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프리카는 주황색이 맛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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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26 | 조회 7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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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박사 김민지

생활 전공자를 위한 내적 대화 콘텐츠

고등학교 시절, 어느 날 나란히 하교하던 같은 반 친구가 말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말이야." 갑자기 그 말을 듣는 순간, '아 이건 아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평가에 부정적이었던 그 친구는 자주 자신을 뒤로 놓았다. 그 친구가 뒤로 물러서는 이유는 뭘까. 두려움일까. 겸손함일까. 친구가 하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듣다 보면 두려움도 겸손함도 없는 것 같았다. 두려움도 겸손함도 없는데 대체 왜 나아가지 않고 자꾸만 뒤로 물러서는 걸까. 이유는 하나로 좁혀졌다. 구겨진 자존심. 그것 때문이다.

빳빳하지도 않고 유연하지 않은 자아는 스스로 풀을 먹이거나 다림질을 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 이미 그 자체로 마음의 실루엣과 겉돌기 때문이다. 물에 젖어 자신만의 생각에 갇힌 채 털리는 날이 허다해도 세탁기에 돌리고 늦게 꺼낸 빨래처럼 무겁고 주름이 많이 져 있는 상태. 그거였다. 

경제적 여유가 많으면 건조기로, 심리적 여유가 많으면 손을 쓰고 볕이 내리는 곳을 찾아 회복할 수 있지만 두 가지가 받쳐주지 않는 때에는 덜 펴지고 덜 마른 상태로 꿉꿉한 냄새를 풍기게 된다.

외적으로 선망하는 대상이 있지만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 될 수가 없다고 여기면서 그 대상을 추종하거나 비난하는 일이 잦아질 때. 그나마 유지해왔던 줄눈 같은 자존감에 분홍색 물때가 낀다는 것을 알았다. 오묘하게 형광빛이 감도는 분홍색 물때는 부러움과 게으름, 그 간격에 발린 치크 같이 빛난다.

오래전 그 말에 발끈했던 건 나도 구겨진 자존심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부러움과 게으름을 새하얀 타일 삼아, 그것을 다시 원고지의 한 칸 한 칸으로 삼아, '우리'라는 단어를 써본다면 어떨까. 그 단어의 획은 참 신기하다. 원을 그렸다가 다시 가로세로 각자 갈 길을 가고 구불구불 길을 가다가 직선의 길을 걷는 느낌으로 완성된다. 우리가 우리라는 말을 쓸 때는 그 오묘한 노선이 동시다발적으로 함께한다. 

세월이 지나도 구겨진 자존심으로 명명하는 우리는 싫다. 스스로 부족함을 아는 건 중요하지만, 그것만큼 중요한 건 허전함으로 무례한 연대를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래서 사랑이 필요하다. 사랑은 각별해지라고 말한다. 나에게나 남에게나 '착붙'인 공동의 희망을 매력처럼 알아갈 필요가 있다고 말이다.

파프리카는 주황색이 맛있어
파프리카는 주황색이 맛있어

추신, 우리 같은 사람들은 사랑이 정말 많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랑이 고프든 모든 사랑이 잘 마른 수건이면 좋겠어요. 호텔에 놓인 40수의 수건이든 집에 놓인 20수나 30수의 수건이든 그런 건 아무렴 상관 없습니다. 각자 생활에 맞춰 빨래에 쫓기지 않을 만큼 적당한 양의 잘 마른 수건을 가지고 있다면 좋은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일 테니. 설이 코앞으로 다가왔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다음주 수요일, 연휴 마지막날 여러분 앞으로 또 한 통의 파프리카 보내겠습니다.

● 만물박사 김민지의 뉴스레터는 구독자 여러분의 긴장성 두통, 과민성 방광 및 대장 증후군 치유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언제나 좋은 텍스트로 보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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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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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ani

    1
    over 2 years 전

    '우리'라는 단어는 참 오묘한 것 같아요. 잘읽었습니닷😍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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