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과 끝

도쿄 세간 살이 하나

2022.11.07 | 조회 1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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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세간살이

어쩌다 도쿄에서 사는 사람이 마주친 일상 풍경

- 이 편지는 매주 월요일에 당신의 메일함으로 배달됩니다. 

- 독자를 '읽는 당신'으로 지칭합니다.  

 

처음이라는 단어로 편지를 엽니다.

오늘은 11월 7일. 처음을 이야기하기엔 좀 멀리 와있네요. 가을은 처음이라는 단어와 가장 안 어울리는 계절인 것 같아요. 가을이 겨울보다 더 끝이라는 단어와 잘 어울린다고 느끼는 건 저뿐일까요. 신기합니다. 이 끝의 계절에 읽는 당신께 첫 편지를 쓰다니요. 

저는 2019년 여름, 도쿄에 왔어요. 처음이었지요.

그때 저는요. 제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처럼 느껴지곤 했습니다. 새로운 도시에 대한 기대감도 들뜬 마음도 없었습니다. 모든 게 불안하기만 했어요. 그 중에서도 가장 불안한 건 제 미래였습니다. 뭘 제대로 해본 적도 없으면서. 스스로 부끄럽고 눈물만 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외국에 살러 간다고요? 용감무쌍하게 새로운 도전을 한 게 아니라요? 그렇게 물으시려나요.

네 그렇습니다. 저는 도망치듯 일본을 온거였어요. 그즈음 저는 단어 그대로 늪에 빠져있었어요. 늪의 사전적 정의가 뭔지 아시는지요. 땅바닥이 우묵하게 뭉떵 빠지고 물이 괴어 있는 곳. 제 마음이 꼭 그랬습니다. 음푹 패인 마음에 끈적한 물이 끝도 없이 차올랐어요. 경험을 한껏 부풀려 자기소개서를 쓸 때. 그런 자기소개서가 영락없이 불합격을 가져다줄 때. 면접에서 헛소리만 늘어놓고 나올 때. 조금씩 수심이 깊어졌지요. 

그렇다고 목숨 걸고 취업을 해보겠다는 열정이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어렴풋이 알았던 거에요. 이런 마음으로 한국에서 살면 매번 미끄러지기만 하겠다고. 미끄러지고 미끄러져서 결국에 스스로 내치고 말겠다고요. 

그렇게 도쿄에 왔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이 곳이요. 아무 것도 없으니 움직여야 했어요. 저에겐 명분이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예 처음부터 시작할 명분이요. 낯선 환경은 분명 불안했지만 그래서 더 격렬하게 움직여야 했습니다. 그런 억지스런 움직임이 저에게 조금씩 숨을 불어넣었던 것 같아요. 살아있어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움직이니까 살아지는 거. 그게 참 맞는 말이었어요.

어떤 고통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사람은 고통의 기억을 회고할 수 없지요. 마음이 아려오는 그 시절을 저는 요즘 자주 생각합니다. 그러면 얼마간 '그 시절로부터 멀리도 걸어왔구나' 하는 걸 실감하게 돼요. 이렇게 툭 처음을 꺼내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니! 글을 쓰며생각합니다. 저의 처음 도쿄는 불안이고 고통이고 외로움이었어요. 처음의 저는 처음이 계속 될까봐 무서웠지만 끝의 저는 처음은 어디까지나 처음일 뿐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혹시 읽는 당신이 그런 처음을 건너가고 있다면 하나 알아두시면 좋겠습니다. 처음은 어디까지나 처음일 뿐이라는 사실을요. 처음이 향해가는 끝에 서면 당신이 겪는 처음이 어떤 걸음을 걸어 이 곳에 왔는지 어렴풋이 보일 거라는 걸요. 여기 끝도 다른 끝을 향한 처음의 연장선이라는 사실을요. 

제 첫 편지도 그러하겠지요. 끝이 어떨지 저는 잘 모르지만 읽는 당신과 함께 그 지점에 서 있으면 좋겠습니다. 

제 처음을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여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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