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딩에서 디자인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디자인이 아니라 '브랜드'고, 브랜드는 곧 '비즈니스'다.
- 조수용 前) 카카오 공동대표
브랜딩에서 디자인은 중요하지 않다.
이는 꽤 오래된 명제다.
디자이너인 나로서는 반사적으로 변명이 떠오른다. 디자인이 브랜드의 본질을 표현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도구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분명 디자인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명제의 핵심은 디자인이 브랜딩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있다.
브랜딩이란 디자인을 비롯 어떤 언어로든 브랜드를 규정하는 그 순간에 완성하는 개념이 아니라, 브랜드가 지향하는 가치를 이루기 위한 연속적인 움직임에 가깝다. 브랜딩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이들이 갖는 브랜딩에 대한 환상은 무형의 브랜드 가치가 감각으로 인지되는 유형의 자산에서 온다는 착각에서 비롯된다.
01. 브랜딩에서 디자인이 중요하다는 환상
브랜드와 디자인의 관계를 이해하는 쉬운 비유는 사람의 외모이다.
외모는 사람을 특정 짓는 가장 간편한 도구다. 또한 그것만으로도 상대방에게 호감을 주는 자산이며, 경쟁력이다. 하지만 사람의 본질적 가치를 외모가 결정할 수 있을까? 이를테면 운동으로 체형을 탄탄하게 가꾸거나, 질병이나 노화, 혹은 성형 수술로 외모가 바뀌었을 때, 그를 이전과 다른 사람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성격, 사회적 지능, 사고력, 철학, 가치관, 라이프스타일과 같이 어떤 사람의 그다움을 결정짓는 본질적 요소들은 대부분 눈에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오랜 시간을 두고 그를 경험해야지만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무엇보다 그 당사자조차도 자신다움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많은 관찰과 성찰이 필요하다. 외모는 누군가를 묘사하기에 가장 편리한 도구임에 분명하지만, 그다움을 온전히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브랜딩에서 디자인은 외모의 역할을 한다. 브랜딩을 디자인 관점에서 접근하는 방식은 매우 쉽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부분만 치장하면 브랜드가 될 것이라는 접근은 놀라울 만큼 일차원적이고 편리하다. 그러나 그 편리함에는 늘 한계가 뒤따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브랜드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디자인은 매우 중요한 브랜드 자산이지만, 누구나 쉽게 복제할 수 있는 유형(有形)의 자산이라는 한계를 지닌다.
브랜딩은 표현으로 구성되는 개념이 아니라, 브랜드가 추구하는 가치와 시장 지위를 위한 지속적 행위이다. 브랜드는 시대를 향유하는 생명체인 까닭에 시대의 흐름과 니즈에 부응하지 못하면 언제고 도태되기 쉽다. 디자인과 같은 표현 방식은 시대의 요구와 환경에 맞게 끊임없이 변하고 재구성된다. 이를테면 명품 브랜드의 디자인 자산들이 모바일 환경에 적합하도록 진화한 것처럼 말이다. 브랜딩을 지속하기 위해 브랜드와 디자인을 의도적으로 구별할 필요가 있다. 끝없이 진화해야 하는 숙명을 지닌 브랜드의 관점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가치와 변경해도 좋은 자산을 분별해야 한다.
"저는 제가 작업한 호텔을 ‘디자인했다.’ 그러면 굉장히 불편해요. 디자인은 아주 작은 부분이거든요. 본질은 제품 개발이나 사업 계획에 가깝고, 디자인은 생각이 정리되면 간단하게 나오는 결과물이에요.”
- 네스트 호텔 브랜딩과 관련한 대담, 조수용 카카오 전 대표
02. 브랜딩은 디자인이 아닌 경영 전략
브랜딩은 애초에 디자인 용어가 아니다. 브랜딩은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전략이다. 심플하게 정의하자면 브랜드의 존재 이유는 브랜드가 추구하는 시장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다. 하지만 시장에는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무수한 브랜드가 존재하고, 브랜드 간의 차별성을 보이기 어려울 뿐 아니라, 수요 역시 한정적이다. 결국 한정된 수요를 확보하고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브랜딩의 핵심 목표가 된다.
과거 공급 중심으로 움직이던 시장은 이제 수요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시장에는 이미 너무나 많은 브랜드가 있기에 뛰어난 제품과 서비스, 아름다운 디자인만으로는 브랜드의 성공을 장담하기 어렵다. 이미 모든 것이 필요에 넘치게 존재하고, 모든 서비스와 상품이 저마다의 가치를 주장하는 상황. 진짜 가치 있는 브랜드를 구별하는 것은 물론 어떤 브랜드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 되었다.
2011년, 하버드 경영대학원 문영미 교수는 저서, 디퍼런트(Different)를 통해 브랜딩의 시대를 언급했다. 그는 이 시대를 과잉 성숙 시대라고 정의하며 차별화된 브랜드 전략의 필요성에 대해 말한다. 브랜딩의 시대라는 언뜻 낭만적인 표현 뒤에는 공급 과잉과 한정된 수요, 생존이라는 냉혹한 현실이 존재한다.
03. 과연 무엇을 위한 브랜딩인가?
나이키, 스타벅스로 회자되는 브랜딩의 눈부신 성공 신화는 오직 승자의 몫이다. 도태되어 사라진 패자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우리 곁에는 여전히 너무나, 너무나 많은 브랜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브랜드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원하는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서 무수한 전략들이 동원된다. 브랜딩은 소비에 남다른 당위성을 부여하여 브랜드의 생존과 번영을 돕는 전략적 움직임이다. 트렌드를 거스르는 역브랜드 전략, 접점이 없는 카테고리 특성과 믹스하는 일탈 브랜드 전략, 대중성을 거부하고 비주류의 명확한 고객을 확실하게 타깃 하는 적대 브랜드 전략 등 브랜드가 취하는 전략들은 단 하나의 목표, 확고한 시장 지위 확보를 위해 존재한다.
모든 브랜드는 어떻게 하면 유사한 디자인과 제품력을 지닌 경쟁사보다 더 높은 가치를 증명할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그래야만 시장에서 생존할 수 있는 것이다. 문영미 교수는 과잉성숙 시장에서는 필요가 아니라 가치관, 취향, 자아실현에 기반한 소비가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단순 뛰어난 품질과 예쁜 디자인과 같은 일차원적인 가치만으로 브랜드가 되기란 어렵다. 기존의 가치에 남다른 라이프스타일, 가치관, 취향, 감성, 문화를 제시해 보다 높은 차원의 가치를 설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브랜드가 아니라 품질과 디자인에 불과하다.
브랜딩의 시대, 디자인은 브랜딩이 될 수 있을까? (1) :
브랜딩에서 디자인은 중요하지 않다 (1/2)
브랜딩에서 디자인은 중요하지 않다 (2/2)
다음 레터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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