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출판 경력은 좀 드라마틱한 편이다. 어쩌다가 《마법천자문》으로 대박이 난 그 출판사에서 시작했다. 회사는 영어 버전 《마법천자문》을 만들어 또다시 대박을 터뜨리고자 했는데, 이를테면 독수리(eagle)와 카펫(carpet)을 합쳐 ‘이글카펫’이란 캐릭터를 만들고 스토리를 입혀 영어를 배우는 콘셉트였다. 이른바 ‘에듀테인먼트’가 최고로 유행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나의 철학에 의하면 공부란 원래 어렵고 힘든 것...... 나의 철학에 반하여 1년 남짓 만에 퇴사하기로 한다.
두 번째 회사는 성인 단행본을 만드는 회사였는데, 또 어쩌다가 거기서 어린이 그림책을 만드는 팀에 들어가게 되었다. 나는 그 팀의 첫 번째이자 유일한 팀원이었다. 내가 그림책을 만든다고 하니 나의 친구들은 아니 된다고, 어린이들을 검게 물들이면 아니 된다고 말렸다. 그런데 그림책을 만들면서 반대로 내가 ‘어린이화’되는 희한한 경험을 하게 된다. 나는 그림책을 보면서 맑은 기운을 받았는데, 그림에는 뭔가 치유의 기능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행복한 한때였지만, 나는 그림책을 통해 충분히 치유에 이르게 되고...... 이만 그림책에서 발을 빼기로 한다.
세 번째 회사는 두 번째 회사의 모회사로, 거기서는 세계문학전집을 만들었다. 한 3년 반 동안 내가 편집한 책이 16종 정도 된다. 《데미안》과 《롤리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목로주점》을 비롯, 주옥같은 책들이다. 나는 거기서 작가에 대한 존중, 텍스트에 대한 존중을 배웠다. 지금도 그 책들의 판권에 남아 있는 내 이름을 보면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아마 내가 가장 집중력이 좋고 생산력이 (반강제로) 왕성할 때가 아니었나 싶다. 그 시절 에피소드들을 이야기하자면 출판계 친구들이건 작가님들이건 다들 울고 웃는데, 그 얘기는 다음 기회에……
네 번째 회사는 이것저것 다 출간하는 종합출판사였는데, 한 3개월 동안은 일이 너무 힘들어 울면서 다녔다. 정통 외국문학을 만들다가 경제경영서, 자기계발서, 교양과학, 자연에세이, 정치가의 평전, 하드한 인문서, 소프트한 에세이 등 가리지 않고 다 만들었다. 원래 문학을 전공한지라 내가 행동경제학책이나 미래학책을 읽게 될 줄, 심지어 편집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 시절을 거치니 지금은 겁나는 책이 별로 없다. 거기서 편집 일을 하며 이른바 ‘포장이란 무엇인가’를 배웠고, 조직생활을 하면서 처음으로 ‘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다섯 번째 회사에서의 첫 번째 기획은 그리하여 《민주주의는 회사 문 앞에서 멈춘다》가 되었다. 사회과학은 X도 모르는데 또 어쩌다가 인문사회팀에 들어갔다. 입사해보니 기획된 책이 별로 없어서 1년에 열 권 가까이 기획을 했던 것 같다. 기획하고, 편집하고, 그 실험(?)의 결실들을 쓰든 달든 맛볼 수 있었던, 나의 출판기획의 편력시대가 아니었는가, 생각한다. 내가 사랑하는 작가님들과는 대부분 이때 연이 닿았다. 여기서 작가님들이랑 책을 만들면서 지지고 볶고 노는 일이 내 적성에 맞는다는 걸 깨달았다. 비로소 ‘편집자 정체성’이 생긴 것이다.
여섯 번째 회사에선 아주 잠깐 발을 담갔다. 처음 여기 입사할 때부터, 내가 회사생활을 한다면 여기가 마지막이 되지 않겠는가 생각했었다. 2006년 하반기부터 편집자 일을 시작했으니 올해로 16년 차다. 때가 되었다. 자유란 무엇인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고민하게 되었고, 나는 결국 회사를 박차고 나오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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