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언젠가 만약에- PD라는 직업을 지속할 수 없게 되고, 더 이상 하고 싶은 일도 남아있지 않을 때에는 무엇으로 밥벌이를 할지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꽤 잘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일 한 가지가 떠올랐거든요. 자소서 컨설팅.
1 자소서 컨설팅이 이뤄지는 풍경은 하나의 고고학 발굴 현장을 닮아 있습니다. 먼저 내담자의 이야기를 1시간 정도 찬찬히 묻고 듣습니다. 과거 속에서 그 사람의 고유한 키워드들을 찾고, 조각조각 배열해서 최선의 서사를 만들고, 비어있는 곳은 약간의 MSG와 상상력을 첨가해서 메웁니다. 최종적으로 글을 읽었을 때 내담자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져야 완성입니다. 그렇게 친구들의 대입 자소서부터, 취업 자소서, 대학원 자소서, 유학 연구계획서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한 자소서를 읽어온 지도 10년이 넘었습니다. 만약 자소서가 문학 장르라면 신춘문예 입선 정도는 무난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요.
2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깨달은 건, 자소서 컨설팅의 본질이 '정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보다 중요한 일은 내담자에게 '나는 생각보다 괜찮은 장점과 서사를 가진 사람'이라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것이었죠. 여러 현실적인 이유로 제가 제안한 방향을 기각하게 되더라도(저는 항상 과격하고 대담한 방향을 권했습니다) 친구들은 하나같이 깊이 고마워하며 돌아가곤 했습니다. 물론 컨설팅비가 아메리카노 한 잔이라서 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요.
3 그런데 위의 내용을 뒤집어보면 조금 슬픈 이야기가 됩니다. 자소서처럼 특수한 상황이 아니고서는 평소에 스스로의 장점과 서사를 생각해볼 기회가 없다는 뜻도 되니까요. 학생이 아닌 직장인이나 자영업자의 경우에도 대부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타인에게 평가받을 때 스스로를 부풀리는 일에는 익숙하지만, 타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자기자신에게는 관찰의 기회조차 쉽게 주지 않습니다.
4 저 역시 그랬습니다. 남의 자소서를 읽을 때는 실컷 아는 척을 해댔으면서, 막상 제 장점에 대해 마지막으로 생각해본 순간은 언제인지 희미합니다. 그러니 기용님이 1부에서 본인의 회고 질문을 공유해주셨을 때, 저는 기용님의 다른 많은 멘티들처럼 헉- 하고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5 아직 기용님과의 [사고실험]을 보지 못한 분들을 위해서, 다시 한번 기용님의 회고 질문을 적어두겠습니다 :
- 나의 장점은 무엇인가? 그 장점이 지금 상황에서도 여전히 장점인가?
- 내가 가진 과거의 상처는 무엇인가? 그 상처가 지금 내 커리어의 발목을 붙잡고 있진 않은가?
6 이제 딱 30초만, 위의 질문에 대한 스스로의 답변을 생각해봐주세요.
7 생각을 마치셨나요? 그러면 제가 가진 상처에 대해 먼저 털어놓도록 하겠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 주제에 대해 쓰기로 결심하면서 어떤 상처를 공개하는 게 좋을지 고민했습니다. 어차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테니 적당히 얕은 걸 골라서 쓰려고 했죠. 하지만 곧이어 약간의 자의식 과잉이 발동했습니다. 먼저 제가 솔직해져야만 읽는 분들도 스스로에게 솔직해질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저의 가장 깊은 상처를 꺼내보기로 했습니다.
8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당시에 저는 한 가지 일을 하고 있었는데, 사실 처음부터 그 일은 받는 돈만큼의 값어치를 하지 못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돈을 지불하던 쪽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죠. 시작은 착오였지만, 겁이 났던 저는 그 사실을 감추기로 했습니다. 그때부터 착오는 거짓말이 되었고요. 아시다시피 거짓말은 시간이 지날수록 무게가 더욱 가중됩니다. 그만큼 바로잡을 용기를 내는 일은 더 어려워지죠. 그 사실을 숨기고 살던 몇 달은 지옥 같았고, 모든 게 들통나버리는 악몽을 꾸기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끝내 진실을 얘기하지 못한 채 일을 마쳤습니다.
9 그때부터 저는 '돈값을 못하는 것'을 끔찍한 범죄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상대에게서 조금이라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기색이 비칠 때면 과거의 망령이 기어나와 목을 조르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선택한 방법은 항상 제가 하는 일의 가치를 약간 낮춰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회사든, 지인이든, 클라이언트든지 간에요. 40만 원짜리 일을 100만 원짜리처럼 했고, 1000만 원 규모의 프로젝트는 2000만 원의 값어치를 해야만 마음이 편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종종 몸이 상하기도 했지만 죄책감의 무게에 깔리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습니다. 어쩌면 지금까지도, 저는 여전히 과거의 잘못을 속죄하는 중이라고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10 여기까지가 저의 상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분명 뻔뻔한 자랑으로 시작했던 글인데, 어느새 우울한 얘기를 해버렸네요. 그래도 마음이 조금이라도 닿았다면 좋을 텐데요. 아마 이 글을 읽고 계신 분께서도 이런 장점을, 상처를 하나쯤 간직하고 계실 테지요. 궁금해지는 밤입니다.
11 만약 스스로에 대한 더 깊은 고민을 이어가고 싶으시다면, 기용님과의 [사고실험] 1, 2부 영상을 꼭 시청하시길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아니, 고민이 없더라도 한번쯤 보시면 좋을 거예요. 본인이 81세가 되었을 때 세상의 모습을 궁금해하며, 한참 어린 진행자에게 서슴없이 존경한다는 말을 꺼내는, 청년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장년 신사의 조언을 들을 기회는 그리 흔하지 않답니다.
의견을 남겨주세요
서영
비공개 댓글 입니다. (메일러와 댓글을 남긴이만 볼 수 있어요)
의견을 남겨주세요
짱구는목말러
비공개 댓글 입니다. (메일러와 댓글을 남긴이만 볼 수 있어요)
의견을 남겨주세요
돌돌이
뉴스레터 구독 신청을 하고 처음 받은 뉴스레터에 들어가 이것 저것 살펴보다가 이 뉴스레터를 보게 되었습니다. 글을 읽으며 이런 질문과 내용을 끌어낸 인터뷰가 어떤가 싶어서 사고실험 영상도 보게 되었습니다. 책을 읽을 때 노트에 내용을 정리하면서 읽는데, 한기용 님의 인터뷰 영상을 보면서 처음으로 내용을 정리하며 영상을 보게 되었네요. 정리의 끝에 마음에 남는 생각은 "시간이 흩어지는 영상을 보는 시간은 줄여야겠다는 것과 앞으로 영상을 보면서도 내용을 노트에 정리해야겠다는 것"입니다. 최성운 PD님, 참 고맙습니다.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