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n John’s disciples came and asked him, “How is it that we and the Pharisees fast often, but your disciples do not fast?” Jesus answered, “How can the guests of the bridegroom mourn while he is with them? The time will come when the bridegroom will be taken from them; then they will fast. “No one sews a patch of unshrunk cloth on an old garment, for the patch will pull away from the garment, making the tear worse. Neither do people pour new wine into old wineskins. If they do, the skins will burst; the wine will run out and the wineskins will be ruined. No, they pour new wine into new wineskins, and both are preserved.””
(마 9:14-17)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사람들에게 금식은 권장을 넘어서 의무로 여겨졌다. 하나님에게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는 방식이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새인들처럼 믿음 생활에 앞선 이들이 이에 특히 충실했다. 그래서 그들은 왜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신랑이 있는 동안에는 슬퍼할 수 없다고, 슬퍼하는 건 신랑을 뺏긴 이후에나 하는 거라고 말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있는 동안에는 기뻐하고 누릴 것을 원하셨다. 그리고 금식은 슬퍼할 동안에 하는 것이라는 뉘앙스로 말하셨다. 그 슬픔의 이유는 신랑이신 예수님과의 단절 때문 일것이다.
뒤이어 새 술과 새 부대 얘기를 하신다. 새 술을 헌 부대에 부으면 술을 망칠 뿐 아니라 부대도 터져버린다고 말씀하신다. 즉, 이전까지의 믿음, 하나님과 죄로 인해 단절 되어 슬퍼하고 갈망하는 상태에서의 믿음으로는 생생하게 살아계신 예수님을 감당할 수 없다는 말로 받아들였다. 헌 부대인 내 자신과 자아를 버리고 오직 예수님께서 주신 새 사람이어야지만, 예수님과 친밀한 교제를 감당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그게 아니고서야 예수님 부활 전 제자들처럼 배신의 길로 들어서고 결국엔 죄책감과 수치, 썩은 자신을 향한 분노로 부숴져버리고 마는 것 같다.
현대의 많은 신앙인들의 모습도 이와 같다. 예수님을 경험하지만, 또 그와는 반대되는 모습이 자신 안에 나타나면서 미움과 좌절이 쌓이는 모습이 그와 같다. 오직 새 부대만 새 술을 담을 수 있다. 우리의 옛 자아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이미 죽었다는 것을 믿고서야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다. 예수님과 친밀한 교제는 그때 비로소 시작된다.
거저 주신 새 부대 안에 새 술을 담아 누리는 축복을 모두가 누리길 원한다. 낡아진 헌 부대를 버리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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