훼손된 사랑의 행방

K대_OO닮음_93년생.avi (2019)

2022.03.12 | 조회 75 | 0 |

소박한 영화감상문

매주 토요일 영화리뷰 연재

눈치가 빠른 독자라면 영화의 조금 특이한 제목을 보고 예상했을 수도 있겠다. <K대_OO닮음_93년생.avi>의 주인공 혜원은 불법촬영 동영상 피해자다. 영화는 동영상이 유출된 이후 혜원이 살고 있는 일상을 따라간다. '어제 본 야동에서 여자가 예뻤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남자들이 첫 장면을 장식한다. 그들의 목소리는 영화의 러닝타임에 비하면 꽤 길게 등장한다. 다음 장면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는 혜원을 보며, 관객은 몇 가지 정보를 얻는다. 혜원은 학교를 그만뒀고, 일반적으로 취업을 준비하는 나이에 파트타임 일을 오래 하겠다고 말하며, 사장의 제안에도 고객과 대면하는 서빙이나 캐셔보다는 설거지를 하고 싶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집이 아닌 곳에서 옷을 갈아입는 걸 기피한다.

불법촬영 피해자의 모습을 하나의 유형으로 고착화해서는 안 되지만, 혜원의 일상은 그러한 방식으로 피해를 입고 있었다. 그런 혜원에게 '친구가 널 여기서 봤다더라'고 말하며 탄원서를 써달라고 찾아온, 영상 유포자이자 전 남자친구 지호는 화면 밖의 나에게도 공포스러웠다. 처음에는 꽃다발을 내밀며 혜원을 달래려던 지호는 감정이 격해지자 '너도 좋아서 했잖아'라는 말을 하고, 그 길로 집으로 간 혜원은 인터넷에 퍼져나간 자신의 영상을 본다. 혜원이 동영상을 보는 장면에서 화면은 혜원의 얼굴에 고정되고, 문제의 영상은 소리로만 등장한다. 영상 속 과거의 혜원이 연인에게 말하는 사랑해, 라는 문장이 선명하게 들린다.

영상에서 얼굴이 보이는 사람은 오직 그녀뿐이다. 정성을 다하여 사랑하는 사람을 애무하는 너무나 분명한 그녀. (...) 사랑하는 사람에게 진심으로 정성을 다하는 그녀의 얼굴만큼 내게 큰 슬픔으로 다가온 얼굴은 없었다.

김수정 변호사는 불법촬영 영상 유포 피해자의 사건을 맡았을 때, 변론을 위해 해당 영상을 보며 느꼈던 마음을 위와 같이 표현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정성껏 사랑을 표현했던 피해자의 말과 행동이 동의 없이 음지로 퍼져나가 '야한 동영상'이 되었다. 진심을 다해 사랑했던 마음과 순간들이 도려내고 싶은 끔찍한 기억이 되었다. 혜원이 일하는 식당에서 손님들이 함께 웃고 떠들며 밥을 먹고, 사랑하는 상대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고, 입가에 묻은 양념을 닦아주는 순간들을 카메라는 천천히 비춘다. 그 장면을 따라가다 보면 혜원에게도 연인을 그렇게 사랑하던 따뜻한 시절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라는 곡으로 유명한 밴드 가을방학의 작곡가 정바비가 가수 지망생이었던 연인을 불법촬영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해당 여성은 성폭행과 불법촬영을 당했다고 이야기하고 얼마 뒤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또 다른 여성도 폭행과 불법촬영 혐의로 정바비를 고소했다. 정바비는 촬영은 했지만 합의했다고 주장했으며 폭행에 대해서는 일부만 인정했고, 해당 사건을 맡았던 판사는 성범죄 피고인에게 '우리가 아는 곡도 있나', '좋은 곡 많이 만들라'는 등의 발언을 해서 비판을 받았다. 재판은 아직 진행 중이다. 가을방학의 음악을 사랑하던 팬들은 해당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 정바비와 함께 활동하며 그의 노래를 불렀던 가수 계피는 가을방학의 해체를 알리며 인스타그램에 이런 글을 썼다.

지나온 발자취를 어떤 방식으로 간직해야 하나 생각해왔습니다. (...) 누가 곡을 썼든 제가 불렀다면 저의 노래입니다. 부족한 부분도 많았지만 최선을 다해 한 인간으로서 제 경험과 감정을 담아 노래해왔기 때문입니다. (...) 마찬가지로 누가 쓰고 누가 불렀든, 노래로 위안받았던 순간의 기억은 무엇에도 침범받지 않을 오로지 여러분의 것이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랑하던 음악이 성범죄자가 만든 것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상처받은 이들에게, 계피의 글은 적확한 위로가 되었다. 그 음악을 노래했던 계피가 꾹꾹 눌러써서 보내준 메시지 덕분에,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그 음악을 사랑했던 시간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영화를 통해 혜원을 지켜보며, 나는 혜원에게도 '너의 사랑과 순간은 훼손되지 않았다'고 말해줄 수 있을지, 혹은 그런 3자의 말이 혜원에게 오히려 상처가 되진 않을지 고민했다. 감독이 '시덥잖은 위로를 하지 않으려 했다'는 것처럼 나도 함부로 말을 붙일 수 없었다.

누구도, 설령 그 순간을 함께 만들었고 그 사랑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이라도 그 순간을 훼손하지는 못한다고, 그 마음은 당신의 고유한 것이라고 쓸 수 있다면 좋겠다. 하지만 아무래도, 지호는 혜원의 사랑을 훼손했다. 연인을 믿고 사랑했던 마음이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배신당했다. 혜원은 무엇도 잘못하지 않았지만 마음 한켠에는 연인에게 신뢰와 사랑을 주었던 과거를 자기도 모르게 곱씹고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안 그런다면 가장 좋겠다.) 연인이 내어준 믿음와 사랑을 짓밟은 가해자는 느끼지 않을 모멸감을 피해자는 그 자리에 남아 그대로 느껴야 한다.

정혜원 감독은 이 영화는 사랑에 관한 영화라고 브런치에 썼다. 사랑을 폭력으로 되갚는 잔인함은, 개인적인 실패가 아니라 어쩌면 사랑의 본질일 수도 있다고. 그러니 스스로를 탓하지도 그 폭력에 지지도 말라고. 마지막 장면에서 공중화장실 변기에 앉아있던 혜원은 무언가를 유심히 바라본다. 그러고는 부순다. 자해를 할 때 썼던 그 눈썹칼로. 화장실에 붙어있던 불법 카메라가 콰지직 깨지는 소리가 화면이 꺼진 뒤에도 잠시 남는다. 자해에 사용되던 혜원의 눈썹칼이, 앞으로는 스스로를 향하지 않고 카메라 같은 거나 깨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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