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약을 처방 받으러 다니는 병원 건물 1층에는 작은 빵집이 있다. 천연발효 방식으로 소화가 잘 되는 빵을 파는 아담하고 예쁜 동네 빵집이다. 진료를 마치고 나오면서 쇼윈도에 진열된 빵을 구경하다 문을 열고 들어가 서너 가지 빵을 쟁반에 골라 담았다.
새치가 희끗희끗 보이는 커트 머리에 점포용 앞치마를 두른 점원 앞에 빵을 담은 쟁반을 내려놓다가, “어머! 안녕하세요!” 인사가 튀어나왔다. 낯익은 얼굴, 자매 단체(NGO)에서 활동했고, 과거 모 공공기관에서 같이 일한 적도 있던 대학원 동문 A 씨였다. “어머 여기서 일하세요?” “네, 사람 구한다는 소식 보고 이력서 내고 채용됐어요.” 빵값을 계산하며 짧은 인사를 나눴다.
나는 A 씨를 작년 여름 모 기관 채용 면접장에서 만났다. 서류와 필기 시험이라는 험난한 과정을 거치고 마지막 관문인 면접을 치르러 갔던 곳이었다. A 씨도 나와 같은 면접응시자로 왔다. 응시자끼리 서로 대화하지 말라는 주의사항이 있어 눈인사만 나누고 돌아왔다가, 나중에 서로 면접에서 떨어졌다는 소식을 카카오톡으로 주고받았다.
하루 아침에 해고된 50대 여성의 구직은 쉽지 않다. 주로 공공 영역에서 여성, 인권 쪽 일을 해왔는데, 최근 관련 영역이 많이 축소됐다. 올해 공공기관의 예산이 대폭 삭감됐고,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대통령 공약도 자연스럽게 관련 기관의 운신의 폭을 좁혔다. 게다가 내 나이도 구직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구직이 되지 않으니 ‘호출 노동’을 주로 하게 된다. 누군가 불러주면 가서 일을 한다는 의미로 우리 업계에서 쓰는 용어인데, 주로 강의, 자문, 심의 등의 자리에 불려간다. 호출해주는 곳이 많으면야 좋겠지만, 사회 환경의 변화는 호출해주는 자리도 줄어들게 만들었다. 호출 노동을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 생활비를 충당하기가 어렵다는 얘기다.
명함 한 장으로 나를 설명하고 필요한 생활비도 벌 수 있었던 때가 불과 얼마 전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어디에 소속되어 월급을 받기도 어렵고, 호출 노동만으로 수입을 충당하기도 어렵게 되었다. 당연히 추가 수입원을 고민하게 된다.
가끔 동네 피자집이나 식당에 붙어있는 구인 광고가 눈에 들어온다. 매장이 바쁜 점심 시간대 서빙 알바를 하면 1달 고정 수입이 얼마인가 빠르게 계산해본다. 같이 걷고 있던 남편에게 “나 저기서 서빙해볼까?”라고 했더니, “너 그 말 저번에도 했잖아.”라고 한다. 순간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아! 내가 입으로만 이러고 있구나.
A 씨와 짧은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여러 생각이 머리를 오갔다. 내가 ‘한번 해볼까?’ 얼핏 생각하면서도 별로 진지하지 않을 태도였을 때, A 씨는 이력서를 내고 새로운 일을 시작했구나. 나의 “진지하지 않음”은 무슨 의미였을까? 서빙은 내가 하던 일이 아니다? 나에게 맞지 않는 일이다? 시급이 적다?
그래, 20년이 넘는 시간, 한판 신나게 잘 놀았다. 일을 하기 위해 공부하고 준비한 시간까지 더하면 더 긴 시간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사람도 만나고 돈도 벌면서 많이 배우고 익혔다. 일과 얽힌 사람들 때문에 울기도 했고, 또 그 사람들과 어울려 보람있는 성과도 만들었다. 우여곡절과 감동적인 순간들이 뒤얽힌 내 노동의 역사가 빛난다. 여기까지 전반기다.
여러 조건이 달라진 인생 후반기, 앞으로는 또 어떻게 신명나게 살아볼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사실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시간 여유가 생기면서 관심있던 분야의 자원 활동을 하게 되니, 과거에 하지 않았던 새로운 일을 할 수 있게 되기도 하였다. 지금 몇몇 엔지오에서 재미있는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새로운 과제를 수행하고 있다. 새롭게 배우는 것이 많은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다만 그 일로부터 돈을 받지 못할 뿐이다.
기회가 많지 않지만 돈을 벌 수 있는 호출 노동, 유급은 아니지만 일의 영역을 확장시켜주고 있는 자원 활동은 다 유익하고 재밌다. 호출 노동도 내가 했던 일과 관련된 것이기는 하지만, 일의 형식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에 새로운 역량을 개발행 한다. 좋은 강의를 위해 요구되는 역량은 사무직과는 사뭇 다른 것이니까.
이제 생활비를 메워줄 새로운 임금 노동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생각해야 할 때가 왔다. 과거보다 보상이 적은 일일 수도 있고,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일일 수도 있겠으나, 내가 할 수 있고 나에게 기꺼이 기회가 주어지는 일은 무엇일까. 지금까지 구직하던 것과는 다른 경로로, 그리고 다른 마음가짐으로 일자리를 찾아야겠다. 그 길에 저어하는 마음이 생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새로운 국면에서 낯설지 않은 자가 있겠는가. 서먹한 마음은 잠시, 나는 분명 새로운 길을 찬찬히 살피며 걸어가게 될 것이다.
글쓴이: 이윤상은 다양한 조직 생활을 갑작스럽게 끝내고, 인생 후반을 고민 중인 50대 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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