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어디서 살고 싶은지 발견했다 _ 안은경

2024.01.06 | 조회 9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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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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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한 군데만 더 들렀다가 가자.” 남편이 말했다. 이제 그만 공항으로 출발해야 할 시간이었다. 하루 만에 익숙해진 렌터카를 몰고 남편이 마지막으로 가보고 싶다는 곳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론 전날 본 7개의 집들과 아침에 본 3개의 집들을 떠올려 보았다. 가격도 다양했고 집들의 위치와 모양도 다 달랐다. 어떤 집은 지은 지 25년 되어 가격이 가장 싸면서도 관리가 잘되어 있었고, 또 어떤 집은 이제 막 공사를 끝낸 세련 됐지만 비싼 새집이었다. 또 어느 집은 산 중턱에, 어느 집은 강 근처에, 그리고 어느 집은 초등학교 바로 앞에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내 마음에 드는 집이 있었는지를 떠올리며 각 집들의 장단점들을 정리하느라 머릿속이 바빴다.

아이들을 시댁에 하룻밤 맡기고, 남편과 몇 달을 모니터로만 살펴보던 낯선 도시를 일박이일로 염탐하러 왔다. 이곳은 우리가 20년 살던 토론토에서 서쪽으로 5,000 km나 떨어진 곳이고, 비행기를 5시간이나 타고 와야 하며,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동네긴 하지만 우리가 정말 여기로 이사 올 수 있을지 판단하려면 직접 두 눈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쪽으로의 이사를 꿈꾸게 된 계기는 코로나와 <이웃집 토토로> 때문이었다. 강제 재택근무 기간이 길어지는 중이었고, 재택근무를 하는 이상 인터넷만 된다면 집값이 싼 곳으로 옮기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상상을 하게 되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우리가 이사를 꿈꾸는 비슷한 시기에 지브리 스튜디오 만화영화가 넷플릭스에 대거 올라왔다. 강제 집콕 중인 우리 가족은 다 같이 모여서 <이웃집 토토로>를 봤다. 그 영화엔 사츠키와 메이라는 어린 자매가 주인공으로 나오는데 딱 그 당시 우리 딸들 같아 보였다. 아픈 엄마의 병원과 멀지 않은 시골로 이사 온 가족이 숲의 요정 토토로를 만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주인공들이 이사 온 집은 거의 쓰러져 가는 시골집이었고 집 주변엔 커다란 나무가 있는 숲이 있었다. 구불구불 시골 논밭을 지나면 나오는 집이었다. 여름이면 소나기가 시원하게 내리고 비를 맞은 모든 식물들은 초록이 더욱 짙어지며 한 뼘 더 성장했다. 영화를 다 보고 나니, 나도 계절을 만져볼 수 있고 날씨를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졌다. 사츠키와 메이처럼 우리 아이들도 자연에서 뛰어놀게 해 주고 싶었다. 그러려면 나도 시골에 가야 할 것만 같았다.

“봐봐. 거의 다 온 거 같아.” 남편이 다시 말했다. “지금 가는 이곳을 보면 우리가 여기로 이사를 정말 올 수 있을지, 아니면 그냥 일박이일의 짧은 추억으로 남겨두게 될지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아.” 남편의 말에 조심스레 주변을 살펴보았다. 지난 20년간 살던 토론토에선 보지 못했던 종류의 커다란 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남편과 내가 손을 맞잡는데도 잡히지 않을 것 같은 기둥과 아파트 7층 높이는 더 되어 보이는 높이의 나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 호수로 들어가는 길은 하나였다. 작은 바다같이 큰 호숫가를 끼고 만든 도로였다. 창문을 내려 햇살에 반짝거리는 눈부신 호수를 바라보았다. 마법에 홀려 새로운 세상으로 빨려 들어가듯 호숫가 가장자리를 드라이브하며 만난 어느 공원에 차를 세웠다. 눈앞에 펼쳐진 믿기 힘든 광경을 바라보며 물 앞까지 걸어가는 그 짧은 순간 우리의 마음은 이미 정해져 버렸다.

비현실적인 호수를 바라보며 ‘이곳이다!’라고 생각했지만, 고려해야 할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집은 본것중에 가장 가격이 싸고 오래된 것으로 골랐다. <이웃집 토토로>에 나오는 집처럼 완전 시골에 큰 정원이 딸린 집을 원했지만, 현실과 타협하여 원래 살던 모양의 옆집과 양쪽 벽을 공유하는 길쭉한 3층짜리 타운하우스로 정했다. 다만 아이가 다니게 될 초등학교 바로 앞에 있는 집으로 3분이면 걸어서 학교에 도착할 수 있는 곳으로 선택했다.

막상 집을 계약하고 나니 또 다른 현실적인 걱정도 따라왔다. 인터넷으로 보니 그 동네 한 가족당 평균 연봉은 우리가 살던 토론토 동네의 반도 안 되는 액수였다. 소득의 차이가 엄청 나는 동네로 가는 데서 오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다. 그건 바로 지금의 이웃들보다 안 좋은 이웃들을 만나면 어쩌지란 것이었다. 그런 위험은 소득과 상관없이 사는 곳을 옮기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일이지만, 왠지 소득과 학력의 차이가 확률을 더 높이진 않을까 걱정도 되었다. 그곳에서 지금까지 만나보지 못했던 인간상을 만나게 될까봐, 내가 내린 결정이 잘 한 것인지 이삿짐을 싸면서도 확신 할 수 없었다. 사실 직장 생활 전까진 나도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던 저소득층 이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낯뜨거워지는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역시나 내가 불필요한 고민을 했었다는 건 다행히 그곳에 도착하자 마자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보다 3주나 먼저 보낸 이삿짐은 우리가 도착하고 나서도 한 달이나 후에 받아볼 수 있었는데, 그동안 친절한 새 이웃들은 우리가 최소한의 물건으로도 살 수 있게끔 칼, 도마, 접시, 컵, 포크, 수저, 냄비, 심지어 가구도 없이 지내는 우리를 위해 캠핑 의자와 간이 테이블도 빌려주었다. 그리고 미리 킹 사이즈 침대만 새로 주문해 보냈었는데 그건 또 우리보다 먼저 도착하는 바람에 아직 얼굴도 모르는 앞집 아주머니가 본인 집 차고에 일주일 이상 맡아 주기도 했었다.

그렇게 이웃들의 도움을 받으며, 우리 가족은 네 명이 킹 사이즈 침대 위에 다닥다닥 붙어 자면서 새로운 둥지에서의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또한 사츠키와 메이 같은 두 딸아이가 우리가 반했던 그 바다같은 호수와 사랑에 빠진 건 당연한 이야기였다.​​

 

* 글쓴이 - 안은경

캐나다 이민 22년, 지금은 한국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소소한 일상 이야기를 씁니다.

​어떻게 하면 살고 싶은 곳에서 살 수 있을지 계속 고민하며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 보려 노력하는 사람 입니다.

산과 호수를 좋아하고 읽고 쓰는것도 좋아합니다.

캐나다 2세 자녀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려 현재 한국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반갑습니다 :)

브런치 - https://brunch.co.kr/@jennifer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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