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9 퇴사는 막고 싶은데..._부캐의발견_지은이

어쩌다 퇴사를 해버린 사연

2023.05.11 | 조회 1.1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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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총 20여명의 작가들이 세상의 모든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매일 전해드립니다.

* 서른 일곱, 지극히 평범한 회사원 집안의 둘째딸로 태어난 지은이라는 사람이 적어도 7가지가넘는 ‘업(業)’이라는 것을 넘어가는 과정 속 시간, 비용 두려움이라는 존재와 싸우며 부캐(부캐릭터)를 얻어간 순간의 이야기들.


 

안녕하십니까! 신입 인턴 지은이 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2011, 대학을 졸업하기 한달 전 1, 취업 혹한기에 바늘구멍을 뚫고 원하던 회사에 첫 출근을 했다. 그곳은 외국계 마케팅 리서치 기업이었는데, 나의 사진과 이름이 새겨진 사원증을 받는 순간 이제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았다. 목걸이로 된 사원증을 하루 종일 몸에 붙은 자석처럼 걸고 다녔다. "저 이곳에 다니고 있어요."라고 말하고 싶었나 보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지만, ‘직장인이 된 나 자신이 무언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인턴이 마무리되자 연구원이라는 직함이 따라왔다. 나는 마케팅 리서처로 기업과 소비자 사이에서 소비자들의 마음을 알아보고 기업에 전달하는 일’을 했다. 설문조사를 만들고, 결과가 나오면 엑셀에 빼곡히 박힌 숫자들을 바라보다 PPT 보고서를 만드는 것이 주로 하는 일이었다. 그곳에서 하루는 참 길었지만 시계의 속도는 두배 정도 빨리 흘러갔. 일은 많았지만, 하나의 프로젝트가 끝나면 새로운 고객사를 만나 또 다른 일을 시작할 수 있어 지루하지 않았다까만 밤 반짝이는 한강 야경을 바라보며 퇴근하는 일년이 후루룩 지나가 버렸다.

깜깜한 밤 반짝이는 야경을 바라보며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마음은 가벼웠다 (출처: 유토이미지)
깜깜한 밤 반짝이는 야경을 바라보며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마음은 가벼웠다 (출처: 유토이미지)

 

하지만 생체시계는 신기하게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369 증후군(직장인들이 입사 후 3개월, 6개월, 9개월 무렵 반복적으로 심한 스트레스를 느끼는 현상)이 남들보다 일찍 찾아왔다. 몸이 아픈 주기가 잦아졌다. 토요일이 오면 여러 곳의 병원 투어를 하느라 반나절은 금세 사라지곤 했다. 결국, 2년 후 몸에 고장이 나버려 입원까지 하게 되었다.

아마 그때가 분기점이었나 보다. 일은 좋지만 나의 5년, 10년 후를 상상하자 ‘불안’이라는 블랙홀이 나의 경계선을 넘어 마음 한 가운데 자리를 차지해버렸다. ‘이곳을 떠나야 하나?’의 생각이 머리에 맴돌았다. 분명 얼마 전까지 나의 미래는 그 기업의 사장이었는데, 마음이 정반대가 되어버렸다. 유난히 여성 임원이 많고, 배우며 따라가고 싶은 이들이 있음에도, 10년 후의 나를 상상하면 이유 없이 불행한 표정만 그려졌다. 그런 나날들이 이어졌다.

불행이라는 생각이 시작되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어두운 상상이 이어졌다. ‘이곳에 몇 년 더 있으면 큰일날 것만 같아.’라는 마음도 가끔 들었다. 누군가 따라오지 않지만 쫓기는 듯한 기분이 드는 시간이 이어졌고, 나의 표정과 행동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매일 보는 가족들과 친구들도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까만 마음을 품고 살아갔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은 나를 좀비처럼 만들어 버렸다 (출처: 유토이미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은 나를 좀비처럼 만들어 버렸다 (출처: 유토이미지)

 

하지만 최악이라는 생각열차는 깊은 심해로 더 깊이 들어가지 않고 다시 수면으로 올라왔다. 한손에는 책을, 나머지는 언니 손을 꼭 잡은 채 말이다. 나의 언니는 당시 미술치료사라는 직업인이었다. 그 이유로 집 곳곳에는 ‘심리학’ 책들이 흩어져 있었고 ‘불안과 스트레스’에 사로잡힌 나는 그 책들을 조금씩 읽어보기 시작했다. 더해서 나의 달라짐을 알아챈 언니는 “좋은 곳이니까 나만 따라와”라는 말을 하며 ‘집단 심리치료 센터’로 데려갔다. 종이를 찢고, 물감으로 색을 칠하면서 나의 마음을 표현해 보는 시간이 늘어났다. 자연스럽게 나의 마음 공간에는 ‘불안’ 대신 ‘스트레스를 어떻게 잘 풀어낼 수 있을까?’ 라는 생각으로 채워져 갔다.

소비자의 마음을 읽어내던 사람이 어느샌가 나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은 사람으로 바뀌어갔다. 일을 잠깐 쉬는 시간이 생겼을 때는 직장인 스트레스라는 키워드로 폭풍 검색도 해보고, 개인 상담도 받아 보았다. 그 사이 이직을 했고 새로운 직장에서 다시 일을 하기 시작했지만, 마음 속에 생겨난 궁금증은 점차 커져갔다. 나같이 도망가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상담사라는 직업이 눈에 들어왔다. 찾아보니 조직 상담이라는 학과가 있는 대학원이 가까이 있었다. 눈앞에 새로운 길이 조금씩 열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또 다른 걱정이 나의 마음 문을 두드렸다. ‘학생이 되면 수입이 갑자기 사라진다?’는 상상은 퇴사보다 더 무서운 그림이었다. 평범한 집 둘째딸이던 나는 학비는 국가에서 빌리면 되지만, 퇴직한 아빠에게 용돈까지 보태 달라는 차마 할 수 없었다. 현실적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공부와 병행할 수 있는 일자리가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채용 사이트에 매일 출근도장을 찍고 마우스를 꼭 쥔 채 스크롤을 내렸다. 

공부에는 시간과 돈이 많이 들어 또 다른 일자리를 찾을 수 밖에 없었다 (출처: 유토이미지)
공부에는 시간과 돈이 많이 들어 또 다른 일자리를 찾을 수 밖에 없었다 (출처: 유토이미지)

 

그러던 어느 날, 공고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업무 중에 일정 시간은 개인 시간으로 쓸 수 있는 사무직 구함. ‘뭐지?’라는 생각과 동시에 주소를 살펴보니 집에서 십오분 거리인 곳이었다. 최저임금이라는 허들이 있긴 했지만 아주 가볍게 넘어갈 수 있었다. 후다닥 지원서를 제출했고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면접 연락이 왔다.  

학교를 다니기 위해 지원했습니다.”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괜찮습니다. 다음주부터 출근하세요.”라는 말이 돌아왔다. 그렇게 퇴사를 하고 싶던 나는 또 다시 오전 9시에 출근하는 직장인이 되었고, 3개월 후 대학원 시험을 보았다. 그리고 입사 후 6개월이 지나자 학생이 될 수 있다는 합격증도 받았다

두 가지의 일을 하게 되었지만 지갑은 더욱 얇아졌다. 공부에는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었다. 약속을 줄이고, 별다방 커피에서 사무실 스틱 커피로 갈아 탔지만 전혀 슬프지 않았다. 학교에 가는 날이면 퇴근길이 두근거렸다. 그렇게 직장인에 '스트레스 연구자'라는 또 다른 자아가 점점 자라나기 시작했다.  첫 직장의 지인들은 손이 급할 때 나에게 프리랜서로 일을 맡겼다. 사라질 뻔했던 리서처로서의 자아도 가끔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도망치고 싶었던 일을 '프리'하게 다시 해 보니 사라졌던 애정도 샘솟았다. 일은 끊이지 않고 간간히 들어왔고, 신기하게도 꼭 필요한 만큼의 돈은 계속 채워졌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놓아야 한다'.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 하나가 나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 되니 두세개로 나누어서 조금씩 쥘 수 있었다. 더해서 '꼭 해야만 해'가 아니라 '천천히 해도 돼'의 마음이 더해지니 가끔씩 올라오던 불안감도 내려갔다. 369 퇴사욕구는 그렇게 잠잠해 졌고, 나의 부캐들은 조금씩 자라나고 있었다.

 


* 지은이

서른 일곱의 호기심쟁이 입니다. ‘직업(業)’을 넘어가는 과정에 필요한 시간과 비용, 그리고 두려움이라는 존재와 싸운 기억들을 나누고 싶습니다. 지금은 ‘스타트업 코파운더(co-founder), 상담심리사, 학생’을 병행하며, 순간의 감정을 글로 풀어내는 것을 좋아합니다. 뉴스레터 <세상의 모든 문화>에서 '부캐의 발견'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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