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쓰는 프롤로그_오늘도 오른다_서하도

2024.05.06 | 조회 7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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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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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즉각적인 감정 표현이 좀 어려운 일이다 

어떤 감정이 느껴져도, 바로 기쁘다, 슬프다, 혹은 화난다 하는 식으로 말하기가 어렵다. 느껴진 감정이 무엇인지 한참 맛을 보고, 그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이 된 후에야 표현하게 된다. 그래서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아까 내가 느낀 감정이 알고 보니 이것이구나'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밤 산책을 하다가 밤이슬에 살짝 젖은 작은 들꽃을 봤을 때도, 첫 느낌은 '예쁘다'인데 좀 더 생각해보면 그냥 예쁘다가 아니다. '소중'하다. 그 작은 줄기가 땅을 뚫고 올라와, 다소곳하게 화단 빈 곳을 채우고 앉아있다. 크고 화려한 꽃들이 주인처럼 자리를 차지한 곳을 피해 구석에 살짝 걸치듯 피어서, 줄기만큼이나 작은 꽃잎에 밤이슬을 머금고 있다. 언뜻 보면 눈에 띄지도 않지만 누가 보든 안 보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저 제 몫을 한다. 존재하는 게 역할이고, 자리를 채우는 게 역할이고, 크고 화려한 꽃의 배경이 되는 게 역할이지만, 말간 얼굴을 하고 거기에 있다. 이렇게 소중한 존재가 예쁘지 않을 수는 없다. 소중해서 예쁜 것이었다. 처음 보고 아, 예쁘다 하고 지나쳤다면, 나는 그 소중함이란 감정을 영영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쳤을 것이다.

 

요즘 오름에 느끼는 감정이 이런 상태다

나는 2년 전 제주대 특강 강사로 초대를 받아 제주를 처음 방문했다. 제주 공항에 내려 택시에 타서 기사님에게 ‘저 산이 한라산인가요?’라고 질문했더니 기사님이 껄껄 웃으며 제주는 처음이시냐고 반문했던 기억이 난다. 40대 후반이 되도록 제주에 오지 않은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제주를 와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었을 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관광지에 일을 하기 위해 왔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평소답지 않게 일을 마친 후 며칠 휴가를 보내기로 결심을 했다. 당시 회사에 큰 화재 사고가 나서 수습을 하느라 바쁜 상황이라 제주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조금 부담이 되었지만, 오히려 조금 휴식이 필요한 것 같기도 해서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지르듯이 휴가를 냈다. 

그렇게 우연히 방문한 제주에서 지나치듯 오름을 가게 되었고, 그 후 제주와 제주 오름의 매력에 빠져 몇 번이나 제주를 방문 하고 급기야는 제주 한달 살기까지 하게 되었다. 

내가 제주 오름에 왜 그렇게 빠져들었나 몇 번이나 곰곰히 생각을 해보지만,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제주 오름을 오르던 순간들이 생생하게 기억이 나고 그 때의 냄새, 나무와 풀들의 생김새, 얼굴과 등을 타고 내리던 땀방울까지 다 기억이 나지만, 자꾸만 오름에 가고 싶었던 이유가 무엇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오름이 아름다워서였을까, 편안해서였을까. 인적이 드문 오름을 호젓하게 걷는데서 자유를 느꼈던 것일까.

 

답을 찾아보려 한다

앞서 작은 풀꽃이 예뻐 보였던 바탕에 소중함이라는 마음이 있었던 것처럼, 오름을 자꾸 가고 싶었던 까닭이 있을 것이다. 내 안에 생기긴 했지만, 선명하게 읽히지는 않아 아직은 내 것이 아닌 그 생각과 마음이 무엇인지 밝혀보려 한다.

이번처럼 긍정적인 감정인 경우, 대체로 그 정체를 쉽게 찾는다. 느껴진 감정이 낯설거나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를 때는, 영화 보다가 못 본 장면을 앞으로 돌려서 볼 때처럼 감정을 되새겨 본다. 그리고 감정을 조각내서 내가 아는 감정들과 하나씩 대조해본다. 한 조각씩 돌려보기를 하다 보면, 한 조각씩 정체를 알게 된다. 그렇게 조각조각 정체를 밝혀 나가면, 내가 느낀 진짜 감정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좋은 감정들은 몇 번이고 되새겨도 괜찮다. 몇 번을 봐도 좋은 영화처럼, 좋은 감정이 떠올랐던 그 순간의 느낌과 기억은 몇 번을 돌려봐도 달콤하다. 그래서 좋은 감정은 어렵지가 않다. 기꺼이 할 만한 일이다. 

상대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처리하는 것은 복잡하다. 부정적인 감정은 몸과 마음에 부담을 주기 때문에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감정을 직시하는 것을 피하게 된다. 푹 잠길수록 고통이 커지니까 곁눈질로 슬쩍 보고 지나가버리고 싶은데, 구간까지 나눠서 세세하고 충실히 느껴봐야 그 정체를 알게 되니까, 감정의 정체를 파악하는 작업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이 커진다. 

그래서 대개는 긍정적인 감정을 처리할 때보다 부정적인 감정을 처리할 때 시간이 더 걸린다. 부정적인 감정에서 약간 빠져나와 돌려보기를 해낼 만큼 여유가 생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긍정적인 감정의 돌려보기는 미룰 이유가 별로 없는 반면, 부정적인 감정의 돌려보기는 하기 싫은 숙제처럼 자꾸 미루게 된다. 

이번 오름과 관련된 분석은 좋은 감정인데 자꾸 미루게 된다는 것이 신기하다.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어두운 마음이 숨겨져 있어 나도 모르게 미루는 것인지, 아니면 좋은 마음 마저도 들여다볼 여유가 없을 만큼 체력이 약해진 것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얼마나 시간이 걸리든 답은 찾아볼 생각이다. 긍적적인 감정이든 부정적인 감정이든 그 바탕에 깔린 까닭과 사정을 이해하고 나면, 경험이 더 풍부하고 다양해진다. 나에 대해 몰랐던 점을 더 알게 되기도 하고, 피상적으로 지나쳤던 것들이 더 세세하게 이해되고 소중해지기도 한다. 내 삶이 풍요로워지는 비결이다.

 

 

‘오늘도 오른다’

백 개의 제주 오름을 오르는 소박한 꿈을 갖고 있고, 현재 스코어는 30/100 입니다. 제주 오름을 왜 오르게 되었는지, 제주 오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오름을 오르면서 어떤 순간들을 만났고 어떤 생각과 감상이 있었는지 글을 통해 공유하겠습니다.

서하도

처음 방문한 제주도 동쪽 끝에서 ‘하도리’라는 자신의 필명과 동일한 동네를 우연히 발견하고, 그 곳에 정착할 꿈을 꾸게 된 초보 작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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