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가 되는 시간_지키는 글쓰기_허태준

2021.11.12 | 조회 6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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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총 20여명의 작가들이 세상의 모든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매일 전해드립니다.

슬슬 저녁을 먹어야지 않겠냐는 케이의 말에 감았던 눈을 떴다. 잠깐 누워서 쉬려던 게 어느새 한 시간을 훌쩍 넘겨버렸다. 요즘에는 항상 그랬다. 새로운 직장에서 잘 지내는 것과는 별개로,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기간 동안은 몸이 무거웠다. 봄으로 다가서는 계절의 발걸음처럼 나의 일상에도 환절기가 오는 거라고 생각했다. 낮과 밤의 온도차가 심하고, 감기에 걸리기 쉬웠다.

냉장고를 열어본 나는 미리 해놓은 반찬이 없다는 걸 깨닫고 한숨을 쉬었다. 쌀도 다 떨어지고, 심지어 싱크대에는 이틀 간 미뤄둔 설거지거리가 가득 쌓여 있었다. 모두 내 불찰이었다. 케이와 함께 살 때 요리와 설거지는 모두 내가 하겠다고 말했다. 직장을 다니게 됐다고 해서 갑자기 그 이야기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나는 남아있던 마늘을 꺼내 다지고, 달궈둔 팬에 올리브 오일을 둘렀다. 그 사이 다른 냄비에 물을 끓이며 라면봉지를 뜯었다. 파스타 면이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은 아쉬운 소리할 때가 아니었다.

약불에 마늘이 적당히 익었을 때쯤 고춧가루를 한 큰술을 넣고 타지 않게 계속 저었다. 그래도 우유가 남아있어 다행이었다. 그냥 라면이라도 이래저래 신경을 쓰면 그럴듯하게 만들 수 있었다. 붉은 기름이 나오기 시작한 팬에 우유를 붓고, 라면 스프를 하나 넣었다. 이제 삶아진 면을 옮겨 담아 조금만 더 끓이면 됐다. 나는 팬 바닥이 늘러 붙지 않도록 신경쓰며 방에 있는 케이를 불렀다.

케이는 부엌으로 나와 상을 차릴 준비를 하더니, 잠시 멈칫했다. 젓가락이 없네. 그는 나무젓가락을 찾겠다며 부엌 서랍 여기저기를 뒤적거렸다. 평소라면 금세 발견하던 나무젓가락이 오늘은 쉽게 보이지 않는 듯 했다. 큰일이네, 하나 밖에 없는데. 케이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사뭇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나는, 솔직히 그게 좀 짜증났다.

그냥 내가 이거 해놓고 설거지 할게. 그렇게 말하며 삶은 라면을 팬으로 옮겼다. 뜨거운 김이 얼굴 밑으로 훅 끼쳤다. 풀어진 면이 퍼지지 않게 나무 주걱으로 계속 저으며 급하게 치즈 파우더를 뿌렸다. 불을 끄고 싱크대로 고개를 돌리자, 케이는 이미 젓가락 하나를 씻어 가져오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보이지 않도록 작게 한숨을 쉬었다.

좀 예민한 걸 수도 있는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아까 말이야, 비아냥 대는 것 같아서 좀 그랬어. 케이는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하나씩 기억을 되새겨보듯 나에게 물었다. 어떤 점이? 젓가락이 없는 건 내가 설거지를 안 했기 때문이잖아. 내 탓이지. 그냥 그렇게 말하면 내가 사과하면 되는데, 자꾸 나무젓가락을 찾으니까, 또 그게 없는데 네가 계속 찾고 있으니까. 이건 나 맥이는 건지 싸우자는 건지 사과하라는 건지 감이 안 잡히더라.

케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럴 의도는 없었다고, 별 생각 없이 했던 말이라고, 그래도 나쁘게 들렸다면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애초에 설거지를 하지 않은 내 잘못이라고, 아무 의도 없는 거 아는데, 괜히 내가 찔려서 더 나쁘게 들었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 말을 하는 동시에 한 가지 생각이 더 들었다. 이제 내가 진짜 혼자 살아야 할 때가 온 것 같다고.

케이는 뭘 그렇게까지 생각하냐고 했다.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거 아니겠냐고. 요즘 직장도 다니고 글도 밀려 있으니까 조금 예민한 거 아니겠냐고.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내가 처한 상황일 뿐, 우리가 했던 약속을 어길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매 순간 그럴 수 없더라도 어느 정도의 감각은 잊지 말아야 했다.

때로는 투정을 부리고 싶을 수도 있다. 사람이니까. 실제로 많은 이들이 그런 감정을 주고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게 당연한 일은 아니지 않을까. 내 투정을 받아주는 사람이, 그래도 되는 사람은 아니지 않나. 오히려 그 사람 밖에 받아주지 못하는 감정이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그들은 나를 살리는 사람이지 않나. 각자의 방식으로 나를 구하는 게 아닌가. 모두에게 감사를 표하지는 못하더라도 스스로는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 같았다.

*

식사를 마친 우리는 각자 해야 할 일을 했다. 나는 쌓여 있는 설거지를 처리했고, 케이는 몇 군데에 흩어져 있는 일반 쓰레기를 종량제 봉투에 모았다. 내가 음악을 좀 틀어 달라고 해서, 그는 유튜브에 있는 아이유 노래를 연속재생으로 틀었다.

각자의 일을 마무리 한 후에는 미리 돌려놓았던 빨래를 함께 널었다. 열어둔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왔고, 젖은 옷들이 피부에 감기며 시원한 기분이 밀려왔다. 한숨을 밀어내는 듯한 시원함. 나는 컵에 얼음을 담아 아이스커피를 만들고, 책상에 앉아 몇 가지 단어와 문장을 썼다. 케이도 당연하다는 듯 방으로 들어가 다시 그림을 그렸다. 스피커에서는 아이유의 ‘밤편지’가 낮은 볼륨으로 흘러나왔다. 여기 내 마음 속에- 모든 말을- 다 꺼내어 줄 순 없지만-

돌이켜보면 이 집에 처음 들어온 것도 여름이었다. 더운 기운이 훅 끼치던 방에는 내가 병원에 있는 사이 부모님과 케이가 옮겨 놓았던 짐이 쌓여있었다. 잡동사니가 든 상자 하나, 옷 박스 두 개, 나머지는 전부 책이었다. 베란다 창가 옆에 책상과 책장을 두고 하나씩 짐을 정리했다. 책장 가장 밑에는 고전소설, 그 위에는 하루키, 가운데는 한국소설과 수필, 위쪽에는 아트북과 전시화집을 꽂았다. 각자의 자리가 있었다.

그때 케이가 나에게 함께 살자고 말해주지 않았다면, 삶은 여전히 정리되지 못한 채 박스 안에서 방치됐을 것이다. 눅눅한 습기에 질려 금방 삭아버렸을지도 모른다. 모든 걸 포기하기 좋은 때였는데, 나는 결국 아무 것도 포기하지 않은 채 다시 여름을 맞이하고 있다. 그 사이 내 이름이 적힌 책이 한권 나왔고, 새로운 직장을 구하고, 9개월간의 결핵 치료가 끝이 났다.

오늘의 생각은 단순한 변덕이 아니었다. 오히려 의아함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자연스러운 변화 중 하나였다. 환절기마다 불어오는, 필요 이상으로 많은 것이 담긴 바람처럼. 나는 자신의 상황이나 감정 때문에 케이에게 필요 이상의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가 기꺼이 너그러움을 베풀어주더라도 말이다.

사람이니까, 살아가는 것만으로 누군가를 아프게 한다. 사람이라서, 그 당연한 사실을 자주 잊는다. 상대방의 너그러움을 자신의 능력이나 권리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소중한 이들에게 자신을 정당화 시키는 걸 습관화해서는 안 된다. 그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일일 것이다. 삶에서 힘을 키워 맞서야 하는 건, 평생을 싸워야 하는 건, 언제나 누군가를 상처 입히고자 하는 내면적인 욕구일 것이다.

새벽까지 기온이 높았던 밤,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 쓴 나는 땀에 흠뻑 젖어 눈을 떴다. 어스름한 빛이 창문 너머로 흘러와 방의 윤곽에 닿았다. 2층 침대에서 케이의 숨소리가 들렸지만, 왠지 아주 먼 곳에서 들리는 것만 같았다. 외롭지도 않고, 무섭지도 않고, 그렇다고 애틋하거나 그립지만도 않은 시간 속에서, 나는 천천히 혼자가 되고 있다. 그 시간을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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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키는 글쓰기' 글쓴이 - 허태준

고등학교 졸업 후 곧바로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당시의 경험을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 라는 책으로 담았습니다. 지금은 부산의 출판사에서 책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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