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뒤적뒤적 : 문방구

2022.11.16 | 조회 2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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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의 주석

말보다 글이 유창한 인간의 주절주절

 

우리 엄마 ‘이여사’는 문방구를 이렇게 추억했다. 이끼가 준비물이라길래 나무에 핀 이끼를 긁어모아다가 보냈더니 선생님이 빠꾸를 먹였댔다. 이끼가 이끼지 별 건가 싶어서 문방구에 갔더니 진짜 별거였다. 천연한 초록색에 촉촉한 것이 정말 산에서 갓 따온 것 같았댔다. 비교하려고 들고 간 진짜 산에서 구한 이끼는 칙칙하고 건조하고... 다음날 이끼 500원어치는 어린 나의 손에 들려 5분 정도 조물대다가 버려졌겠지?

 

학기 초에 학교에서 제공되는 학습준비물이 가정통신문으로 배부되기 전, 문방구는 준비물의 요람이었다. 그뿐이었겠는가 눈이 돌아가게 멋진 학용품, 침을 질질 흘리게 만드는 불량식품과 고운 자태의 카드 그리고 딱지들까지! 13세 이하 인간들의 스몰럭셔리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반듯하게 정렬되어 있는 새것들을 손으로 살살 만져가며 가지고 싶은 욕망을 품는 곳, 아아 그곳은 바로 문방구!

 

물성과 양품에 대한 인지도 문방구에서 처음 트였다. 예를 들면 유성과 수성을 볼펜으로 구별하였고 샤프심이 약한지, 강한지를 제조사로 아는 일 말이다. 당연한 결괏값으로 친구 생일 선물도 문방구에서 골랐다. 내가 갖고 싶은 걸 친구도 갖고 싶어 하던 시대였으니까. 가장 좋은 물건은 그곳에 있었으니까. 생일 선물로 게임 아이템이나 주식을 달라고 하는 요즘 아이들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어린이만의 쿨함이 있던 시대였다.

 

서울에서 세 번째로 큰 초등학교에 다녔던 나는 어디에나 정문 앞에 문방구가 세 개쯤은 있는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하면 맥세권 더하기 스세권 더하기 붕세권 정도일지 모르겠다. 문방구 사장님들이 수요 조사 하고 장사 피셨겠지만, 아침이면 발 디딜틈 없이 채운 아이들이 뭐 달라 뭐 달라 아우성을 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준비물을 못 챙겨도 우연히 친구 따라갔다가 간신히 챙기는 운수 좋은 날도 있었다.

 

문방구 앞에는 쥐포를 구워 먹는 간이 화로가 있었고 계절에 따라 슬러쉬나 군고구마를 팔았다. 목캔디 통은 동전 통으로 변해 아무렇게나 퍼질러 놓아도 아무도 가져가지 않았다. 문방구 아저씨는 퉁명스럽지만 친절했고, 돈이 적으면 적당히 에누리 해주기도 했다. 평상에 앉아 수다 중인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뉘 집 자식인지 몰라도 예쁘다 예쁘다 해주셨고, 그 말이 얼마나 고마운지는 이제야 알 것 같다. 문방구는 놀이터만큼이나 동네에서 아이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었다.

 

요즘엔 무인으로 운영되는 문방구가 많다 보니 (팬시점에 가깝지만) 사람 대신 키오스크에 값을 치른다. 키오스크 설치와 구성이 업체마다 자유로워 아이들의 키오스크 사용은 더욱 자유분방해졌고, 결국 구매 포기나 절도에 이르는 사례도 왕왕 보인다. 문방구에 어른이 없다는 건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2030년쯤 영화 ‘우리들’이 리메이크 된다면 문방구 아저씨 몰래 색연필을 훔치는 장면이 CCTV 몰래로 대체될지도 모를 일이다.

 

근무하는 학교에선 올해부터 학습준비물을 쿠팡과 지마켓에서 일괄 구매하기 시작했다. 문방구에서 쌤들 따라다니면서 꿀템 따라 사던 날들도 끝났다 생각하니 어쩐지 서운해졌다. 새롭고 어여쁜 물건을 만져보며 하나 둘 고르는 재미, 오는 길에 같이 먹는 간식들, 교실에 물건을 다시 풀어놓고 위치를 잡는 일들… CJ와 우체국에서 열일해주심으로 얻는 편리 저편, 문방구… 문방구…하고 시간을 뒤적여본다.

 

글을 쓰며 들은 노래 / 잔나비 - 돌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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