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적 가사의 매력, 주춧돌 알아보기

이센스, 아이유, 르세라핌을 중심으로

2023.06.19 | 조회 5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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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미의 주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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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지난 10년 간 한국과 미국 대중음악 각 분야의 꼭대기에는 그 자신의 삶을 녹여낸 자전적 가사로 알려진 이들이 여럿 앉아 있었다. 방탄소년단, 아이유, 이센스, 테일러 스위프트, 켄드릭 라마 등을 생각해 보면 그렇다. 이들과 비슷한 시기, 혹은 그 이후 등장한 많은 음악인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음악에 심도 있게 담아내기 시작했다. 힙합처럼 가창자와 창작자가 일치하는 장르는 물론, 일반적인 팝이나 케이팝 아이돌 분야에서도 자전적 가사를 내세운 결과물을 만들어 내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가 성공적인 경우는 일부에 불과하다. 어떤 자전적 가사는 많은 청자에게 호응을 얻으며 부른 이와 듣는 이가 정서를 공유하는 유력한 수단이 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굳이 자전적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다는 반감을 얻기도 한다. 사실 청자에게 뮤지션은 대체로 전혀 무관한 타인에 불과하니, 남의 삶에 큰 관심을 갖고 싶지 않다는 반응이 나오는 건 당연한 일 같다.

나는 자전적 가사를 매력적으로 여기게 하는 요인이 가사 내용이나 작사 실력에 온전히 달려 있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어떤 설득력 없는 자전적 가사가 설득력 넘치는 자전적 가사보다 텍스트의 완성도는 높을 수 있지만, 그 설득력을 텍스트의 내용으로만 전달 받은 기억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견해를 갖게 된 사례 중 하나로는 이센스의 앨범 “The Anecdote”가 있다.

*주의: 청자가 해당 결과물이 정말 자전적인지 검증할 수는 없으므로, 이 글에서 다루는 자전적 창작물은 일단 ‘자전적이라고 인식되는 것’, ‘자전적이라고 알려진 것’을 대상으로 한다. 

 

어떤 전달력

“The Anecdote”는 가사에 집중한 좋은 힙합 앨범을 이룰 법한 여러 요소를 가지고 있다. 이센스는 “The Anecdote” 발매 이전에도 90년대 동부 힙합, 소위 ‘붐뱁’이라고 불리는 사운드에 대한 깊은 이해도 및 애정을 보여준 바 있다. 깊이 있는 가사와도, 이센스라는 래퍼와도 잘 어울리는 짝으로 알려진 사운드를 활용했다는 사실은 청자가 이 앨범을 들을 때 초점을 맞춰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1 MC 1 PD라는 구성 역시 좋은 앨범의 구성 요소처럼 여겨지는 유기성을 담보하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표면적 요소로만 만드는 “The Anecdote”의 가장 큰 동력은 이센스 랩이 보여주는 강력한 감정 전달력이다. 

이센스, 'Back in Time' MV
“경산 촌놈 더 티 내 안 감추네 / 빡빡이 가짜 신발 침 발라서 닦던 애 난 90’s kid Big Poppa through the earphone / 누나의 카세트에선 김건모”

이센스의 어린 시절 고향 풍경을 묘사한 가사다. 이센스는 자칫 TMI 나열에 불과해 보이는 이 가사를 90년대 동부 힙합 사운드 위에 박자를 타는 듯, 흘려보내는 듯 내뱉는다. 김건모가 흘러나오는 카세트와 가짜 신발이 나뒹구는 90년대 경산 풍경을 그리다가, 뒤이어 들리는 훅 “Back in time, in my mind take it back, take it” 을 듣다 보면 없던 그리움이 생겨날 지경이다.

과거 지향적 사운드 위에 또렷한 발음으로 내용을 전달하면서도 비트의 흐름을 타며 여운을 남기는 이센스의 랩은 ‘Back in Time’, 나아가 이 곡이 수록된 앨범 “The Anecdote” 내내 청자에게 가사 속 장면에 빠져드는 감각을 전달한다. 앨범에 몰입하여 상념에 잠긴 청자가 자기고백적 자세의 가사를 들을 때, 그것을 그 누구의 어느 작품보다도 진솔한 작업물로 여기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물론 이센스는 수 차례 랩 테크니션으로서의 역량을 입증한 래퍼이지만, “The Anecdote”를 지탱하는 전달력은 단순 기술적 역량과는 명백히 다른 영역에 있다.

청소년기의 불만(’주사위’), 래퍼로서의 업계 진입과 생존(’Next Level’과 ‘삐끗’), 어린 시절과 가족을 떠올리는 자아 성찰(’The Anecdote’, ‘Back in Time’), 그리고 혼란 속에 서 있는 현재(’Unknown Verses’)까지, 주제가 달라져도 일관되게 유지되는 감각은 다양한 장면을 큰 주제로 수렴시킨다. 앨범 전 곡이 같은 사운드 테마를 공유하는 구성이나 1 MC 1 PD라는 정보보다도, 이 일관된 감각이 앨범에 유기성을 부여하는 가장 큰 장치다. 그 감각이 수렴하는 주제가 ‘한 사람의 삶’이라는 것이 이 앨범의 자전적 향을 극대화한다. 

“The Anecdote”에서 도드라지는 대담한 자기 개방의 면모는 앨범 발매 당시 이센스의 정황과 함께 독해되며, 자전적 결과물이 설득력을 얻는 과정을 매우 완벽히 따라갔다. 이제부터는 자전적 결과물이 어떻게 해석되는 지를 보여주는 결과물을 하나 더 살펴보려고 한다.

 

컨텍스트로 향하는 가사

아이유 '스물셋' MV
“얼굴만 보면 몰라 속마음과 다른 표정을 짓는 일 아주 간단하거든 사실은 나도 몰라 애초에 나는 단 한 줄의 거짓말도 쓴 적이 없거든 여우인 척 하는 곰인 척 하는 여우 아니면 아예 다른 거 어느 쪽이게 뭐든 한 쪽을 골라 색안경 안에 비춰지는 거 뭐 이제 익숙하거든”

‘스물셋’과 이 곡이 수록된 “CHAT-SHIRE”를 들은 청자들은 판단당하는 것이 직업인 이에게도 사실 자기 관점과 주장이 있고, 우여곡절을 겪으며 자기 삶을 얻어낼 권리가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장난 같은 가사에서 일관되게 거대한 의미를 끌어낸 것은, 한국 사회에서 당시까지 5년 이상 ‘어린 여자’를 대표하는 유명인 중 하나로 살아온 아이유의 인생 궤적이었다. 남의 시선에 아무렇게나 재단되는 것이 일상인 어린 여자 유명인이라는 위치와, 그 위치에서도 씁쓸하고 체념적인 정서를 가감없이 드러내며 자기 손으로 자신의 궤적을 남기려는 의지가 가사 텍스트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아이유가 쓴 가사와 아이유라는 스타의 인생사를 겹치면 가사 내용 밖에서 글자로 적은 것보다 더 큰 의미를 일관되게 읽어내게 된다. 가사가 파급력을 갖기 위해 컨텍스트로 쓰일 수 있는 공개된 삶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스물셋’의 가사는 무척 자전적이다. 

모두 알고 있듯, 아이유처럼 어떠한 대표성을 갖는 위치에 올라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스타가 되는 음악인은 몇 명 없다. 그렇다면 자전적 가사에 파급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사람은 정녕 극소수인 걸까?  자전적 가사로 의미 있는 순간을 만드는 음악인의 수가 적어도 어떤 대표성을 갖는 스타의 수보다는 훨씬 많은 걸 보면, 컨텍스트를 깊이 파고드는 청자가 음악인이 활동을 이어갈 수 있을 만큼 이상만 있다면 설득력을 충분히 가질 수 있는 것 같다.

음악과 음악인을 연결하고, 그 컨텍스트를 넓고 깊게 파고드는 것은 흔히 말하는 팬덤의 속성 중 하나다. 케이팝 아이돌 업계가 결국 멤버의 자전적 면모를 드러내게 된 데에는, 아마도 자전적 가사가 갖는 파급력이 팬덤의 결집과 맞닿아 있기 때문인 것 같다. 

 

크레딧 밖의 자전적 가사

앞서 말한 예시들은 음악가가 직접 가사를 적고, 자신의 음악에 대해 주도권을 본인들이 잡은 채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가창자와 제작 주도권자가 일치하는 제작 형태 및 그러한 제작 형태를 추구하는 뮤지션에게서 소위 자전적 결과물이 나오는 것은 필연적인 관계로 보인다.

가창자와 제작자가 대체로 분리된 케이팝 아이돌 업계가 자전적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방법으로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로는 작사/작곡을 하는 아이돌 멤버에게 작업물 제작에 참여할 기회를 열어주고 그 사실을 전면에 내세워 조명하는 경우가 있다. 멤버 중 한 명에게 총 책임자의 아우라를 부여한 빅뱅, 블락비, 세븐틴, (여자)아이들 같은 사례도 있고, 특정 멤버를 총 책임자로 점찍지는 않았지만 멤버들의 참여를 폭넓게 보장한 후기의 H.O.T나 방탄소년단 같은 사례도 있다. 이러한 기획이 성공했을 때는 가창자, 작사/작곡자, 총 책임자가 전부 분리되어 있는 케이팝 아이돌 업계의 기본 전제를 뒤집으며 큰 파급력을 가져왔지만, 전면에 부각된 멤버들은 어마어마한 위험 부담을 견뎌내야 했다.

한편 공동 작업이라는 케이팝의 특성을 살려, 작사/작곡 크레딧 바깥의 영역에서 멤버의 면모를 컨텐츠에 녹여내는 방법론도 부각되고 있다. 멤버가 직접 작사나 작곡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기획 과정에서 충분한 협의를 거쳐 멤버의 내밀한 측면을 반영하는 결과물도 있다. 

근래 이러한 방법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팀으로는 르세라핌이 있다. 방탄소년단을 통해 멤버의 자전적 측면을 아이돌 기획에 반영하는 노하우를 확보한 하이브는, 르세라핌 멤버들과 심층 인터뷰를 거쳐 알아낸 각 멤버의 특성과 의견을 결과물에 꾸준히 반영하고 있다. 

르세라핌, 'ANTIFRAGILE' MV
“잊지 마 내가 두고 온 Toe Shoes, 무슨 말이 더 필요해 무시 마 내가 걸어온 커리어 I go to ride till I die, die” “줄 달린 인형은 No thanks 내 미랠 쓸 나의 노래”

‘Toe Shoes’를 말하는 이는 발레 전공자 카즈하, ‘커리어’를 말하는 이는 과거 활동 그룹이 있는 사쿠라와 김채원, ‘나의 노래’를 말하는 이는 꾸준히 자작곡을 내놓고 있는 허윤진이다. 멤버들이 가진 각양각색의 이력과 특성을 전부 보여주면서도 그 안에서 접점을 모아 야심이라는 큰 주제로 나아가는 곡의 구성은, 전 멤버를 고루 담아내는 데에 유리한 기획 방법론의 장점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멤버 다수가 현 그룹 합류 이전 이력이 알려진 이라는 점, 멤버들의 과거 이력과 그룹 활동 중 놓인 상황이 컨텍스트로 쌓이자 강한 메시지를 앞세운 결과물이 비로소 설득력을 갖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르세라핌의 결과물은 앞서 이야기한 ‘자전적’ 키워드의 속성을 정확하게 반영한다. ‘ANTIFRAGILE’은 작사/작곡 참여 이외의 방식으로 멤버의 자전적 면모를 드러낼 수 있음을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다.

 

그래서 대중음악을 듣지

자전적 결과물을 매력적으로 느껴지게 하는 요소로는 감정을 정확히 표현하는 전달력과, 결과물 해석의 컨텍스트로 쓰일 삶이 있다. 그래서 자전적 결과물은 팬덤 지향적 속성을 갖는다. 대체로 자전적 결과물에는 그것을 만든 이의 통제력이 발휘되곤 하지만, 그러한 작업 환경이 자전적 결과물의 필수 요소는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사례도 등장하고 있다.

나는 이렇게 감정과 상황과 이야기에 빠져들어 음악과 부른 사람을 함께 살피는 경험이, 대중음악이라는 매체의 특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측면이라고 생각한다. 사례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중음악은 대체로 그것을 만들고 부르는 이의 상징성과 함께 전달되고 독해되는, 그렇게 형성되는 전달력이 수치적 테크닉보다 중요한 예술이었다. 그렇기에 이 분야는 개인이 자기고백적 성향이 짙은 창작물을 내놓기 좋은, ‘자전적’이라는 수식어와 잘 어울리는 예술 분야가 되었다. 

우리는 대중음악이라는 기반이 만들어 낸 무수한 자전적 가사를 들으며, 그 설득력 아래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대중음악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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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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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about 1 year 전

    확실히 에넥도트 같은 경우에는 이센스가 나스 빠돌이라서 그런건진 몰라도 동부힙합과 일매틱 느낌이 조금씩 나는건 확실하더라고요 잘 보고 갑니다!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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