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이 되어줘

2022.11.27 | 조회 3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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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의 주석

말보다 글이 유창한 인간의 주절주절

 

‘올해로 8회째를 맞는 세이브더칠드런 아동권리영화제에 참석하여 큰 감화를 받았고 어쩌구 저쩌구’로 시작하려고 했는데 그러면 너무 영화에 조예가 깊은 척하는 것 같아서 다음과 같이 수정한다. 어제는 ‘인생은 아름다워’를 보다가 염정아 누나 열연에 대성통곡하는 바람에 오늘 눈두덩이가 마카롱이 되어버렸다. 이 지점에서 생기는 의문. 당최 나의 영화 취향이란 무엇인가? 명절 마지막 밤 10시 JTBC에서 방영할 것 같은 클리셰 범벅 영화도 좋고 씨네큐브에서 틀어주는 반만 알아먹는 영화도 좋다. 중간 어디 즈음이 아니라 양극단의 것을 애호하는 걸까? 뭐 아무튼 ‘운 좋게 영화제에 다녀왔다.’로 타협하자.

 

단편영화 세 편을 감상한 뒤 이어서 GV까지 참여한 대중으로서, 자랑하고 싶은 아이의 마음을 담은 ‘벌레’, 보호받지 못하는 아이들의 불면증을 다룬 ‘야행성’, 취업 청소년들의 위기를 다룬 ‘겨울매미’ 순서로 가볍게 다가왔다. 영화의 질에 기인한 순서가 아니고, 인간에게 주어지는 고통이 궁극적인 쾌락을 제공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가치의 차례도 아니다. 그저 영화를 교실 수업에 적용할 수 있냐 없느냐를 기준으로 세운 수직선이다. 실제로 월요일 1교시에 아이들과 ‘벌레’를 시청하고 질문을 주고받으면서 진행한 수업이 큰 인기였다. 뭐랄까 공감 배틀을 보는 느낌이었달까.

 

아이들은 과연 누가 ‘빌런’인가로 이야기를 확장해나갔다. 자기 자랑만 늘어놓던 태권소년이 첫 지목이었고, 잠자리를 괴롭히던 골목 아이들이나 상장 간수를 못 한 주인공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마침내 이야기를 만든 감독님이 최고 빌런이라는 의견과 함께 근거를 연설하는 아이에게 폭소와 엄지척이 쏟아지기도 했다. 참 근사한 순간이었다. GV에서 뽑힌 최고의 빌런은 담임 선생님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방과 후에 반 친구들 몰래 상장을 주었으니 말이다. 교육 기조에 맞추어 상장 수여할 기회가 대단히 줄었지만, 흔치 않은 기회마다 더욱 큰 칭찬해주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벌레’의 감독 김해리씨는 바쁘게 돌아가는 촬영장의 모습과 소음으로 인해 출연하는 아이들이 놀라거나 기죽지 않도록 배려하는 데 힘썼다고 한다. 아이들은 눈치를 보기 시작하면 주눅이 들게 마련이니 말이다. 아이들의 천연한 미소를 담을 수 있었던 이유를 찾은 느낌이었다. 사실 상영관 가득 모든 사람이 천연했다. 두 시간 넘게 어른들이 아동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 더군다나 보호와 존중에 관한 이야기하는 일, 정말 흔치 않다. 교사인 나에게도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어른의 몫을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해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니! 세상이 유지되는 이유가 있었다.

 

‘벌레’의 러닝타임 13분. ‘벌레’로 수업한 시간 40분. ‘벌레’를 떠올리는 시간 가끔 그리고 앞으로 계속. 영화가 관객에게 안길 수 있는 미덕의 총집합 같은 일주일을 보냈고, 영화 후 토크가 감상의 증폭제로 작용할 수 있음을 톡톡히 실감했다. 마치 구전되는 전래동화처럼. ‘벌레’를 원본 삼아 써 내릴 우리 반 아이들의 감상평이 기대된다. 원본이 되어줘!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면 영화 '벌레'를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글을 쓰며 들은 노래 / 윤딴딴 - 잘 살고 있지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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