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1832–1883)는 19세기 중엽 파리에서 활동한 화가입니다. 그는 전통적인 화법 교육을 받았지만, 고전적 양식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실을 정면으로 다루려는 태도를 일관되게 유지했습니다. 마네의 회화는 역사나 신화 대신, 동시대 도시인의 삶을 주제로 삼았고, 고전 회화를 해석하는 방식 또한 철저히 현대적이었습니다.
마네는 파리의 부유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가족의 기대에 따라 법률가가 되기를 권유받았으나 예술가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1850년부터 그는 아카데믹 화풍의 대표적인 인물인 토마 쿠튀르(Thomas Couture) 밑에서 6년간 수학했습니다.
동시에 루브르 박물관에서 옛 거장들의 작품을 모사하며 화법과 구도를 익혔고, 특히 벨라스케스, 고야, 티치아노 등의 회화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는 1850년대 말부터 유럽을 여행하며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의 미술 전통을 체득했고, 이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회화 세계를 구축해 나갔습니다.
살롱전과 제도의 벽
19세기 프랑스 미술계는 국립 살롱전(Salon de Paris)을 중심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이는 프랑스 아카데미에서 주관하는 국가공모전으로, 입선 여부는 화가의 명성과 생계를 좌우할 만큼 절대적이었습니다. 심사 기준은 고전주의에 입각한 정확한 인체 묘사, 역사화나 신화화 등 전통적 주제, 정교한 구성 등이었습니다.
마네 또한 살롱전에 입선한 경험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작품이 [스페인 가수]입니다.

이 그림은 1861년 살롱에 입선하며 주목을 받았고, 스페인풍의 선명한 명암 대비, 거친 붓질, 사실적 인물 표현 등으로 비평가들 사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 작품은 외형적으로는 단일 인물 초상이라는 아카데믹한 구도를 따르고 있었고, 사실적인 인체 묘사와 안정적인 구도로 인해 당시 살롱 심사 기준을 일정 부분 충족했습니다.
또한 당대 프랑스에서 스페인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점도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물의 태도, 대담한 화면 구성, 장식적이지 않은 현실적인 표현은 기존 회화와는 분명히 구별되는 새로운 감각을 보여주었습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전통과 혁신 사이의 절묘한 경계에 놓여 있었고, 살롱 입선은 마네에게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그는 점점 고전 회화의 모방에서 벗어나 현대 사회의 현실과 인간을 회화의 주제로 삼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마네가 기존 화가들과 차별화된 지점이었습니다.
마네가 추구한 예술관은 '현대적 삶을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전통 회화의 이상화된 인물이나 영웅적 서사 대신, 당대 파리의 시민과 주변 인물들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고전 구도를 차용하되, 그 위에 현실을 얹는 방식으로 회화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형식 실험이 아니라, 회화가 동시대성과 사회적 현실을 반영할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점차 현실과 일상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보수적인 심사위원들로부터 배척당하기 시작했습니다.
낙선전, 마네를 중심으로 터진 논쟁
1863년, 마네는 [풀밭 위의 점심]을 살롱전에 출품하였으나 탈락 통보를 받았습니다. 이 작품은 전통적인 목욕 장면을 연상시키는 구도이지만, 등장인물은 모두 현대 복장을 하고 있었고, 중앙에 위치한 여성이 나체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대 관객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해에는 마네뿐만 아니라 탈락자 수가 이전보다 너무 많아서 사회적 논란이 되었고, 이에 나폴레옹 3세는 "관객에게 판단할 기회를 주라"며 탈락 작품을 따로 전시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전시가 바로 1863년의 '낙선전(Salon des Refusés)'입니다.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은 전시된 그림들 중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림 앞에는 하루에도 수백 명의 관람객이 몰렸고, 많은 사람들이 야유를 퍼부었습니다. 당대 신문과 잡지는 마네의 그림을 '외설적'이고 '비도덕적'이라 평가하며 수차례 조롱의 대상으로 삼았고, 풍자화와 만평에서 그는 반복적으로 희화화되었습니다.
'도덕을 파괴하는 화가', '누드와 사실의 혼란'이라는 표현이 기사에 실릴 정도였습니다. 미술비평가 중 일부는 이 작품을 두고 "더럽고 불쾌한 장면을 그림이라는 이름으로 내걸었다"며 격렬히 비난했고, 관람객들 사이에서도 마네의 이름은 하나의 구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부 미술 평론가들과 젊은 화가들은 이 작품의 의의를 이해했습니다. 라파엘로, 티치아노 등의 고전 구도 위에, 동시대의 인물과 시선을 올려놓았다는 점은 고전과 현대를 연결하는 새로운 시도였습니다.
2년 뒤, 1865년. 마네는 또 다른 문제작을 살롱에 제출합니다. 바로 [올랭피아]입니다.

이 작품은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참고한 구성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티치아노가 이상화된 신화적 여인을 그렸다면, 마네는 현실 속 매춘부를 그대로 화폭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여성이 정면을 빤히 응시하는 태도는 기존 회화 속 수동적인 누드와는 명확히 달랐고, 관객에게 강한 불편함을 안겨주었습니다.
화면 속에는 흑인 하녀가 꽃다발을 들고 등장하는데, 이는 단순한 배경 인물이 아니라 당대 프랑스 사회의 인종적 위계와 이국 취향 소비 문화를 암시하는 요소였습니다. 또한, 여인의 발치에 있는 검은 고양이는 고전 회화 속 순종적인 강아지 대신 불길함과 독립성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해석되었습니다.
마네는 이처럼 단순한 누드가 아니라, 여성의 성, 사회적 계층, 인종, 자본이 얽힌 당대 현실을 회화 속에 그대로 끌어들였습니다. [올랭피아]는 단지, 미적으로 아름답고 조화로운 그림이 아니라, 파리 사회의 이중성과 위선을 드러내는 고발이었습니다.

그리고, 인상주의의 시작
낙선전은 단순히 탈락한 그림을 전시한 보조 전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제도권 미술에 균열을 낸 사건이자, 미술계 내부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화가들에게 하나의 출구를 제공한 계기였습니다.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과 [올랭피아]는 거센 비판을 받았지만, 당시의 동료 젊은 화가들에게는 도리어 강한 자극과 영감을 주었습니다. 마네가 먼저 받은 조롱과 논란은 이후 화가들에게 두려움 대신 도전을 선택하게 만들었습니다.
낙선전에 전시된 작품들은 미학적 관점에서는 제도 미술의 기준을 어긴 것으로 보였지만, 그 속에는 새로운 시대의 감각이 반영되어 있었습니다.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주제, 감정이 배어 있는 붓질, 즉흥적인 구도와 빛의 표현 등은 이후 인상주의 회화의 핵심이 되는 요소들입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마네와 가까웠던 화가들, 모네, 르누아르, 드가, 바지유, 시슬레 등은 점차 기존의 살롱 제도 밖에서 자신들의 전시를 기획하려는 움직임을 보입니다. 결국 1874년, 그들은 첫 번째 '비공식 전시회'를 개최하며, 여기서 모네의 [인상, 해돋이]가 전시되며 '인상주의'라는 이름이 붙게 됩니다. 마네는 이 전시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실험과 시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그들의 정신적 지주였습니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마네를 정신적 지주로 여겼던 이유는, 그가 누구보다 먼저 '현대'를 회화의 주제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마네는 도시인의 삶, 일상, 신문 기사에서 나올 법한 사건을 고전적 구도에 얹어 재해석했고, 기존 회화의 문법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면서도 그 내용을 근본적으로 바꾸었습니다. 특히 빛과 색채의 처리에서 평면성과 대비를 강조하는 방식은 인상주의 회화가 나아갈 방향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습니다.
마네는 그들과 함께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기술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살롱에서 탈락한 이들을 직접 격려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그는 실천과 사유 모두에서 동시대 젊은 화가들의 롤모델이 되었습니다.
클로드 모네가 남긴 "우리 모두는 마네에게 빚지고 있다"는 말은 단순한 존경을 넘어선 표현이었습니다. 모네와 동료들은 마네가 없었다면 자신들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 여겼고, 마네가 처음 감수한 거부와 조롱의 시간 없이는 인상주의의 등장이 불가능했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 말은 곧, 한 사람이 견뎌낸 예술적 싸움이 그 이후 세대의 언어가 되었다는 의미였습니다.
한 편, 마네는 죽을 때까지 국립 살롱에서 자신의 작업이 공적으로 인정받기를 바랐고, 실제로 말년에는 살롱에서 상을 수상하며 어느 정도 그 바람을 이루었습니다. 이러한 선택은 다소 모순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마네의 태도는 당시 미술계의 구조를 감안하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살롱전은 국가가 공식적으로 후원하는 유일한 전시회였고, 이를 통해 화가들은 작품을 판매하고 명성을 얻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마네는 체제를 무작정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제도의 내부에서 변화를 일으키기를 바랐고, 기존의 권위와 정면으로 대결하면서도 제도권 안에서 자신의 예술이 정당하게 평가받기를 희망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아카데미에 복속되지 않았지만, 국가 미술의 중심에서 현대적 회화를 수용하게 만드는 데 목표를 두었습니다. 제도 밖에서 외치는 대신, 제도 안에서 바꿔 나가려는 마네만의 싸움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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