쫄쫄보의 유서

프롤로그: 연명

2024.07.17 | 조회 5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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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박사 김민지

생활 전공자를 위한 내적 대화 콘텐츠

온다더니 오지 않던 장마가 드디어 왔구나 했어요. 아침 내내 퍼붓듯 내리던 비가 조금씩 멎더니 저녁 무렵 하늘엔 구름만 잔뜩 끼어 있더라고요. 저도 그렇게 집에 와서 이 글을 씁니다. 눈뜨자마자 갑자기 퍼붓던 걱정도 있었고 지금은 이런저런 고민이 자욱해서 오는 길에 얇은 노트와 얇은 펜을 샀어요.

그 노트에 적힐 얇은 글씨들. 어떤 내용이 적힐지 대충 예상이 갑니다. 돈 이야기 아니면 사랑 이야기.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들의 꿈을 상상하려고요. 올해 남은 시간은 그 인물들의 대화를 받아 적을 거예요.

세상에 돈 때문에 죽은 사람이 많을까요. 사랑 때문에 죽은 사람이 많을까요. 돈 때문에 죽고 싶어도 사랑이 있으면 사람은 또 살까요. 요즘 저는 그런 게 궁금하더라고요.

4년 전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제출했어요.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싶었거든요. 그때 장기기증 신청도 같이했어요. 멈춰도 멈추지 않은 부분들. 그 부분들이 희망이 되는 건 분명 가치가 있지만, 그 희망에 가까운 사람들이 경제적 부담을 더해주고 싶지 않더라고요. 또 한편으로는 그 부분을 채우면 전체가 될 사람들이 있으니 거기에 다른 희망을 걸면 되겠다 해서요. 물론 가까운 사람들은 이런 결정에 서운할 수도 있겠어요.

어릴 때부터 한 생각이었는데 점점 더 그 결정이 지금 제게는 맞겠다는 확신이 들어요. 아무래도 제가 바라는 제 삶은 확실히 모양이 잡혀 있어서. 죽음의 기로도 제 기준대로 가늠해보지만 정말로 어떻게 죽게 될지는 감히 상상할 수 없네요.

다만 저도 주변도 여러 번 고통받지 않고 제가 단숨에 죽길 바라는 마음이 저 바닥에 있어요. 왜 오래 살 생각을 하지 않냐고 물으신다면, 그건 오래 살 생각과는 상관없는 마음이에요. 오래 살다가 단숨에 죽기 같은 소원보다는 하루라도 잘살고 단숨에 죽기 같은 소원을 비는 중입니다.

살면서 너무 큰 목표를 세울 때가 있어요. 크다는 건 멀다는 게 아닌데. 너무 먼 미래를 그릴 때가 있어서 그게 참 오묘해요. 미래가 온다는 감각 같은 게 삶에 스며있다니. 꿈처럼 살아간다는 건 어쩌면 이런 것에 가까운 게 아닐까요. 대단하고 거창한 게 아니라 오늘 같은 날처럼.

얇은 노트에 얇은 펜. 얇은 글씨지만 분명히 적고 싶은 몇 자가 있습니다. 죽고 싶은 마음으로 살라는 충고 말고 살고 싶은 마음으로 살라는 축복을 빌고 싶은 삶이 남아 있습니다.

엄마의 그림
엄마의 그림

추신, 소나무로 태어나고 싶다는 엄마의 그림과 함께 새 연재를 시작한 밤입니다. 구독자 님의 하루에 이 글이 닿을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오늘 저는 살아서 들기름 메밀면을 먹을 수 있었는데요. 구독자 님은 살아서 어떤 맛있는 음식을 드셨고, 또 어떤 기쁨이 있으셨는지 궁금하네요. 여름 장마 빗길과 감기 조심하시고 다음 주 수요일에 조금 더 생생한 쫄쫄보의 에피소드가 담긴 1화 몰고 올게요. 오늘 레터 끝에는 허회경의 노래 〈그렇게 살아가는 것〉 두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사랑 같은 말을 다시 내뱉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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