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운의 꿈

그리고 이집트 고고학자 곽민수

2024.04.26 | 조회 1.48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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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최성운

최성운의 사고실험

계속 질문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잘 지내셨나요? 너무 일차원적인 제목에 놀라지는 않으셨나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동안 레터에서 제 개인사를 어디까지 오픈해도 되는지에 대해 고민이 많았습니다. 별로 궁금하지 않은 분들도 계실 테고, 더 적절한 장소나 타이밍이 있을 것 같았거든요.

지난주 [사고실험] 발행을 한 차례 쉬면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발행을 건너뛴 건 섭외 스케줄이 꼬인 이슈 때문이었지만, 최근 마음이 좀 힘든 시기를 보내던 김에 이틀 휴가를 써버렸는데요. 문득 저를 위해서 이 글을 남겨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사고실험] 곽민수님 에피소드를 시청하시고 나면 이 인간이 왜 이런 글을 쓰는지 약간은 이해가 되실 것 같습니다. 길이가 꽤 됩니다만, 심각한 내용은 아니니까 가볍게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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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8월, 저는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몇 년 동안 떨쳐낼 수 없었던 질문의 답을 얻기 위해서, 그러니까 저에게 정말 영화감독이 될 자질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1  저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습니다. 일찍부터 IT에 관심이 많아서, 21살에는 1년을 통으로 휴학하고 스타트업에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2014년 당시는 모바일이 세상을 본격적으로 집어삼키던 시기였고, 하루하루 치열한 전쟁터의 중심에 선 기분이 짜릿했습니다. 외부 미팅에서 "나이가 몇 살이세요?" 같은 무례한 질문을 듣는 일조차 훈장처럼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아마 그대로 대학생활을 이어갔더라면 지금쯤 어딘가의 전략기획 부서에서 일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2  하지만 저에게는 IT보다 더 좋아하는 짝사랑이 있었는데, 이름은 영화라고 했습니다.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처음 싹텄던 건 2012년의 고등학교 기숙사에서였습니다. 저와 룸메이트는 몰래 노트북을 반입해서 밤새 영화를 보는 게 일상이었고, 도파민에 목마른 고3들답게 '충격적인 반전 스릴러'라는 수식어가 붙은 영화들에 꽂혀 있었습니다. 유주얼 서스펙트, 메멘토, 파이트 클럽··· 그러다 하루는 유명하다는 한국영화 하나를 골라서 틀었습니다. 15년 동안 독방에 갇혀 군만두만 먹던 남자가 주인공인 이야기였습니다.

3  그 영화는 음, 어딘가 '이상했습니다'. 분명 충격적인 반전도 맞고 스릴러도 맞는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이전과 다르게 신비롭고 슬픈 감정이 들었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기상점호에 맞춰 잠을 청하는데 두근거리는 심장이 좀처럼 멈추질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박찬욱이라는 이름을,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을 기억해두기로 했습니다.

4  영화감독의 꿈을 명시적으로 타인에게 얘기하는 데까지는 2년이 걸렸습니다. 제 주변에는 영화는 고사하고 예술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섣불리 입 밖으로 냈다가 비웃음을 살까봐 두려웠습니다. 2014년 북촌의 한 카페에서 빅브라더의 감시를 피하듯 비밀스럽게 친구에게 말을 꺼냈습니다. 나는 언젠가 극장에 내가 만든 영화를 걸고 싶어. 그걸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과 함께 울고 싶어. 마음속에서 지극히 불온해보였던 상상은 현실로 나오자 훨씬 온순하게 보였습니다. 여전히 영화감독이 되는 방법은 하나도 몰랐으면서, 왠지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5  그 뒤로도 5년 동안 저는 영화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2015년에는 나라의 부름을 받아 의무경찰로 입대했습니다. 2016년은 혼란스러운 시기였습니다. 분노한 사람들이 광장에 모이고 대통령이 탄핵되던 풍경 한가운데 제가 서 있었습니다. 지금 느끼는 감정을 기록하는 것 외에는 버텨낼 방법이 없어서 수필과 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2017년에는 전역을 했고, 동아리에서 연극 하나를 연출했습니다. 2018년에는 그때까지 쓴 글을 모아 <필름 자르는 연습>이라는 괴상한 이름의 수필집을 독립출판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300권을 팔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이름 없는 창작자 지망생이었습니다. 

6  돌이켜보면 그때는 누군가가 저에게 재능이 있다고 얘기해주길 바랐던 것 같습니다. 너 정도면 창작을 직업으로 삼아도 된다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라고 격려해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나타나길 간절히 빌었습니다. 도착하지 않는 계시를 기다리며 홀로 악에 받쳐 살았습니다. 고시촌 원룸 월세를 낼 수 있을 정도로만 일을 하고 남는 시간에는 온종일 카페베네 구석에서 글을 썼습니다. 예술은 궁핍함 속에서만 피어나지 않는다는 걸,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는 재능을 타인이 먼저 알아봐주는 일은 없다는 걸 그때는 몰랐습니다.

7  2019년이 되어 졸업이 가시권에 들어오자 저는 외면해왔던 현실과 마주했습니다. 매일같이 아메리카노와 편의점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는 동안, 사실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성공하고 싶었습니다. 가진 것 없이 서울에 올라왔지만 돈을 벌어서 번듯한 집을 사고 싶었습니다. 평생 굶주림을 참으면서 아무도 봐주지 않는 작품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이제는 일다운 일을 할 때라고, 창작자 흉내는 그만두자고 생각했을 때 마지막 목소리가 저를 붙잡았습니다. 딱 한 번만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 어차피 내 재능의 깊이가 정해져 있다면 우물의 바닥까지는 만져보고 나서 포기하고 싶다.

8  그해 8월, 저는 보스턴 대학교로 교환학생을 떠났습니다. 아직까지도 제가 인생에서 내린 가장 사치스러운 결정입니다. 보스턴 대학교에는 전미 20위권 안에 드는 영화과가 있다고 했습니다. 경영대에서 보내준 프로그램이었지만 행정실의 눈을 피해 시간표를 전부 영화과 수업으로 채웠습니다. 연기 수업 하나, 시나리오 수업 하나, 영화 제작 수업 하나. 미국행 비행기 안에서 굳게 다짐했습니다. 이건 나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다. 만약 내가 천재가 아니라면, 최소한 리틀 봉준호 정도의 재능이 있는 게 아니라면 두 번 다시는 영화감독의 꿈을 꾸지 않겠다.

9  미국에서의 첫 한 달은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아무리 떠들어도 죄가 되지 않았습니다. 교실 안의 모두가 같은 꿈을 가졌다는 사실에 감격하던 것도 잠시, 허니문 기간이 끝나자마자 저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쳤습니다. 발목을 잡은 건 영어였습니다.

10  시나리오 수업에서는 매주 두 명이 쓴 대본을 읽고 크리틱을 했습니다. 수강생들은 수업 전에 자기 대본의 배역을 낭독해줄 다른 수강생들을 지정해야 했습니다. 한 학기 동안 누구도 한국인 교환학생에게 대본 낭독을 맡기지 않았습니다. 그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제 대본을 읽던 날 발생했습니다. 문법 오류와 비문투성이 대사들을 읽으며 실시간으로 찡그려지는 열한 개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이어서 크리틱을 진행했지만 아무도 대본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극도의 수치심 속에서 수업이 끝났습니다. 위로랍시고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게 네 탓은 아니니까"라는 말을 건네는 수강생에게 욕을 퍼붓고 싶은 걸 참으며 교실 문을 나섰습니다.

11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었습니다. 부족한 영작 실력은 표면적인 문제일 뿐, 진짜 이유는 제 대본이 끔찍하게 재미없고 난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며칠 뒤부터 학교에 나가는 걸 그만두었습니다. 더 이상 무언가를 생산했다가는 저의 재능 부족이 바꿀 수 없는 현실이 될 것 같았습니다. 보스턴의 가을은 춥고 쓸쓸했습니다. 서머타임이 끝나자 오후 4시면 해가 졌습니다. 말수가 줄어들어 식당 배식원을 제외한 아무와도 대화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게 버림받아 미쳐버린 코미디언이 주인공인 영화가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들로부터 도망친 사이 열흘 넘게 시간이 흘렀습니다.

12  그 어둡고 긴 터널을 기어서 통과할 수 있었던 건 수많은 우연과 호의가 겹쳐진 덕분이었습니다. 어느 날 방에서 다르덴 형제의 <자전거 탄 소년>을 보지 않았더라면, 무심코 전화를 걸었던 친구에게 비슷한 고통을 겪은 경험이 없었더라면, 무단결석 중이던 연기 수업의 교수님이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알려달라는 메일을 3번째로 보내지 않았더라면, 결코 혼자서는 터널을 빠져나오지 못했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13  다시 학교로 돌아갔을 때는 한 학기가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제 마지막 기회도 마지막을 남겨두고 있었습니다. 영화 제작 수업의 최종과제는 6분 이내의 단편영화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단, 영상 언어로만 이야기를 전달한다는 차원에서 대사는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머릿속에 한 가지 이미지가 떠올랐습니다. 어두운 터널 같은 승강장 맞은편에 두 사람이 서 있다. 열차 진입 신호가 들리자 한 사람이 선로에 뛰어들려고 한다. 반대편의 사람이 대사 없이 그 사람을 멈추게 만들 방법은... 춤. 춤을 추자. 낯선 타인의 작은 호의가 사람을 살리는 이야기를 해보자. 

14  주변을 수소문해서 발레를 공부했던 학생을 찾아냈습니다. 선로에 뛰어들려는 역할에는 연기 수업에서 눈여겨봤던 학생을 캐스팅했습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가능한 일정은 딱 하루 저녁이 있었습니다. 처음 만난 둘을 데리고 무작정 지하철역으로 가서, 카메라와 삼각대를 메고 사방으로 뛰어다녔습니다. 초반에 눈총을 주던 역무원은 2시간 뒤에는 관대하게 손을 흔들며 배웅해주었습니다. 과정이야 어떠했든 결국 무언가를 찍어낸 제 자신이 자랑스러웠습니다. 

15  최종과제 제출 당일, 편집을 마친 4분 37초 길이의 영화를 처음부터 보았습니다. 그건 영화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민망한 - 누더기였습니다. 맥락 없이 조각난 숏들을 억지로 이어붙인 누더기. 눈을 씻고 봐도 재능의 편린조차 발견할 수 없는 화면 속에서 선명한 진실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저는 천재가 아니었습니다. 리틀 봉준호가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이 길을 선택한다고 할 때 금전적으로 성공을 거둘 가능성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16  하지만 다음번에는 조금 더 잘할 수 있을 테니까, 한 번 더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17  빠르게 4년이 흘렀습니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팬데믹이 터졌고, 실시간으로 극장 산업이 붕괴되는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저는 무명의 영화감독 대신 즐겨보던 유튜브 채널의 신입 PD가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했고, 더 많은 밤들을 편집으로 지새웠고, 외부 미팅에서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법도 익혔습니다. 더 이상 반전 스릴러 영화는 찾아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조회수 그래프가 주는 도파민에 더 익숙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원전 27세기의 문명을 연구하는 한 고고학자가 촬영장에 도착했습니다.

18  고고학자가 연구하는 학문은 한국에 전공자가 거의 없는 비주류 학문입니다. 그는 학계의 변방에 있는 자신이 세계적인 학자가 될 가능성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목표가 줄어드는 건 슬픈 일이 아니라고, 그마저도 죽을 때까지 학자로 살고 싶다는 가장 본질적인 꿈을 지켜내기 위한 노력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훗날 자신의 연구를 후원해줄 시민들을 모으기 위해 매일같이 분투하는 중입니다. PD님이 성공하시는 게 저를 돕는 일이라고, 굵은 저음으로 웃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세상의 무관심을 탓하는 대신 자신의 꿈을 위한 제단을 직접 쌓아올리는 사람이 눈앞에 있습니다. 

19  웃는 눈동자 속에서 저는 잊고 있던 한 사람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한 고등학생이 새벽의 이층 침대에 누워 몸을 떨고 있습니다. 고등학생은 자신을 가득 채운 신비로운 감정을 재현해내고 싶어합니다. 자신에게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채로.

20  촬영을 마치고 고고학자를 배웅합니다. 멀어지는 그의 퇴근길을 상상해봅니다. 오늘도 그는 버스 창문에 기대어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할지도 모릅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이 항상 행복할 거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때로는 그 일을 하기 위해 치렀던 대가가 더 크게 생각나는 날이 있을 겁니다. 언젠가 자신이 왜 그 일을 선택했는지 잊어버리는 순간이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후회와 망각까지도 그의 것입니다. '누가 칼 들고 협박함?'이라며 비웃는 사람들은 그에게서 후회할 권리를 빼앗을 수 없습니다. 그건 꿈을 위해 다른 무언가를 포기해본 사람만의 권리이기 때문입니다. 

21  촬영하는 동안 꺼놓았던 휴대폰을 다시 켭니다. 그저께 보낸 섭외 메일은 여전히 '읽지 않음' 상태입니다. 어제 올린 영상은 조회수가 지난주보다 더 줄었습니다. 고고학자의 눈동자에서 본 고등학생의 모습을 다시 떠올립니다. 저는 그의 미래를 알고 있습니다. 고등학생은 자라서 밤샘으로 눈이 시뻘개진 대학생이 됩니다. 대학생은 자신에게 충분한 재능이 없다는 걸 깨닫습니다. 하지만 성공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더 나아지고 싶어서 창작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대학생은 자라서 조회수에 일희일비하는 PD가 됩니다. 쉽게 기뻐하고 금방 낙심하는 그 PD가 자라서 무엇이 될지는 모르지만, 저는 그가 계속해서 꿈을 내려놓지 않기를 바랍니다.

22  언젠가 제 영화를 만들게 되면, 관객이 되어주실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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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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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혜

    0
    10 days 전

    비공개 댓글 입니다. (메일러와 댓글을 남긴이만 볼 수 있어요)

    ㄴ 답글
  • Jamie

    0
    10 days 전

    정말 시간가는줄 모르고 스킵하나 하지않고 글자 하나하나 다 읽었습니다..성운님의 꿈을 늘 응원한다는 사실 잊지마세요! 포기하지 마세요! 화이팅

    ㄴ 답글
  • 햇빛

    1
    9 days 전

    토요일밤 편한 마음으로 읽어내려가다가 어느순간부터 숨도 못쉴만큼 집중하며 성운님의 이야기에 빠져들었습니다 굳이 이곳까지와서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기는 이유는 뭉클한 감동을 느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아주 오랜만에 친구가해주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기분입니다 함께 경험하는것 같고 또다른 뒷이야기도 궁금합니다 무엇보다 진심으로 응원하게 됩니다 화이팅입니다!

    ㄴ 답글
  • Eileen

    0
    8 days 전

    정말 흡입력있는 글이네요. 솔직한 경험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흡입력 인 것 같습니다. 가장 본질적인 꿈을 지켜내고자 하는 노력 계속 해주셨으면 합니다.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성운님의 영화가 기다려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해주셨으면 해요. 응원하겠습니다!

    ㄴ 답글
  • 율하

    0
    8 days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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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답글
  • hyo

    0
    8 days 전

    비공개 댓글 입니다. (메일러와 댓글을 남긴이만 볼 수 있어요)

    ㄴ 답글
  • 서영

    0
    6 days 전

    비공개 댓글 입니다. (메일러와 댓글을 남긴이만 볼 수 있어요)

    ㄴ 답글 (1)
  • bafekmo

    0
    5 days 전

    지인의 추천으로 최성운님의 사고실험 영상을 보며 팬이 되었습니다. 인터뷰 내용정리와 질문및 진행을 어찌나 잘하시는지 보는 영상마다 감탄을 하게됩니다. 영화감독이 될 기회는 아직도 무궁무진해요. 아직 젊으시니 지금의 이 경험들을 차곡차곡 쌓아 인생작을 만드실거라 믿어의심치않습니다. 천천히 가더라도 방향만 맞으면 언젠간 원하는 길을 갈수있어요. 쉬었다가면 어떻고 돌아가면 어때요. 그래서 삶이 재밌는거잖아요. 늘 응원합니다! 좋은영상 만들어주셔서 감사해요.

    ㄴ 답글

© 2024 최성운의 사고실험

계속 질문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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