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트웨어를 설계하기 가장 좋은 시점은, 그 소프트웨어 개발을 완료한 후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완성하고 난 후에야말로 내가 진짜 만들고 싶었던 게 무엇인지, 그걸 잘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는 맥락에서 그렇습니다.
쓰기 위해 생각하기 vs 생각하기 위해 쓰기
글을 쓸 때도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쓰기 시작할 때 대략적인 구상을 가지고 있었더라도 글을 쓰는 과정에서 많은 것이 바뀝니다. 처음에는 희마하고 모호했던 생각들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 점차 분명하고 구체적인 형태로 발전합니다. 그런가 하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연결되면서 전체적인 구조나 전개 방식, 심지어 주제의 요점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머릿속의 생각을 글자로 바꿔놓고, 직접 눈으로 확인하며, 그 재료를 가공하여 말이 되게 조합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렇게 글을 완성하고 나면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는지 깨닫고 생각이 명료해진 느낌을 받습니다.
이걸 뒤집어서 생각하면, 글을 쓰기 위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각을 알아보기 위해서 머릿속을 탐색하는 수단으로 글쓰기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종이 위에 연필로, 아니면 키보드 위의 손가락으로 글자를 채워가다 보면,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머릿속에 있던 다음 생각, 즉 내가 찾던 내용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순간이 있습니다. 아니면, 방금 머릿속에서 꺼내 글자로 명시화 해놓은 생각을 보며 '정말?' 하면서 논리의 비약이나 모순을 찾기도 합니다.
잠재의식 아래에서 잠자던 아이디어를 발굴했든, 알고는 있었지만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던 오류와 잠재성을 깨달았든, 글로 쓰지 않았다면 머릿속에만 존재했을 뭔가를 발견해서 바깥세상으로 가져온 것입니다.
탐험쓰기와 자유쓰기
앨리슨 존스 작가는 『쓸수록 선명해진다』에서 이런 목적의 글쓰기에 "탐험쓰기(Explorative Writing)"라는 이름을 붙여주며,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을 제안합니다. 코스와 목적지가 정해져 있는 여행과 달리, 무엇을 발견할지 모르는 탐험을 목적으로 머릿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글쓰기를 통해서 말이죠. (그래도 번역은 "탐험쓰기"보다는 "탐험적 글쓰기"나 "탐색적 글쓰기"가 어땠을까 싶습니다.)
책에서는 탐험쓰기가 왜 효과가 있는지 원리와 근거를 소개하며, 적용해 볼 만한 방법이나 글의 시작 문구 예시 등을 제공합니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할 때 참고하기 좋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저자가 탐험쓰기의 한 가지 기술로 소개하는 "자유쓰기"라는 게 있습니다. 자유쓰기란, 6분이란 시간제한을 두고, 의식적인 검열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생각과 손가락의 속도에 맞춰 글을 써나가는 것입니다. 다른 책에서도, 글쓰기가 본인을 어디로 인도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손가락에 생각의 흐름을 맡기는 경험을 이렇게 표현한 분이 있었는데, 비슷한 게 아닐까 싶어요.
나 또한 글을 쓰는데 몰두하면 때때로 내 손가락이 마치 다른 인격체가 되어서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 본문을 쓸 때는 기승전결을 의식하지 않고 의식의 흐름대로 빠르게 쓴다. 그러다 보면 곧장 결론에 이른다. 결론은 정해놓고 쓰는 것이 아니라 쓰는 도중에 결정되는 편이다. '아, 이런 결론이 되었구나. 예상 밖이군' 하며 놀라는 경우도 있다. 글을 쓰는 도중에 갑자기 어떤 깨달음을 얻거나 참신한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해서 스스로가 내 책의 독자가 된 기분을 느낄 때도 있다.
센다 다쿠야, 『무적의 글쓰기』, 177p
일종의 혼자 하는 브레인스토밍이랄까요, 아니면 무의식과의 대화? 뭐라고 부르든 이 자유쓰기를 통해 저자는 고민하던 문제의 답을 찾은 개인적인 경험이 많다고 하니, 지금 고민 중인 문제가 있다면 6분 정도 투자해 볼 만한 가치는 충분한 것 같습니다.
AI 시대, 글쓰기의 가치
AI가 웬만한 사람보다 더 그럴듯하게 글을 써주는 시대에 굳이 왜 글을 써야 하냐는 질문에 대답할 거리가 하나 늘었습니다. 글쓰기는 생각의 결과물일 뿐만 아니라 생각의 도구이기도 하다고.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사람이 생각하는 걸 멈추면 안 되니까요.
참고 자료
- 앨리슨 존스, 『쓸수록 선명해진다』, 진정성 옮김, 프런트페이지(2025)
- 센다 다쿠야, 『무적의 글쓰기』, 이지현 옮김, 책밥(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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