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 없는 고담시의 탐정

더 배트맨 (2022)

2022.03.19 | 조회 3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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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영화감상문

매주 토요일 영화리뷰 연재

 

    고담시 제일가는 부자인 저 남자는 어째서 밤마다 박쥐 가면을 뒤집어쓰고 고담의 범죄자들을 소탕하고 다니는가? 이 질문에 관한 답은 배트맨의 기원과 정체성을 설명해줄 것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배트맨 비긴즈>를 통해 이 질문에 관한 적절한 답을 내놓았다. 바로 공포. 배트맨을 향한 범죄자들의 공포, 그리고 배트맨 브루스 웨인이 갖는 트라우마적 공포. 공포야말로 배트맨의 서사를 가로지르는 핵심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최근 개봉한 영화 <더 배트맨> 역시 이 키워드를 관통하고 있다. 고담시의 시장으로 보이는 인물이 자택에서 살해당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뒤이어 범죄가 일상화된 도시 고담시의 모습을 보여준다. 수많은 범죄가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지만 모든 범죄를 통제하는 것은 무리다. 그렇기에 배트맨이 선택한 전략은 공포다.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가던 한 남성은 하늘에 떠있는 배트맨 시그널을 본 뒤 겁에 질린 듯 어둠 속을 응시한다. 남자는 두려움에 뒷걸음질을 치다 결국 차에 부딪히고 만다. 어둠 속에서 새카만 옷을 입고 스스로를 복수라 칭하는 남자가 나와 자신을 징벌할 수 있다는 두려움. <더 배트맨>의 이 장면은 배트맨이 만들어낸 '공포'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장면이다. 

    <더 배트맨>의 제목에는 정관사 'the'가 붙어있다. 지난여름 개봉했던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마블 코믹스의 세계관 창조를 급하게 뒤따라가다 <저스티스 리그> 같은 결과물을 내놓으며 급체한 DC 코믹스가 전략을 아예 바꾸기라도 한 걸까? 정관사를 붙여가며 "전에 그건 모른 척하시고 새롭게 인사드립니다"라는 식으로 새 영화를 내놓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더 배트맨> 역시 기존에 워너브라더스가 구축하던 DCEU와는 연관점을 갖지 않는다. 완전히 새로운 시작이다. 새로운 출발점을 가졌기 때문일까? <더 배트맨>은 기존의 배트맨 영화들과는 완전히 다른 정체성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으로 보인다. 훨씬 더 어두워졌고, 탐정이라는 정체성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배트맨이 최초로 등장했던 코믹스의 타이틀은 "배트맨"이 아니라 "Detective Comics"였다. 어두운 고담시의 범죄를 추적하는 탐정 배트맨. 그래서 배트맨의 적들은 강력한 완력으로 승부하기보다 지략으로 대결을 펼치는 경우가 많다. 배트맨의 영원한 숙적 조커가 그렇고, 이번 영화에서 적으로 등장하는 리들러 역시 그렇다. 오히려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베인이 아주 예외적인 경우다. 

    맷 리브스 감독이 그리는 고담시의 풍경은 21세기 미국 어느 도시보다는 범죄가 들끓던 1970년대 미국의 뒷골목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고담시의 모티브가 되는 도시는 뉴욕이 아닌가. 지금의 뉴욕을 생각해보면 실은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정확한 연대를 밝히지 않고 있는 배트맨의 배경은 인터넷과 SNS가 발달해있는 21세기 같지만, 한편으로는 뒷 세계의 조직이 도시의 권력자로 군림하는 갱스터 영화나 누아르 영화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영화에서 낮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적어도 <더 배트맨>에서 고담시는 거의 항상 밤의 도시다. 어둡고 축축한 골목길에 시궁쥐가 돌아다닐 것 같은. 그리고 배트맨은 이 어둡고 축축한 도시를 가로지르는 탐정에 가깝다. 평화를 상징하는 영웅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도시의 그림자진 곳에 숨어있는 공포. 혹은 복수. 배트맨은 이번 영화에서 탐정이라는 정체성으로 돌아가는 것을 천명하고, 거기서 더 나아가 히어로 영화의 궤도에서도 이탈한다. <더 배트맨>은 차라리 네오 누아르 영화라고 부르는 게 더 적절할 것 같다. 

    다만 배트맨이 탐정처럼 단서를 모으고 범죄를 추적하는 것만으로 탐정의 정체성을 획득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더 배트맨>의 배트맨이 차라리 영웅보다는 탐정에 가까운 것이지 탐정이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더 배트맨>이 탐정도 영웅도 무엇도 아닌 존재를 그리려 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단서를 모으고 범죄를 쫓는다. 그러나 <더 배트맨>의 배트맨이 추리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어두운 고담시의 분위기와 공포로 상징되는 배트맨을 그려낸 것은 <더 배트맨>이 이뤄낸 뛰어난 성과지만, 이것은 스타일에 지나지 않는다. 배트맨은 리들러보다 항상 한발 늦는다. 단서를 모으는 것 같다가도 잘못짚어내기 일수다. 심지어는 박쥐 옷을 차려입고 펭귄의 클럽에 잠입하는 것도 아니고 정문으로 당당하게 들어가기까지 한다. 할로윈 이태원 클럽이 아니고서야 그 장면에서는 실소를 참을 수 없었다. <더 배트맨>이 탐정 소설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그럼에도 문제를 던지고 해결하는 방식이 다소 간편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리들러의 문제를 풀고, 한발 늦게 도착하면 정답 공개, 그리고 다음 문제. 배트맨이 문제를 풀어나가기보다 리들러의 미로에 갇혀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것만 같다. 추리한다기보다는 잘 만들어진 탐정 게임을 하는 기분이다. 마치 내가 단서를 찾아 정답을 맞혀나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뒤에서 동작하는 게임의 시스템이 나를 이끌어가는 그런. 

    차라리 한 두 마디 정도라도 말을 보태가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밝혔다면 좋았겠지만 너무나도 과묵한 배트맨은 한마디도 않는다. 감독도 배트맨을 따라 말을 보태지 않는다. 떠먹여 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추리 과정에서 관객이 떨어져 나가 있거나, 혹은 배트맨이 추리하지 않는 탐정이 되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는 없었다. 3시간이나 되는 긴 시간이 박진감보다는 피로감으로 다가온 것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물론 무겁고 육중한 방식으로 편집된 쇼트들도 한몫을 하겠지만 말이다. 결국 <더 배트맨>에서 배트맨은 스타일이 된다. 하지만 스타일만으로 건져 올릴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이러한 스타일의 반복으로 이어진다면, 나는 배트맨의 후속작을 기대할 수 없다. 고뇌하는 것은 좋지만 관객들이 고뇌에 참여할 틈이 필요하다. 뚜렷하게 뛰어난 스타일을 만들어냈지만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는 것, 그것이 고담의 낮과 밤처럼 분명한 <더 배트맨>의 양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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