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철] 사랑과 죽음의 아이러니

슬로우 웨스트(2015)

2022.08.06 | 조회 2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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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영화감상문

매주 토요일 영화리뷰 연재

    서부는 어떤 곳인가. <슬로우 웨스트> 속 사일러스의 말을 빌리자면 "악당이 돌 밑에서 튀어나와 칼을 꽂는 세상"이다. 아직 개척되지 않은 황무지에 문명은 아직 오지 않았고 야만이 도사리고 있는 공간. 고전 서부극은 문명과 야만의 대립으로 곧잘 읽혀왔고, 서부는 언제나 자신이 구한 미개척의 공동체를 떠나는 무법자의 뒷모습으로 대표되었다. 말하자면 서부는 이분법의 공간이다. 허문영 평론가는 서부 사나이가 문제를 바로잡고도 그가 바로잡은 공동체를 떠나야 하는 이유는 문제를 바로잡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총으로 문제를 바로잡는 순간 그는 존재 의의를 상실하거나 문명과 불화할 수밖에 없다."(허문영,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조금 비틀어서 생각하면 서부가 이분법적인 공간이기 때문에, 대립이 해소된 곳에는 문명이 정착되어야 하기에 무법자는 서부를 떠나야만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서부는 이항대립의 공간이다. 

    <슬로우 웨스트>는 1870년, 스코틀랜드에서 온 소년 제이가 자신의 연인 로즈를 다시 만나기 위해 콜로라도를 통과해가는 이야기다. 위험이 도사리는 서부를 통과하면서 가방에 찻주전자를 담아올 만큼 제이는 순진하고 나이브(naive)하다. 그리고 <슬로우 웨스트>에는 유약하면서도 어딘가 굳은 심지를 가지고 있는 것만 같은 제이의 모습만큼이나 신비한 모습으로 서부의 공간이 그려진다. 시공간적 배경을 1870년의 콜로라도라고 명시한 것이 무색할 만큼 극을 이끌어가는 두 주인공은 침엽수림에서 첫 만남을 가지고, 황야에는 꽃과 들풀이 무성하게 피어있다. 이 이질적인 서부의 풍경은 콜로라도가 아닌 뉴질랜드에서 촬영된 풍경이다. <슬로우 웨스트>는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기존의 서부극을 한참 벗어나 있다. 

    서부영화는 당시 미국의 프런티어 정신을 대변한다. 야만의 땅에 문명을 정착시킨다는 정신으로 무장하고 문명의 경계를 지속적으로 확장하던 그들의 개척정신. 이런 역사적 배경을 놓고 볼 때 서부영화가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적 대립으로 읽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미국 바깥에서 만들어진 서부영화라면, 무슨 정신을 담게 될까? 뉴질랜드의 역사에 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이 영화가 뉴질랜드의 사회상이나 시대정신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영화에서도 문명과 야만처럼 상반되는 두 요소가 존재한다. 바로 사랑과 죽음이다. 극의 초반부, 제이는 황무지를 지나가다 마주친 흑인들이 부르는 프랑스어로 된 노래를 듣게 된다. 사랑에 관한 노래라는 그들의 설명에 제이는 "사랑은 죽음처럼 보편적인 것이죠.(Love is universal like death.)"라고 말한다. 

    이 문장은 사랑과 죽음에 관한 일반적인 문장으로 읽힐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죽고, 죽음은 세계 도처에서 벌어진다. 그리고 사랑 역시 그만큼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죽음과 사랑은 아주 상반된다. 죽음만큼 싸늘하고 차가운 것은 없으며, 사랑만큼 따뜻하고 열렬한 것은 없다. 아주 상반되는 것임에도 죽음과 사랑이 보편적이라는 역설을 담아낸 문장. 한편 제이의 말을 단순히 일반적인 의미로도 읽을 수 있지만 앞에 "서부에는"을 붙여 특수하게 읽어볼 수도 있다. 서부에 죽음이 만연했음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제이는 사랑이 죽음처럼 보편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정말로 서부에도 사랑이 죽음처럼 만연해있을까. 아니면 이건 늑대 굴의 산토끼 같은 순진한 소년의 순진한 믿음일까. 그러나 나는 서부에도 사랑이 죽음처럼 보편적인 것이라는 소년의 믿음이 단순히 순진한 것이 아님에 힘을 실어주고 싶다. 제이는 사랑의 보편적임을 이야기하기 위해 죽음을 끌어들인다. "사랑은 죽음처럼 보편적이다"라는 문장에서 사랑이 아닌 죽음에 다시 방점을 찍어보자. 제이는 사랑의 보편적임을 말하기에 앞서 죽음의 보편적임을 인지하고 있다. 제이는 사랑의 만연을 노래할 만큼 순진하지만 죽음의 만연을 이야기할 만큼 단단하다. 

    영화 중간중간 등장하는 제이의 플래시백을 살펴보면 제이에게 죽음의 이미지로 가득한 곳은 미대륙의 서부가 아니라 자신이 떠나온 스코틀랜드였을 것이다. 신분의 차이로 사랑은 좌절되고, 그도 모자라 사랑하는 상대라고 믿었던 로즈에게는 넌 남동생 같다는 말을 들으며 에둘러 거절까지 당했다. 실수로 제이의 삼촌을 죽인 것은 로즈의 아버지지만, 삼촌이 죽게 되는 장면 직후에 도망치고 있는 것은 제이다. "이랴! 서부로!" 참으로 순진한 제목의 책과 나침반에만 의존하며 로즈를 찾아가겠다고 서부를 향해 가는 제이는 유약하고 어리숙해 보이지만, 이미 사랑을 위해 죽음을 각오할 만큼 단단한 마음으로 미대륙을 밟았을 것이다. 

    사랑과 죽음은 상반되는 요소다. 하지만 <슬로우 웨스트>에서 사랑과 죽음이라는 이항은 서로 적극적으로 대립하기보다 공존하며 아이러니를 빚는다. 로즈를 향한 사랑을 위해 길을 떠나는 제이와 로즈 부녀에게 떨어진 지명수배를 위해 함께 떠나는 사일러스의 동행은 사랑과 죽음의 동행이다. 교역소에 총을 들고 나타난 부부 강도는 알고 보니 사랑하는 딸과 아들을 위해 일을 저지른 생계형 강도였다. 로즈 부녀를 쫓고 있는 또 다른 악당 무리가 남겨진 강도 부부의 아이를 거둬 돌보고 있다는 건 참 아이러니하다. 영화의 앞부분에는 제이가 하늘의 별을 향해 세발의 총알을 쏘는 시늉을 하고, 별은 총알을 맞은 듯 반짝이는 장면이 나온다. 이 동화 같은 아름다운 장면에서 제이가 별을 향에 쏘아 올린 세 발의 총알은 곧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제이가 쏘게 되는 세 번의 총성으로 되돌아온다는 것 역시 아이러니하다. 사랑은 죽음처럼 보편적인 것, 혹은 죽음은 사랑처럼 보편적인 것. 오로지 죽음만이 만연해있을 것 같은 서부에 사랑만을 찾아 떠나온 제이를 필두로 <슬로우 웨스트>에는 사랑과 죽음이 빚는 건조한 아이러니가 채워진다. 

    흥미로운 것은 연약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서부를 건너는 제이가 아니라 사일러스가 이야기의 화자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극 중 등장하는 내레이션은 모두 사일러스의 목소리로 되어있다. 제이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제이가 겪은 과거가 회상 장면으로 등장하지만, 영화는 이 이야기가 마치 사일러스의 회고인 것처럼 사일러스의 목소리를 빌려 중간중간 이야기를 전달한다. 보다 직접적으로 이러한 화자의 이행이 드러나는 것은 눈을 감은 제이의 모습에서 출발해 로즈와 사일러스가 단란한 가정을 이룬 꿈 장면을 지나 이것이 마치 사일러스의 꿈이었다는 듯 제이가 사일러스를 깨우는 장면으로 넘어가는 시퀀스다. 영화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화자를 분명하게 선택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이런 화자의 불분명한 이행은 서부의 아이러니를 한층 더 폭넓게 드러내는 영화적 선택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꿈이 다른 누군가에게 옮겨갈 것을 직접적으로 암시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살아남는 게 삶의 전부는 아니라는 거죠." "그래, 죽음도 있지." 제이와 사일러스의 대화를 미루어 볼 때 사일러스에게 서부는 Dead or Alive, 죽거나 혹은 살아남거나의 세계다. 죽음과 생존 사이에서 삶이 적극적인 이항대립을 벌이는 세계에 불쑥 죽음처럼 사랑이 보편적인 것임을 제이가 사일러스에게 보인다. 영화의 절정에서 제이는 뒤늦게 현장에 도착해 로즈를 구하려 하지만, 로즈가 제이를 적으로 오인한 나머지 제이는 로즈의 총에 맞고 쓰러진다. 교역소에서 입었던 외투에 난 총탄 구멍 자리는 그대로 다시 제이에게 총상으로 돌아온다. 제이를 알아보지 못한 로즈는 제이의 앞에서 새로운 연인 코토리와 입맞춤을 하고, 제이의 상처 위로 글자 그대로 소금이 뿌려진다. 뒤늦게 제이를 알아본 로즈, 그리고 로즈를 죽이기 위해 결국 찾아온 악당 페인. 로즈가 쥐어준 권총을 발사하면서 제이는 페인을 쓰러뜨리고 숨을 거둔다. "그의 심장은 잘못된 곳에 있었어요. (His heart was in the wrong place.)" 하필 로즈가 총을 쏜 위치에 제이의 심장이 있었고, 제이는 이미 떠나간 상대를 위해 사랑을 바치는 바람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죽음과 사랑의 아이러니. 제이는 스스로 죽음이 만연한 서부의 한편에는 그만큼의 사랑이 존재한다는 아이러니가 된다. 

     포드 영화의 서부 사나이들, 무법자들은 공동체의 질서를 바로잡고 공동체를 떠나 모뉴먼트 벨리로 돌아간다. <슬로우 웨스트> 무법자 사일러스는 어디로도 떠나지 않고 정착한다. 총으로 질서를 되찾은 것이 사일러스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제이의 꿈이 사일러스에게도 옮겨 닿았기 때문이다. 이항이 대립하고 불화하는 세계에서 무법자는  세계를 떠나야만 한다. 하지만 이항의 공존이라는 아이러니를 품은 세계에서 무법자는 떠날 필요가 없다. 사랑이 죽음처럼 보편적이라는 아이러니와  아이러니가 빚어내는 세계의 아름다움을 받아들이는 . 사일러스는 그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상 떠나지 않는다. 다만 말의 편자를 집안 장식으로  박으며, "이랴! 서부로!"라고 이야기한다. 사랑과 죽음이 빚어내는 아이러니. 꽃이 피고 들풀이 무성한 황무지. 삶은 결코 어느  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반되는 것들이 빚어내는 아이러니의  복판에 있는 것임을 <슬로우 웨스트> 나지막이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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