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단상 - 2023. 11. 21

비수기의 노동 2

2023.11.21 | 조회 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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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류의 기억의 단상

매일 아침마다 당신에게 이야기를 담은 편지를 전합니다.

 

그런 옥천에 근무 신청을 했다. 더도 덜도 말고 딱 한 달만 죽었다고 생각하고 버틸 생각이었다. 근무 시간은 저녁 730분부터 오전 830. 식사 시간 한 시간을 제외하고 총 12시간동안 일해야 하는 긴 노동 시간이다. 내가 사는 진주에서 옥천까지 지도맵을 켜서 거리를 재니 편도로 두 시간, 왕복으로는 네 시간이었다.

 

진주에서 옥천까지 운행하는 통근 버스가 있지 않았다면 아예 신청도 하지 않았을 거리인데, 다행히도 통근 버스가 있었다. 통근 버스를 타는 동네에서 우리 동네까지 버스를 타러 오가는 시간까지 합치면 왕복 두 시간. 총 여섯 시간을 길에서 투자해야한다는 사실이 깜깜했지만, 당장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아무것도 없었다.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근무 신청 문자를 보내니 곧장 연락이 왔다. 신청 양식 뒤에 혹시 몰라서 쿠팡 물류센터에서 일 년 넘게 일했고 분류 업무 주로 했습니다.’ 라고 덧붙였는데 그것 때문 인걸까. 수요일부터 근무가 가능하다고 연락이 왔다.

 

내가 신청한 날은 다음날인 화요일이었는데, 근무자를 다 구한 모양이었다. 월요일인 오늘도 쿠팡에 근무 신청을 했지만, 확정 연락이 오지 않아서 내일부터는 다른 곳에서라도 일해야 한다는 빠른 결단이 필요했기에 바로 다음날로 신청했다. 아쉽게도 내일은 못 가게 되었지만, 모레는 티오가 있다는 사실이 다행이었다.

 

수요일에 일하겠다고 하자, 바로 전화가 걸려왔다. 아픈 데는 없는지, 지병은 없는지, 수술을 한 적은 있는지 아웃소싱 업체의 담당 대리가 물어왔고 나는 아픈 데도 없고, 지병도 없고, 수술을 한 적도 없이 건강하다고 대답했다.

 

내 대답을 듣고 난 후, 그는 알겠다며 셔틀버스를 타는 곳을 보내놓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난 후에 몇 통의 문자가 왔다. 첫 출근시 필독 사항, 출퇴근과 통근 버스 탑승시 필요한 전용 어플의 링크, 작업시 참고해야 할 사항(이 부분은 쿠팡과 똑같았다), 통근 버스 탑승 장소가 담긴 문자를 천천히 숙지하듯이 읽으며 , 정말 옥천으로 모레면 가는구나.’ 라는 생각에 떨리기도 하고, 긴장도 됐다.

 

처음 가는 옥천에서 잘 해낼 수 있을지 무섭기도 하지만, 쿠팡에서도 일 년 넘게 극한의 공정인 분류에서 버틴 내가 아닌가. 분명히 그곳에 가서도 분류를 한다면 금방 익힐 수 있을 거다. 상하차는 남자들의 영역이라 주로 여자들은 분류를 시킨다고 했으니까.

 

쿠팡에서 분류 에이스’, ‘고정 분류조’(계약직 중 고정 분류조가 있었는데, 그 계약직들만큼 분류를 많이 한다는 뜻에서 붙여졌다), ‘분류장 안주인’, ‘간선의 신’, ‘분류의 신이라는 별명까지 단기인데도 획득한 내가 아니던가. 심지어 분류장에 남자만 필요한 날에도 남자 대신 나를 뽑아가서 일한 적이 있을 정도로 일당백도 했고. 그러니 분명히 옥천에서도 버텨낼 수 있을 거다.

 

여기서도 버텼는데 다른데 가서도 못 버틸게 뭐가 있냐는 깡이 쿠팡에서 일하면서 생겼으니까. 그러니 해보자, 더 이상 밑바닥은 없다는 마음으로.

 


🎈 11월 25일부터 11월 30일까지 '기억의 단상' 12월호 신청을 받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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