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미쓰 홍당무>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혼자 하는 사랑도 나쁘지 않아요. (중략) 그대 떠난 시간속에 남아 그 사랑도 할 수 없다면 나는 살지 못해요."
가수 앤의 '혼자하는 사랑'이라는 곳의 가사다. 이 영화를 볼 때 나는 자주 이 노래를 떠올린다. 여기 주인공만큼 철저히 혼자 사랑하는 이가 또 있을까 싶어서. 짝사랑은 흔히 풋풋하고 가슴 아린 맥락에서 언급된다. 하지만 그녀의 짝사랑은 좀 다른 것 같다.
여자 고등학교에서 러시아어를 가르치는 양미숙(공효진)은 인기가 없다. 선생님에게도 없고, 아이들에게도 없다. 심지어 가르치는 과목도 인기가 없다. 러시아어 수업이 없어지며 양미숙은 갑자기 중학교 영어를 가르치게 된다. 그러나 그조차도 잘하지 못해 아이들에게 무시당한다.
양미숙은 같은 학교 서종철(이종혁) 선생님을 몰래 짝사랑한다. 사실 이 사랑은 오래됐다. 그녀가 고등학교 때 서종철은 담임 선생님이었다. 그러니까 졸업 후 교사가 되어 담임 선생님과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게 된 것이다. 학창 시절부터 시작된 양미숙의 사랑은 서종철이 결혼을 하고, 동료가 된 후에도 이어진다.
문제는 이 사랑이 한 방향이라는 것, 그런데도 그녀는 서종철이 자신에게 어느 정도 마음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녀는 혼자 사랑하면서, 혼자라는 사실을 모른다.
영화의 초반부에 나오는 장면이 재밌다. 양미숙은 학교 길가에서 열심히 삽질을 한다. 그러면서 서종철에게 자신의 전화를 받지 않은 이유를 따져 묻는다.
선생님은 오전에 제 전화를 일부러 안 받았거나, 알면서도 모른 척 하신 게 맞는거죠? 선생님 마음은 너무 복잡해서 너무 힘드신 거예요, 저 때문에. 괜찮아요, 제가 기다릴게요.
서종철은 아내의 전화를 받으며 자리를 떠나버린다. 아아, 공감성 수치. 이 장면은 둘의 관계를 그대로 보여준다. 하지만 양미숙의 착각은 계속된다. 그런 그녀에게 한 가지 걱정이 있다. 같은 학교에서 이쁘기로 유명한 이유리(황우슬혜) 선생님이 아무래도 서종철이 밀월 관계인 것 같다. 양미숙은 같은 학교에 다니는 서종철의 딸 서종희(서우)와 절친이 되어 서종철-이유리 방해 작전에 나선다.
영화에는 이런 대사가 자주 반복된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거예요. 아무리 이상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이해할 수 있는 거라고, 영화는 고집스럽게 강조한다. 그렇다면 양미숙의 착각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걸까. 그녀는 어째서 의미 없는 착각을 계속할까.
영화를 보다 보면 알게 된다. 이 사랑은 그 누구도 아니라 양미숙 자신을 위한 것. 그녀는 마음을 주고받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동력 삼아 일상을 살아간다. 이유리를 지질하게 방해하는 일조차 숨 막힌 일상을 굴리는 원동력이다. 영화에서는 양미숙과 서종희가 축제 때 올릴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함께 연습하는 장면이 나온다. 누구인지 모를 고도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시간 자체가 작품이 되는 것처럼, 맘속의 사랑을 바라보며 아파하고 사소한 일에 즐거워하는 것이 양미숙의 삶이다. 다시 한번 앤의 노래를 떠올려 본다면 "그 사랑도 할 수 없다면 (양미숙은) 살지 못" 한다.
하지만 그 사랑은 지속될 수 없다. 언젠가 깨질 수밖에 없고, 깨져야 한다. 양미숙은 결정적인 사건을 겪으며 자신의 사랑이 착각임을 깨닫는다. 서종철이 보낸 문자에 붙은 하트는 자동 서비스였고, 그는 자신이 베풀었던 사소한 배려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모텔의 커튼을 열어젖히자 창문 대신 벽이 나온다. 양미숙이 알던 세상은 가짜. 착각으로 지은 세상이 허물어진다.
앞부분의 재기발랄함에 비교하면 모든 사실이 폭로되는 '영어 듣기실'의 씬은 몰입도가 떨어진다. 인물들은 너무 단순하고 간단하게 사실을 토로하고, 서로 수긍하고, 갈등을 해결한다. 서사적으로 아쉽지만 중요한 것은, 양미숙이 마침내 자기만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진실을 직면한다는 것이다. 어떤 경로로 이곳에 이르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서종철은 양미숙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외면할 수 없는 아픈 진실이 여기 있다.
선생님 혹시 저한테 전화하고 싶으신 적 있으셨어요? 아무 일도 없는데 그냥요.
단 한 번도 없었다.
사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전 매일매일 전화하고 싶었어요, 그냥.
인정과 고백. 그렇게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할 한 토막의 진심을 남기고 양미숙은 떠나간다.
이 영화의 마지막이 정말 좋다. 양미숙과 서종희는 기어이 학교 축제 무대에 오른다. 모든 학생들이 "찐따"를 외친다. 하지만 영화는 이 잔인한 합창에 유쾌한 음악을 입힌다. 둘은 씩씩하게 무대를 마친다. 전교생이 던진 휴지를 응원의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보니, 그들은 여전히 어느 정도의 착각에 빠져있다.
그러나 양미숙은 달라졌다. 그녀를 향한 세상의 조롱은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영화는 잔인하게 말한다. 어쩌면 진실에 가까운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현실을 유희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직시하고 나아가는 것. 그리고 기어이 즐겨버리는 것. 그 과정을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 그것만이 중요하다고 영화는 말한다.
여기저기 실수 남발인 그녀를 좋아하기란 쉽지가 않다. 영화 속 양미숙은 귀엽지만 세상의 수많은 양미숙은 그다지 귀엽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미쓰 홍당무>를 보고서 내 안의 양미숙을 안아주기로 한다. 맞아, 모든 것은 쉽게 변하지 않을 거야. 네가 이쁨받기란 쉽지 않을지도 몰라. 하지만 잊지 말자. 우리가 함께, 즐거울 수 있다면, 약간 아픈 현실도 모두 다 괜찮아질 것이다.
[코너] 연애하는 영화
연애 영화를 한 편씩 꼽아 함께 들여다보며 인간의 감정과 관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영화에 관한, 그보다는 마음에 관한, 사실은 당신과 우리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공간.
[필자 소개] 홍수정 영화평론가
혼자서 영화와 글을 좋아하다가 2016년 '씨네21'을 통해 영화평론가로 등단, 활동을 시작했어요. 잡지와 웹진에 영화, OTT, 문화에 대해 쓰고 있습니다. 재밌게 읽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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