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월에 부치는 편지

2022.07.01 | 조회 8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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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박사 김민지

생활 전공자를 위한 내적 대화 콘텐츠

항상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기다리지 않는 사람에 비해 더 고통스러운가?// 무지개는 어디서 끝나나,/ 당신의 영혼에서인가 아니면 지평선에서인가?// 하늘은, 자살들을 위해서는,/ 한 보이지 않는 별일 것인가?// 유성이 거기서 떨어지는/ 그 철의 포도밭은 어디일까?

파블로 네루다, 『질문의 책』, 정현종 옮김, 문학동네, 2013, p. 91 (42번 시)

책끈이 있는 양장본 책을 읽고 덮을 때마다 고민해요. 어느 페이지에 책끈을 놓고 덮어야 다음에 잘 펼쳤다고 생각하려나. 해서 오늘은 오래 전 읽었던 시집을 펼쳤고 잘 펼쳤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때 고민하며 책끈을 놓았던 페이지에 실린 이 시를 읽고 한참 널브러져 있다가 한여름에 옷장 서랍을 열어 회색 털장갑을 찾아 끼고는 형광등이 있던 자리에 LED등을 새로 달았습니다. 36W 형광등을 빼고 기존의 안정기와 호환이 된다는 18W LED등으로 갈아끼우고 나니 방 안에서의 시간이 한결 만족스러워졌습니다. 이 간단한 걸 왜 진작 하지 않았을까요.

눈에 오는 파장도 적고 소비전력도 줄어든다는 친환경 제품이라 해도 오래 쓰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나 싶어요. 그러고 보니 언젠가부터 저는 상대적으로 긴 시간을 함께할 수 있다는 장점에 마음이 자주 이끌리더라고요. 나날이 마음의 에너지가 부족해지는 것인지. 되도록 좋은 상태를 유지하고 싶지만 그런 노력을 아끼게 되는 모순 속에서 지내게 된달까요. 

어떤 대상이나 환경과 오래 함께하려면 나부터 정리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요즘도 하던 일을 자주 멈추고, 헤매고, 혼자 있고, 미룰 수 있는 데까지 미루고 그러고 지낼 때가 많습니다. 저는 요즘 무엇을 기다릴까. 가만히 생각을 해봐도 아무 생각이 안 납니다.

그냥 딱 좋다고 느껴지는 거. 이상형을 물어봤을 때 느낌이 좋아야 한다고 대답하는 사람처럼 이런저런 조건들을 재는 건 아니지만 이래저래 무언가 좋은 것이 있어도 부담없이 소개받기는 어려운 사람이 된 것 같아요. 그만큼 겁이 많다는 것일 수도 있고, 제가 추구하는 삶의 가치들이 추상적이라 공유되기엔 아직 투박한 것일 수도 있겠어요.

아무튼 제가 오랜 세월 기다리지 못하고 새로움을 탐한 시간만 줄여도 고통을 정통으로 받아들이고 지금보다는 깊이 있게 살았을 거란 후회는 돼요. 그래서 요즘은 귀찮아서 그대로 두고 있는 것과 소중해서 먼지 한 번 더 털어내고 그대로 두는 것을 분별하고 지내려고 노력해요.

"항상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기다리지 않는 사람에 비해 더 고통스러운가?" 잘 모르겠습니다. 대신 오늘은 질문을 다시 해보려고요. 어떤 것을 기다리며 겪는 고통인가? 고통의 크기에 따라 기다림이 계속되고 일단락되는 거라면 수동적인 삶을 살고 있는 거 아닌가? 단순히 좋은 것을 기다리고 있다면 삶이 그저 삶을 지망하는 척 머물러 있는 거 아닌가? 


추신,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만물박사 김민지입니다. 새로운 글 들고 오겠다면서 주황색 파프리카 놓고 어디로 사라진 건가 싶으셨던 분들이 계시다면 죄송하다는 인사 전하고 싶어요. 사죄의 의미로 능동적인 삶을 살고 싶게 만드는 호시노 겐의 노래를 이 글 끝에 둡니다. 뮤직비디오마저 생생함이 흘러넘쳐요. 모든 가사가 좋지만 "영원을 찾아볼까. 할 수 있는 만큼 살아가볼까.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대와 이야기하고 싶었어." 말하는 대목이 사랑스럽게 느껴져서 함께 들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그 사이 몇 가지 공유할 소식이 생겼는데요. 내년 상반기에 에세이 출간을 목적으로 출판사와 계약을 하게 되었습니다. 책 완성까지 갈 길이 멀지만 만물박사 김민지만의 위트와 느낌을 담아 성실하게 원고를 완성하겠습니다. 끝으로 오는 8월에 발행되는 격월간 문학잡지 '릿터' 37호에 신작시 두 편을 발표하게 되었어요. 어제 빗소리와 함께 마감한 시들을 보내고 하반기부터는 어떤 시작을 할 수 있을지 두서없는 메모를 해두었습니다. 한동안 장마와 땡볕의 나날을 보내게 될 텐데 무기력에 치여 늘어지겠다 싶으면 세수 한 번 하고 메일링 서비스 이어가겠습니다.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음 편안한 밤 보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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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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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록이아닌연두

    1
    almost 2 years 전

    시인님 축하드려요! 에세이 얼른 읽고 싶어요..🫶🏼

    ㄴ 답글 (1)
  • 오월

    1
    almost 2 years 전

    비공개 댓글 입니다. (메일러와 댓글을 남긴이만 볼 수 있어요)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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