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희] 심장과 마음 사이의 사랑

헤어질 결심 (2022)

2022.07.16 | 조회 4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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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영화감상문

매주 토요일 영화리뷰 연재

'헤어질 결심'은 자타공인 아주 고전적인 사랑 영화다. 영화는 수사와 로맨스를 반씩 가져간다기보다는 로맨스를 수사로 치환하고, 또 수사를 로맨스로 치환하며 그 사이를 오간다. 감시가 관음으로 전환되고, 심문이 관심으로 옮겨간다. 그 과정에서 영화는 고전적인 성격을 띠면서도 한편으론 현대적인 요소들을 사용한다. 이러한 특징은 극중 '월요일 할머니'가 70년대 노래인 정훈희의 '안개'를 아이폰의 인공지능 비서 '시리'에게 시켜 재생하는 장면에서 압축적으로 드러난다. 해당 장면 때문에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들은 '극장 곳곳에서 관객들의 휴대폰 속 시리가 대답했다'거나 '아이폰 유저는 폰 끄고 보세요' 같은 농담조의 후기들을 남기기도 했다. 이밖에도 '헤어질 결심'은 영화 곳곳에서 현대 스마트기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형사인 해준(박해일 분)은 수첩 대신 스마트워치의 녹음 기능을 사용하고, 이러한 녹음은 후에 해준과 서래(탕웨이 분)가 각자의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영화 속에서 중요하게 작용한다.

또 중요하게 사용되는 장치는 현실에서보다 앞선 기술력을 가진 음성 번역 기능이다. 중국인인 서래는 평소에는 서투르면서도 명민하게 한국말을 사용하지만, 보다 자세한 설명을 위해 중국어를 사용할 때는 스마트폰의 음성 번역 기능을 사용해 해준과 소통한다. 번역의 과정에서 서래의 어조, 손짓, 눈빛과 목소리는 인공지능의 어딘가 영혼 없는 목소리에 덮이므로, 해준과 관객은 말하는 서래의 모습을 기억했다가 번역된 내용과 직접 결합함으로써 그 시차를 줄여야 한다. 서래 역시 번역된 자신의 발화를 들으며 상대방에게 눈짓과 손짓을 다시 더해준다.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소통하는 과정에서, 원래의 언어는 깎여나가고, 그러다가 군데군데 덧칠되고, 어떤 시차와 간극을 넘어 상대에게 가닿는다. 그 지점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사 중 하나는 해준이 서래의 말을 번역기에 돌려서 나온 "그 친절한 형사의 심장을 가져다주세요"라는 말이다. 친절한 AI 남성의 목소리로 번역된 그 말을 곱씹던 해준은 얼마 뒤 서래에게 직접 묻고서야 서래가 말했던 것이 '심장'이 아니라 '마음'이었음을 알게 된다.

박찬욱 감독은 아레나 인터뷰에서 '무엇을 믿느냐'는 질문에 '디테일을 믿는다'고 답변한 바 있다. 그러니까 '영화의 주제'가 아니라 '커피잔의 색깔'에서, "종교적인 사람이다"가 아니라 "넥타이를 매는 타입이다"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그의 믿음처럼 '헤어질 결심'은 직접적인 발화보다 인물의 행동들이 영화의 감정과 뉘앙스를 구성한다. 가령 절에 간 해준이 흐트러진 방석을 각 맞춰 정돈한다거나, 서래가 길고양이에게 밥을 챙겨주는 것처럼 스쳐지나가는 행동들이 그들을 설명한다. 이러한 두 사람의 행동은 영화 속에서 자주 겹쳐진다. 서래와 해준을 각각 포착하는 화면의 구도가 세트처럼 연결되고, 식사 이후 테이블을 정리하는 그들은 초면인데도 몇 년을 함께한 사람들처럼 자연스레 합이 맞는다. 후에 해준이 서래를 사랑하는 이유로 내뱉은 '꼿꼿함' 같은 것은 마치 해준 자신에 대한 설명 같다.

서래를 대하는 해준의 태도 역시 행동으로 드러난다. 해준이 서래에게 사비로 모듬 초밥을 사준다거나, 서래를 만나러 가는 차 안에서 급하게 면도를 한다거나, 아내인 정안(이정현 분)에게 사건에 대해 말할 때 '중국인 남편과 사망한 아내'라며 성별을 바꾸어 말하는 행동 같은 것들이다. 특히 마지막 행동은 아직 서래와 관계를 발전시키기 전이고 아내에게 숨겨야 할 요소가 없는데도 거짓말을 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이는 감독이 GV에서도 언급했듯, 해준이 이미 처음부터 서래에게 직업인으로서, 유부남으로서 부적절한 감정을 느꼈고 이를 숨기기 위해 방어기제처럼 나타난 거짓말이다.

영화는 두 번의 살인사건에 따라 13개월의 시차와 장소변화를 두고 크게 두 파트로 나누어진다. 첫번째 사건에서 해준의 후배 형사인 수완(고경표 분)은 해준에게 '의심스러운 서래를 왜 놓아주냐'며 불만을 표한다. 반면 두번째 사건에서 이포의 형사 연수(김신영 분)는 범인이 이미 나왔는데 왜 서래에게 자꾸 집착하느냐고 묻는다. 첫번째 사건에서 해준은 서래에게 점점 호감을 쌓아가며 그가 범인이 아니길 바라고 믿었지만, 이로 인해 상처를 받은 이후 두번째 사건에서는 서래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것이다. 이 태도변화는 심문 중 그들의 점심식사에서 시각적으로 두드러지게 표현된다. 해준이 서래에게 호감을 느끼던 첫번째 심문에서는 초밥이었던 식사 메뉴가 두번째 심문에서는 김밥도 아니고 우습게도 달랑 핫도그 한 개로 바뀐다.

남편을 죽인 혐의를 받고 있는 여성 용의자가 남성 형사와 로맨스로 연결되는 모습은 낯설지 않다. 어딘가에선 '남편 잡아먹는 여자'라는 멸칭으로 불릴지도 모르고, 보다 '세련된' 표현으로는 '팜므파탈'이라고 불릴 수도 있겠다. 남편들을 죽이고, 형사까지 유혹해 파멸의 길로 이끄는 팜므파탈. 시나리오 초기부터 서래 캐릭터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배우 탕웨이의 신비로운 이미지 또한 이를 뒷받침한다. '헤어질 결심'은 인물의 마음을 직접 알려주기보다는 관객이 몸을 기울여 유심히 살펴보도록 이끄는 영화다. 그런 성격을 살려 극은 서래의 마음을 계속 의심하도록 흘러간다. 그가 남편을 정말로 죽인 것인지, 해준을 대하는 마음은 진심인지, 관객은 해준의 입장에서 서래를 의심하게 된다. 이포에서 또다시 서래의 남편이 죽었을 때, 해준은 서래에게 '내가 그렇게 만만하냐'며 화를 낸다. 해준에게 서래는 이미 속을 알 수 없고, 어쩌면 나의 마음을 이용했고, 지금 보니 한 번 더 이용하려고 드는 것 같기도 하는 사람이다.

그런 해준에게 서래는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라고 되묻는다. 조명과 시선에 따라 초록이기도 파랑이기도 한 청록색 원피스처럼, 해준과 관객이 바라보는 서래의 모습은 시시각각 색깔이 바뀌는 듯하다. 그렇다고 '헤어질 결심'이 상술한 '팜므파탈'의 클리셰를 전복하려 드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빙그레 웃으며 비껴가거나 혹은 슬쩍 이용하는 것에 가깝다. 영화는 마지막까지 혼선을 준다. 호미산에서 등을 보이고 서 있는 해준의 뒤로 서래가 다가올 때, 영화의 의도대로 관객은 지금까지 서래가 죽인 사람들-특히 산에서 밀어 죽인 기도수를 떠올리면서 불안해진다. 그리고 그 장면에서 서래는, 해준의 '심장'이 아니라 '마음'을 갖고싶어했듯, 해준을 밀치는 게 아니라 껴안는다. 관객과 마찬가지로 서래에 대한 불안과 의심을 여전히 품고 있었던 해준이 서래의 손길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은 영화 곳곳에 배치된 일종의 유머 중 하나다. 서래가 스스로의 존재를 영원히 없애버릴 때에야, 서래의 마음은 비로소 더이상 의심받지 않는다.

관객은 해준의 시선을 한 번 거쳐서만 서래를 보게 되므로, 서래가 언제부터 해준을 사랑하기 시작했는지는 명료하게 특정할 수 없다. 다만 "당신이 사랑한다고 말할 때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내 사랑이 시작됐다"는 대사를 통해 유추할 수 있다.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라는 해준의 말을 서래는 가장 선명한 사랑의 언어로 해석했다. 해준의 사랑이 스스로를 깨어지고 무너지게 할 만큼, 그리고 그걸 되돌리길 포기할 만큼의 마음이었다는 걸 알게 된 서래는 비로소 자기 몫의 사랑을 시작한다. 서래를 망원경으로 감시하던 해준이 "우는구나, 마침내"라고 말했던 녹음을 들었을 때, 사실은 그때 울지 않았던 서래는 그제서야 운다. 그때부터 서래는 아무도, 해준조차도 알아주지 않는 해준과의 사랑에 기꺼이 삶을 건다. 누가 뭐라고 하든 호미산을 자신의 산으로 생각했던 것처럼.

서래의 마지막은 어쩐지 해준이 수사하던 '질곡동 사건'의 범인 홍산오(박정민 분)의 마지막을 생각하게 한다. 해준이 해결하지 못하고 있던 질곡동 사건에서 홍산오의 '사랑'을 찾아낸 것 역시 서래였다. 홍산오는 오가인(정하담 분)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남기고 옥상에서 몸을 던진다. 서래는 휴대폰을 바다에 던짐으로써 아무도 모르게 해준의 사랑에 대답하고, 바다에 몸을 맡긴다. 이상적인 보통의 방식으로 완결할 수 없는 사랑을, 그들은 스스로의 죽음을 통해 완성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서래가 파놓은 구덩이 옆에 쌓여있던 모래더미는 밀물에 쓸려 해준의 표현처럼 '붕괴'된다. 붕괴된 모래더미를 해준은 알아보지 못해서 끝내 서래를 찾지 못한다. 해준이 서래를 찾지 못함으로써 서래의 사랑은 영원한 미결사건으로 완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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