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저지른 실수의 대부분은 ‘어려서 그랬지 뭐’하며 웃어넘길 수 있지만 어떤 기억은 도저히 그냥 넘기기 어려울 정도로 괴롭다. 내겐 나 잘난 맛에 심취해 했던 말이나 행동들이 그렇다. 그런 순간이 떠오르면 자동으로 머리를 감싸게 된다. 그 장면으로 날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
회사 생활을 시작한 지 1년이 조금 넘었을 때 나는 내가 글을 끝내주게 잘 쓴다고 생각했다. 회사에서 인터뷰 콘텐츠를 만들었는데 반응이 좋았다. 대표님이 전체 회의에서 공개 칭찬을 할 정도였다. 분명 신입의 기를 살리려는 의도가 있었을 텐데 난 그것도 모르고 우쭐해했다. 회의가 끝나고 자리로 돌아오는데 같은 팀의 선배가 말했다. “두현님, 인터뷰 글에 적절한 이미지들 넣어서 콘텐츠 완성해 보시죠.” 내가 대답했다. “아 저는 제 글 중간에 사진 넣는 거 싫어하는데…” 내 글은 그 자체로 리듬감이 있고 몰입을 이끄는 구성을 갖추고 있다, 이미지를 넣는 건 내 글의 고귀한 완성도를 떨어뜨린다, 라는 의미였다.
대문호라도 안 할 말을 20대 중반의 정두현이 한 것이다. 내 말을 듣던 선배의 얼굴이 생생하다. 할 말이 많지만 하지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어째서 그런 소리를 한 걸까? 그 일이 너무 부끄러워서 요즘도 이불을 찬다.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이면서, 셀 수 없는 실패를 겪으면서 나는 겸손해져 갔다. 일이라는 건 알수록 어려운 거였다. 다 알고 있다고 자만하는 순간 여지없이 넘어지는 게 커리어였다. 훌륭한 사람이라서
겸손해진 게 아니라 겸손하지 않으면 망신을 피할 수 없어서 나는 손을 공손히 모았다. 분명 어릴 적보다 아는 게 많은데 말은 아끼게 되는 스스로를 보면서, 내가 겪은 시간을 똑같이 지나오며 잘난 척을 하는 후배들을 보면서 되뇌었다. “인간은 애매하게 알수록 자만한다.” 이 문장은 내가 마음속에 새긴 몇 안 되는 진리 중 하나가 됐다.
일 뿐이 아니었다. 운전이든 운동이든 사람 사이 관계든, 애매하게 알 때 인간은 자만을 했다. 자만을 하면 탈이 났다. 운전이 뭔지 조금 알 것 같을 때 꼭 사고가 나는 것처럼. 이를 문득 실감했을 때 기분이 이상했다. 자만을 한다는 건 자신감이 있다는 뜻이고 자신감이 있다는 건 편안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 않나. 사랑을 할 때 나는 늘 그 관계가 편안해지는 수준까지 가고 싶었다. 그러지 못할 때 괴로웠으니까. 헌데 편안해지는 건, 그러니까 자신이 있는 건 애매하게 알 때뿐이라고 하면, 누군가를 깊게 알고 사랑할수록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다는 말인가. 결국 인간은 소중한 것 앞에서 편안할 수 없다는 결론으로 가게 되는 건가.
출간 이후 북토크를 다니고 있다. 최소 2번, 최대 6번 할 수 있는데 얼마나 하고 싶냐고 편집자님이 물었는데 “6번 다 하고 싶다”라고 고민없이 답했다. 나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게 얼마나 신나는 일인지 최근 몇 개월간 느낀 터였다. 책을 더 팔고 싶다는 마음과 나 신나는 시간을 더 갖고 싶다는 욕심에 결국 8번이나 하게 됐다.
첫 북토크를 가는 날이었다. 북토크에서는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한 시간 가량 이야기를 주도해야 한댔다. 1년 전이었다면 전 날부터 손에 땀이 줄줄 흘렀을 텐데 이번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 날 만난 지인들이 긴장 안 되냐고 물었다. 누구라도 떨릴만한 상황이기 때문에 몇 번이나 같은 질문을 받았다. 난 긴장이 안 된다고 답했다. 근 6개월 여러차례 마주했던 발표 자리가 날 단단하게 만든 것 같았다. 스스로를 신기해하고 기뻐하면서 북토크 장소로 갔다.
책방지기님이 나를 반기며 15명이었던 정원이 마감됐다고 했다. 가림막 뒤에서 한 명 한 명 자리를 잡는 소리를 들으며 기다렸다. 북토크 시작 1분 전까지도 하나도 긴장이 안 됐다. 내가 쓴 책에 대한 이야기,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하면 되는 거니까 걱정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북토크가 시작되고 5분 뒤, 맨 앞자리에 앉아있던 분은 당황했을 것이다. 내가 땀을 뻘뻘 흘렸기 때문이다. 15명 앞에서 말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머릿 속에 완벽히 정리돼 있다고 생각했던 이야기가 막상 말로 나오는 순간 스텝이 꼬였다. 고비를 몇 번이나 겨우겨우 넘기며 발표를 마쳤다. 더 큰 고비는 질답 시간에 찾아왔다. 내 책을 읽고 할 거라곤 생각도 못한 생각을 한 사람들이 허를 찌르는 질문을 했다. 고민하느라 짧지않은 정적을 만들기도 하고 ‘하하, 어려운 질문이네요’라고 웃기도 하며 순간들을 넘겼다.
집에 돌아오는 차에서 북토크 준비에 성의가 부족했음을 인정했다. 내 책을 읽은 사람들과 내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자리라고 해서, 독자들을 다 안다고 생각했던 걸까. 부족함을 인정하는 순간에도 확실히 말할 수 있었던 건 나는 내 책을 읽었다며 행사까지 찾아온 한 분 한 분의 독자들에게 깊은 사랑을 느꼈다는 점이다.
신형철 평론가의 책 <인생의 역사>에서 자식을 대하는 마음을 ‘손으로 새를 쥐는 마음’에 빗댄 문장을 읽은 적 있다. 새를 실제로 쥐어본 적 없으면서도 그 마음이 어떤 것인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만큼 적확한 표현이었다. 일주일 뒤 두 번째 북토크가 있었다. 발표 자료를 다듬고 해야할 말을 가다듬은 후였다. 새로운 사람들, 내가 궁금해 그 자리까지 온 또다른 사람들을 앞에서 마이크를 손을 쥐며, 머릿 속으로 새를 조심스럽게 쥐는 상상을 했다. 소중한 존재들 앞에서 나는 한없이 조심스러워지겠다는 다짐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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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첫 산문집 <말 더더더듬는 사람>이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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