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의 역사를 바꾼 사람들

피렌체 르네상스를 불태운 사보나롤라

메디치의 몰락과 '허영의 화형'

2025.07.02 | 조회 1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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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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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의 책장

앨리스가 전하는 미술 이야기, 이상한 나라의 미술관으로 함께 모험을 떠나 보자.

15세기 피렌체는 유럽 문화의 중심이었습니다. 단테의 문학부터 브루넬레스키의 건축, 마사초의 회화에 이르기까지, 피렌체는 인문주의와 고전 부활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예술 정신을 일궈낸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메디치 가문이 있었습니다. 은행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코시모 데 메디치와 그 손자 로렌초 데 메디치(‘위대한 로렌초’로 불림)는 단순한 재정가를 넘어 피렌체 공화정의 실질적 통치자이자 문화의 수호자 역할을 자처했습니다.

로렌초는 특히 예술에 대한 후원이 탁월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십대 시절부터 그의 정원 아카데미에서 조각을 배우며 자랐고,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등도 그의 체제 아래 성장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산드로 보티첼리는 로렌초의 철학자 친구들과 교류하며 신플라토니즘의 미학을 회화로 형상화했습니다.

보티첼리의 대표작 [비너스의 탄생]은 이상화된 인간의 아름다움을 고전 신화의 이미지로 되살린 작품입니다.

 

보티첼리 / 비너스의 탄생 (The Birth of Venus) / 1484–1486 / 우피치 미술관
보티첼리 / 비너스의 탄생 (The Birth of Venus) / 1484–1486 / 우피치 미술관


누드의 여신이 조용히 바다에서 올라오는 이 장면은 단순한 신화를 넘어, ‘인간이 곧 신의 형상’이라는 르네상스 정신을 시각적으로 상징합니다. 그러나 이 찬란한 문화의 이면에 균열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었습니다. 빈부격차로 인한 귀족과 시민 간의 갈등, 교회의 부패에 대한 불만 등이 점점 피렌체를 흔들고 있었고, 바로 그 틈새로 한 신비로운 수도사가 등장하게 됩니다.


예언자, 사보나롤라의 등장

지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1452–1498)는 북이탈리아 페라라 출신으로, 일찍이 세속 사회의 타락에 대한 혐오감을 품고 있었던 그는 1475년 도미니코 수도회(Ordo Praedicatorum)에 입회하며 신학과 설교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도미니코회는 ‘설교자들의 수도회’로, 교리의 수호와 이단에 대한 지적 반박을 주요 사명으로 삼았으며, 엄격한 금욕주의와 이성 중심의 신학 전통을 유지해 왔습니다.

이 수도회의 문화는 사보나롤라의 언어와 신념, 예언자적 세계관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피렌체 산 마르코 수도원에서 설교자로 활동하며 점차 명성을 얻었고, 1490년경 로렌초 데 메디치의 초청으로 피렌체 시민들 앞에 선 그의 설교는 폭발적인 반응을 얻게 됩니다. 사람들은 교회 부패를 고발하고 임박한 신의 심판을 경고하는 그의 외침에 열광했고, 특히 “피렌체는 신이 선택한 도시”라는 메시지는 시민들에게 종교적 감화를 넘어 정치적 희망처럼 작용했습니다.

 

루트비히 폰 랑겐만텔 / 사보나롤라의 설교 / 1879 /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시립미술관
루트비히 폰 랑겐만텔 / 사보나롤라의 설교 / 1879 /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시립미술관


그는 단순히 도덕적 경고를 넘어서, 직접 예언자적 발언을 쏟아냈습니다. “이탈리아는 외세에 의해 짓밟힐 것이다. 피렌체는 불 속에서 정화될 것이다. 로마는 무너질 것이다.” 그의 말은 환상처럼 들렸지만, 1492년 로렌초의 사망과 1494년 프랑스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공이 실제로 일어나면서 사람들은 그를 ‘신의 도구’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프랑스의 진군, 피렌체를 흔들다

1494년, 프랑스의 젊은 왕 샤를 8세는 나폴리 왕위 계승권을 내세우며 대군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진군합니다. 이 침공은 르네상스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자율적 질서를 근본적으로 뒤흔든 사건이었고, 피렌체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당시 피렌체를 다스리던 피에로 데 메디치는 능력 없는 통치자로 평가받고 있었고, 프랑스군이 접근하자 그는 공포에 휩싸인 채 주요 거점 도시들을 거의 항복 조건으로 내주고 맙니다.

이 굴욕적인 외교는 시민들의 분노를 폭발시켰고, 마침내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에서 추방됩니다. 이 권력 공백을 메운 인물이 바로 사보나롤라였습니다. 그는 샤를 8세를 설득해 피렌체를 무력으로 점령하지 않도록 만들었고, 동시에 시민들에게 ‘이 도시가 이제 신의 뜻에 따라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선포했습니다.

피렌체는 다시 공화국 체제를 선언하고, 사보나롤라는 실질적인 지도자로 군림하게 됩니다. 그는 새로운 공화국 헌법을 신 중심으로 재정비하고, 교황 알렉산데르 6세에 맞서 교회 개혁을 요구하며 유럽 전역의 개혁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1497년 2월 7일, 역사에 길이 남을 사건이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에서 벌어졌습니다. 바로 '허영의 화형 (Bonfire of the vanities)'입니다.

 

허형의 화형 구현 이미지 (출처 : jodi taylor books)
허형의 화형 구현 이미지 (출처 : jodi taylor books)


이 사건은 단순한 일회성의 종교 행사나 상징적 제의가 아니었습니다. 수 개월 전부터 사보나롤라는 ‘신의 도시에 어울리지 않는 사치와 퇴폐의 상징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설교했고, 그의 열광적인 추종자들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불에 던질 물건들을 모았습니다. 이들은 '작은 천사들'이라는 별명을 가진 소년 신도 집단으로,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거울, 향수, 악보, 카드, 연극 의상, 외설적 삽화가 실린 책들까지 수집했습니다.

화형 당일, 시뇨리아 광장 중앙에는 7단으로 쌓은 거대한 피라미드형 구조물이 설치되었습니다. 나무와 가죽, 천과 종이, 그리고 예술품으로 만들어진 그 탑에는 일상에서 벗어난 온갖 ‘허영’의 흔적들이 차곡차곡 얹혀 있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보석, 가발, 향료, 레이스와 실크 옷감, 여성을 그린 누드화, 리라와 비올라 같은 악기들, 그리고 당대 고전 서적이나 시집들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이 예술계에 미친 충격은 매우 컸습니다. 보티첼리는 일부 자신의 초기작을 화형에 바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후기에 갑작스럽게 작품 세계가 경건한 종말론으로 변화한 것도 이 사건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의 [신비한 탄생]은 사보나롤라의 예언적 종말론을 직접 반영한 회화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보티첼리 / 신비한 탄생 (The Mystical Nativity) / 1500 / 런던 내셔널 갤러리
보티첼리 / 신비한 탄생 (The Mystical Nativity) / 1500 / 런던 내셔널 갤러리


화형 장면은 단순히 불을 피우는 의식이 아니었습니다. 광장을 가득 메운 군중은 찬송가를 부르며 눈물을 흘렸고, 어린아이들은 기도문을 낭송하며 소지품을 던졌습니다. 불길은 해가 질 무렵까지 계속 타올랐고, 그 안에서 타오른 것은 단지 물건이 아니라, 르네상스가 상징하던 자유, 아름다움, 탐구, 인간 중심성 그 자체였습니다.

'허영의 화형'은 사보나롤라 권력의 정점이자, 동시에 그의 몰락을 예고하는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이 후, 지나치게 강제된 금욕주의는 시민들의 피로감을 불러왔고, 이후 그가 교황청에 의해 파문되고 이단 혐의로 처형되는 데에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한 번의 불길은 이후 수 세기에 걸쳐 예술과 신앙, 이상과 현실 사이의 경계를 다시 묻게 만드는 역사적 분기점으로 남게 됩니다.


불길 속으로 사라진 사보나롤라의 이상

불과 1년 뒤인 1498년 5월 23일,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앞 광장은 다시 한 번 군중으로 가득 찼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예언자의 설교를 듣기 위한 청중이 아니라, 처형을 지켜보기 위한 구경꾼이었습니다. 무대 위에는 사보나롤라와 그의 측근 두 명이 교수형을 당한 뒤, 시신이 불태워졌습니다.

사보나롤라의 처형 (출처 : Wikimedia)
사보나롤라의 처형 (출처 : Wikimedia)


불과 4년 전, “하나님의 도시”를 건설하겠다며 시민의 찬탄을 한몸에 받았던 인물은 이제 군중의 눈앞에서 재가 되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불에 탄 것은 한 수도사의 생애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피렌체가 자랑하던 르네상스 정신, 그리고 인간 중심의 문화 이상의 시대를 마무리짓는 상징적 장면이기도 했습니다.

도대체 사보나롤라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그의 도덕적 이상주의가 현실 정치와 충돌하면서 내부에서부터 균열이 생겨났습니다. 처음에는 그를 따르던 시민들도 점차 금욕주의의 강압성과 자율성의 제한에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예배 강요, 감시 체계, 사치품 단속은 점차 시민들의 일상에 공포와 불편을 안겼고, 상인 계층과 예술가들, 자유로운 시민사회는 점점 그를 떠났습니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교황 알렉산데르 6세(보르자)와의 갈등이었습니다. 사보나롤라는 교황의 면죄부 정책과 사적 부패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종교 개혁의 깃발을 들었습니다. 이에 교황은 세 차례에 걸쳐 경고장을 보냈고, 결국 1497년 5월 사보나롤라를 공식 파문했습니다. 교황청과의 단절은 피렌체 내부에서 사보나롤라에 대한 정통성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1498년, 피렌체 공화정 정부는 결국 사보나롤라를 체포하고 고문을 통해 본인이 이단이라는 자백을 받아냅니다. 그는 이단, 선동, 신성 모독의 죄목으로 교수형과 화형을 동시에 선고받았습니다.


로마로 옮겨 간 르네상스의 불꽃

사보나롤라가 쌓아올린 신정(神政) 체제는 ‘도덕’이라는 이름 아래 시민의 자유와 예술의 다양성을 억눌렀습니다. '허영의 화형'에서 타오른 불길은 단지 거울과 향수, 고서와 비단만을 태운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회화, 조각, 시와 음악, 인간 정신의 자유로운 표현도 함께 불탔습니다. 당대 예술가들에게 이는 단순한 종교적 경고가 아닌 실질적인 창작의 위축을 의미했습니다.

더 큰 변화는 예술의 지리적 중심 이동으로 나타났습니다. 16세기 초, 예술의 주도권은 점차 피렌체를 떠나 교황의 도시 로마로 집중되었습니다. 율리오 2세는 교회의 권위 강화를 위해 회화와 건축, 조각에 아낌없는 지원을 했으며, 이는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브라만테 같은 거장들의 성장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이제 피렌체의 철학적 실험에서 벗어나, 권력과 신앙이 결합된 거대한 종합예술의 장으로 옮겨간 셈입니다.

한편, 사보나롤라의 급진적 도덕주의는 북유럽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그가 남긴 설교문을 읽고 감화를 받았으며,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그를 교회 부패를 고발한 ‘개혁의 선구자’로 평가했습니다. 이후 북유럽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미술은 인간의 구원과 신의 계시에 대한 주제를 강하게 반영하게 되었고, 이는 이탈리아의 화려한 인본주의적 미학과 또 다른 방향을 형성하게 됩니다.

 

The End.

Good Bye 말고 See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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