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지 않을 권리를 불허한다면?

래디컬 마켓의 간단하지만 강력한 제도 설계 아이디어를 하나 소개합니다

2025.03.23 | 조회 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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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거부권이 남용되는 모습을 보면, 왜 현실에서 만장일치제를 채택하지 않는지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참여자의 거부권을 인정했다가는 빠른 의사결정은커녕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는 갑갑한 상황이 일상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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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권이 정치에만 있는 건 아닙니다. 나에게 꼭 필요한 물건이 있는데, 터무니없는 값을 부르거나 심지어 아무리 비싸게 줘도 안 팔겠다는 경우를 겪은 적이 있나요? 일종의 경제적인 거부권을 행사당하신 셈입니다.

그런데 이게 단순히 개인 간의 문제가 아니라 공공의 이익이 걸린 문제라면 어떨까요?

개인의 판매 거부가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사례들

사례 1. 어떤 지역을 개발하기 위해 부지를 매입하려고 하는데, (일부) 땅의 소유주가 반대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례 2. 한 제약업체가 신약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제품화하려면 먼저 특허권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런데 필수적인 선행 특허를 가진 곳에서 사용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 약이 시판되면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데 말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소유권이 여러 사람에게 분산되어 있는 경우, 한 명이라도 판매를 거부하면 협상이 타결될 수 없기 때문에 만장일치제의 문제가 그대로 재현됩니다. 『마인』 책의 공저자인 마이클 헬러 교수는 이를 그리드락(Gridlock)이라고 부르는데요, 위의 신약 사례는 상상이 아니라 실제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이며, 비슷한 문제가 다양한 분야에 존재한다고 합니다.

판매를 거부할 수 없게 할 수도 있을까요?

사례 1과 2 모두 경제적인 거부권을 행사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거부권을 거부하면 어떻게 될까요? 즉, 팔지 않을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죠. 그냥 빼앗는 것은 당연히 안 되고, 대신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가격을 어떻게 정하죠? 현재의 소유자는 자신이 실제 생각하는 가치보다 높게 얘기할 테고, 구매하려는 쪽은 반대로 낮춰서 주장할 겁니다. 양쪽 모두 스스로 생각하는 솔직한(truthful) 평가액을 말할 이유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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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디컬 마켓』 책에서 제안하는 공동 소유 자기평가세는 바로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방법은 간단한데, 자원의 (잠재적) 소유자가 스스로 평가하게 하는 겁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 만약 현재 소유자보다 더 높은 가격을 지불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에게 "무조건" 팔아야 합니다.
  • 소유자는 자기 스스로 평가한 가격에 따라 세금을 내야 합니다.

눈치채셨겠지만, "경매"의 원리입니다. 가장 비싸게 입찰한 사람이 소유권을 가집니다. 대신 비용은 일회성 구입비만으로 끝나지 않고 세금의 형태로 지속됩니다. 내가 어떤 자원을 차지한다는 건, 다른 사람들은 나로 인해 갖지 못했다는 뜻이기 때문에 그 비용(사용료)을 사회 전체에 지불하는 거죠.

소유권과 세금 사이의 줄타기 덕분에 현재 소유자와 잠재적 매입자는 스스로가 생각하는 솔직한 가치를 밝힐 유인(인센티브)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 해당 자원을 가장 높게 평가하는, 즉 경제적으로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이 소유권을 얻습니다. 덕분에 자원이 낭비되지 않고 효율적으로 사용됩니다. 개인에게 최선인 행동이 사회에도 이득이 되도록 하는 메커니즘 디자인의 사례입니다.

이렇게 하면 가난한 사람은 이미 가진 것도 다 빼앗기고, 결국 돈 많은 사람이 모두 소유하게 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들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한 『래디컬 마켓』의 답변은, 적정한 세율로 거둔 세금을 사회 배당금(기본소득)의 형태로 개인에게 지급하면 오히려 불평등을 줄이고, 성장의 과실을 나눔으로써 공동체 소속감을 증진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장 실패의 원인인 독과점을 막고, 정당한 가치 평가과 효율적인 자원 배분을 통해 사회의 생산성도 향상된다고 주장합니다.


지금으로서는 현실화 가능성이 낮은 실험적인 아이디어지만, 가장 시장친화적이고 경쟁적인 경매라는 방식을 통해서 공동체 전체의 이익과 분배라는 가치를 추구한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이 책이 나온 건 2019년인데, 여전히 대중의 호응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참고 자료

  • 에릭 포즈너, 글렌 웨일, 『래디컬 마켓』, 박기영 옮김, 부키(2019)
  • 마이클 헬러, 제임스 살츠먼, 『마인』, 김선영 옮김, 흐름출판(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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