라만 카사스라는 이름을 시작으로 스페인 출신이라는 것과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나서 카탈루냐 출신 부자 엄마를 가진 뭐 부잣집 도련님으로 패스해야만 했었다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두 나라의 적대적 관계, 카탈루냐 역사, 작가의 사업, 작가들의 친구, 퇴폐 운동 (JOVE decadent)이라는 단어에 또 한 번 꽂혔다가 배는 점점 가야 할 목적지를 잊고 재미난 구경거리를 발견한 듯 한 시간이 흘러버렸다. 나에겐 아침의 시간이 긴 시간이다. 새벽에 일어나 하는 일이 많다 보니 오전 시간은 내게 언제부턴가 중요한 시간이 되었다. 그런데 글쓰기의 글감을 찾는데 인터넷 검색만 하고 있다가 오전을 날릴 뻔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서둘러 작업실로 향했다.

나는 버스를 탔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이미 온통 그의 작품 <무도회가 끝난 뒤>를 스캔하고 있었고 이 작품은 나의 20대를 걸쳐 30대를 거쳐 딸의 10대와 20대의 시간으로 나를 데려갔다. 처음 이 그림을 보며 내게 한 질문은 넌 이렇게 신발도 안 벗고 소파에 누워 본 적 있어? 언제?’ 내가 대답했다 별로 없는 것 같아’ 20대의 나는 학교 작업실과 도서관 그리고 집 가끔 혼자 비디오방에 처박혀 있기 등의 아주 단순한 시간을 보냈다. 지금 생각해도 나를 어쩜 그리 몰아붙이며 살았는지 모르겠다. 석사 논문을 아이를 낳자마자 마쳤으니 그림 속 소파에 누운 우아한 자태의 모습은 내 기억에는 없다.

그리고 30대는 대학 강의와 미술 교습소 운영 그리고 독박 육아 등 말하면 입에 거품 나올 지경의 기억들도 있다. 이런 나를 탈출? 시켜준 건 한국을 떠나 먼 나라로 환경 바꾸기를 해 버린 일이다. 낯선 땅에서의 생활은 그야말로 생존이었다.

365일을 출장 다니는 일 중독자 남편과 어린 딸과의 삶은 녹녹지 않았다. 내겐 보통 주재원의 삶과는 좀 많이 다른 삶을 살았다. 여느 부부와 다르게 국제 학교를 선택하지 않았고 독일 유치원을 택한 아주 특이한 부부였다. 이때부터 딸과 나의 외국 생존 일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강제 경력단절에 전업주부 엄마가 된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도 독일어를 한국어로 번역된 손바닥만 한 여행 독일어 책을 목숨처럼 들고 다니는 무지한 동양 아줌마가 된 것이다.

이 긴장된 해외 생활은 한국의 도시 생활과는 너무나 다른 삶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 어려움들은 있었지만, 공원을 산책하는 일이 많아졌고 아이와 자전거를 타며 바람을 느꼈다. 그리고 아이와 소파나 침대에 누워 많은 시간을 보냈다. 아이가 소파에 누워 있는 모습을 사랑스럽게 쳐다볼 수 있는 시간이 생긴 것이었다. 이 그림에서의 값비싸 보이는 푹신한 소파는 아니었지만, 화면 가득 채운 클로즈 업된 장면은 그때의 그 시간으로 나를 데려가 주었다.

아이와 나는 유럽과 미국에서의 삶 중 벼룩시장을 다니는 걸 제일 좋아했다 그곳에 가면 그들의 오랜 살림살이를 보는 것이 야외 박물관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가끔 그곳에서 작은 소품들을 사곤 했는데 그것 중에는 의자도 있었다. 12년 동안 7번의 이사로 부피가 큰 물건을 사지 못한 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제 6살의 동양 어린이와 독일어와 영어의 까막눈이었던 50대의 나와 20대의 생기발랄 젊은이는 다른 대륙에 살며 각자의 안부를 아주 가끔 물으며 살아간다. 12월 어느 날 화상 통화 좀 하자는 엄마의 문자에 클럽에 가야 해서 통화를 못 할 것 같다는 딸의 문자를 보며 피식 웃음이 난다. 나는 속으로 딸에게 말했다. ‘그래, 잘 갔다 와 부럽다야 라고 말이다. 딸아이의 완벽주의와 강박증으로 나는 늘 가슴을 졸이는 일이 참 많았다. 지금의 이런 대화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뭐든 잘해야 된다는 완벽주의 아이를 지켜보는 일은 타인이 보는 부러움 너머의 또 다른 힘듦이 있다. 그래서 지금의 이런 아이와의 대화는 늘 안심 코드가 되었다. 딸의 기숙사 방안 작은 소파가 담긴 사진 한 장과 가끔 취미로 재봉한 커튼의 사진을 보내올 때면 참 행복하다.

그리고 지치고 힘들면 쉬어 가도 돼. 소파에 신발 신고 누우면 좀 어때? 푹신한 소파도 잘 샀어! 너를 안아 줄 곰돌이 인형도 잘 샀어! 언젠가 엄마도 엄마를 위한 푹신한 의자를 하나 사들일까 해. 엄마만의 일인용 소파 말이야. 주절주절 얘기를 꺼내기 시작하니 우리들의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시간이 행복한 시간처럼 느껴진다.

나는 요즘 나의 잃어버린 시간에 대해 그리고 과거의 부정적 기억으로부터 조금은 벗어나게 된 것 같다. 모든 기억은 시간이 흐르면 왜곡되고 다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지금 글을 쓰는 이 시간도 언젠가 내 기억 속에서 꺼내어질 때 행복한 시간이었으면 좋겠다. 

 

글쓴이-박숙현 

치유작가 SUE라는 이름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12년간의 해외 살이로 세계 곳곳의 박물관 미술관을 다니는 취미를 가졌고 지금은 한국에서 그림 그리는 작가로 글도 쓰며 살고 있다.

블로그 https://blog.naver.com/reazume00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sue_spielr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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