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제발 다정함을 보여줘_조안나

2024.09.28 | 조회 8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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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총 20여명의 작가들이 세상의 모든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매일 전해드립니다.

Unsplash의Shaira Dela Peña
Unsplash의Shaira Dela Peña

[사랑은 조건부일까?]

 “너 살쪘다.” 아직도 기억난다. 어학연수를 끝내고 오랜만에 한국에 온 나에게 다짜고짜 엄마가 한 말이었다. 사실 이러한 판단과 평가의 말들은 많이 들어서 익숙했다. 아토피로 불어 터진 입술을 보고 "어떤 남자가 너한테 뽀뽀하고 싶겠니?", "넌 나중에 쌍꺼풀 수술해야겠다" 등 외모에 대한 지적은 물론이었고, "너 끈기 없잖아", "그거 해서 뭐 할 건데? 네가 할 수 있겠어?"와 같이 가능성을 제한한 말들도 늘 들어왔다. 어느 순간 그런 말들이 당연하게 느껴졌었다.

 오히려 누군가가 나에게 칭찬하면 어색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니, 그 칭찬은 진심이 아닐 거라 생각했다. 부모님에게 어쩌다 칭찬을 받는 날은 그들이 말한 대로 한 날이었다. 시험 점수를 잘 받으면, 부모의 말을 잘 들으면, 사람들 앞에 착하고 조용하게 있으면, 간헐적으로 사랑을 받았다. 그래서일까, 난 사랑은 조건부라 생각했다. 어떠한 조건을 충족해야지만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난 '있는 그대로'는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였다. 알 수 없는 그 조건들을 충족하지 않으면 버림받을 거라 믿었다. 부모에게도, 스스로에게도 난 늘 부족하고 엉망인 사람이었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여러 세상 속에 다양한 내가 존재할 수 있는 다중우주를 그린 영화이다. 그러다 지금 살고 있는 우주에 위기가 찾아오고, 주인공 '에블린'은 다른 우주에 살고 있는 그녀의 능력들을 빌려와 가족을 구하는 이야기이다. 이 우주에서 '에블린'의 딸인 '조이'는 동성연애자로 나온다. 그녀는 엄마가 성정체성을 포함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길 바랐지만, ‘에블린’은 할아버지가 동성연애를 불편해할 수 있다는 이유로 조이의 애인을 그냥 '친한 친구'로 소개해 버린다. 다른 말은 하지 않은 채, 그저 “건강하게 좀 먹어, 살쪘다”라는 말만 툭 내뱉으면서 말이다.

 “진실은 전부 다 부질없어. 다 부질없는 거면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한 괴로움과 죄책감이 사라지잖아.” 여러 우주에 존재하는 수많은 ‘조이’ 중 가장 보잘것없고 엉망인 상태로 살아가던 ‘조이‘는 허무주의에 빠지게 된다. 지금 자신은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했고, 꿈과 목표도 잃어버렸고, 있는 그대로 사랑받을 수 없으니, 이 세상에 더는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버린 것이다. 그녀가 살아가고 있는 우주에선 부모에게도, 스스로에게도, 그녀 역시 부족하고 엉망인 사람이었다.

 

[내가 다 망쳐서 미안해]

 난 늘 사랑이 고팠다. 아니 사랑을 갈구했다. 사랑받기 위해 꼬리를 수없이 흔드는 강아지처럼 행동했었다. '친절하게 대하면 사랑받을 수 있겠지?', '힘들어도 괜찮다며 웃어야겠지?', '상대방에게 다 맞춰주면 날 좋아하겠지?', '튀지 않고 조용히 있으면 날 싫어하지 않겠지?' 언제나 나보다는 타인이 중요했다. 내 안은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는데 정작 난 모르고 있었다.

 우울이 주기적으로 찾아왔다. 하루는 괜찮다가도 하루는 사라지고 싶은 날들이 반복됐다. 지인의 추천으로 상담을 시작했다. 으레 상담의 첫 시작이 가정환경이듯이, 가정으로부터 비롯된 핵심 신념들을 하나둘씩 파헤쳤다. 그 과정에서 한동안은 부모님을 많이 원망했다. 왜 그들은 사랑의 말을 한 번도 건네지 않았을까, 그게 그토록 어려웠을까, 원망스러웠다. 그러다 부모님이 자라온 환경을 조금씩 알게 됐다. 그들도 무뚝뚝한 부모 밑에서 자라와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부모가 처음이니 모든 게 서툴렀던 것뿐이었다.

 에블린도 그랬다. 그녀도 "넌 늘 도망만 치더라. 벌여놓고 끝을 못 내"라고 말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왔다. ‘있는 그대로의 사랑’을 받아온 경험이 없었기에, 딸 조이에게도 그녀의 마음과 다르게 온전히 사랑을 주기 어려웠을 것이다. 삶을 포기하려는 조이에게 에블린은 말했다. “내가 다 망쳐서 미안해.”라고.

 어느 날 엄마도 에블린처럼 미안하다고 말했다. 내가 상담을 받고 있다는 걸 알게 된 후로 신경이 쓰였는지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뭐가 그렇게 힘든지, 무슨 이유로 상담을 받고 있는지, 굳이 돈을 내며 상담을 받아야 하는지와 같이 말이다. 처음에는 상담을 받는 나에게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내 주변 엄마들도 다 나랑 똑같이 키웠어. 네가 뭐가 힘드니?"라고 말하던 엄마였다. 그런데 오은영 박사님의 프로그램을 봐서일까, 가수 이효리와 그 엄마가 나온 프로그램을 봐서일까, 엄마 나름대로 이런저런 생각을 했었는지 어느 날 문득 사과했다. 엄마도 모르게 상처를 줬다면 미안하다고.

 

[제발 다정함을 보여줘]

 허무주의에 빠져 자신을 파괴하려는 딸 ‘조이’를 살리기 위해, 엄마 ‘에블린’과 아빠 ‘웨이먼드’가 선택한 방법은 다정과 사랑이었다. 웨이먼드는 말했다. “세상은 잔인하지만 다들 무섭고 혼란스러워서 싸우는 거 알아요. 내가 아는 거라곤 다정해야 한다는 거예요”라고 말이다. 웨이먼드에게 있어 사랑과 다정은 그가 살아남는 방식이었다.

 한때 나도 허무주의에 빠진 적이 있었다. 아무 의욕도 없었고, 무슨 의미로 살아가야 할지, 노력해도 과연 달라질 게 있을지 의문과 회의감으로 가득했던 나날들이었다. 그 상태가 지속되자 나를 위해 어떤 행동이라도 해야 했다. 그렇게 참여하게 된 게 명상 프로그램이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바뀔 수 있지 않을까?라는 약간의 희망을 품고 있었다.

 무력감과 무감각에 휩싸인 나를 ‘조이’처럼 엉엉 울게 해 버린 건 이름 모를 사람들과 함께한 자애 명상 시간이었다. 자애 명상이란 사랑을 일깨워주는 명상을 의미하는데, 그 대상은 내가 될 수도 타인이 될 수도 있다. 처음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향한 사랑으로 시작한다. 그 사람이 행복하기를, 편안하기를. 그다음은 별다른 감정이 없는 사람을 향해 사랑을 보낸다. 마지막은 스스로를 향해 사랑을 보낸다. 그 과정에서 억눌러왔던 감정들이 미친 듯이 뛰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거라는 무력감, 난 사랑받을 수 없고 보잘것없다는 자책과 비난의 목소리들이 끊임없이 재잘거렸다.

 그때 처음으로 감정에 머무르는 연습을 했다. ‘아, 이런 감정들이 지금 올라왔구나.’를 바라보고 따뜻한 말을 해주기 시작했다. ‘내가 노력해도 바뀌지 않은 상황에 속상했구나,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구나, 아팠겠다’처럼. 그렇게 자비심을 가진 상태로 나에게 편지 쓰는 프로그램도 동시에 진행되었다.

 편지를 쓴 후 모르는 사람과 짝지어 마주 보고 앉았다. 스스로에게 쓴 편지를 소리 내어 읽은 다음에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더니, 정말 눈만 봤는데도 우리는 서로 엉엉 울기 시작했다. 마치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었다. “당신도 힘들었겠군요. 당신이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랍니다. 평온하길 바랍니다.” 상대방을 위해 진심을 보내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우리는 더 대성통곡하기 시작했다.

 불과 몇 분 전까지 모르는 사람이었던, 내 앞의 이 사람이 진심으로 평온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올라왔다. 그 마음은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다. 말은 하진 않았지만, 눈으로 진심을 다해 말하는 듯했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눈으로 서로를 응원해 주고 마지막엔 뜨거운 포옹으로 안아주었다. 처음으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진 느낌이 들었다. 아, 이것이 사랑이구나 싶었다.

 '에블린'은 딸 '조이'를 구하는 과정에서 적들에게 폭력을 하거나 어떤 도구를 이용하여 싸우지 않는다. 사랑으로 싸운다. 적을 안아주면서 "당신은 사랑스럽다"라고 말하고, 죽은 아내의 향수를 그리워하던 사람에게 그 향수를 뿌려준다. 스스로 쓸모없다고 말하는 사람에겐 "당신은 혼자가 아니야"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자 싸우고자 했던 적들의 마음이 어느새 눈 녹듯 사라졌다. 이처럼 다정과 사랑은 모든 것을 무력화하는 힘이 있다.

 

[우리는 모두 엉망진창이니까]

 영화 후반부에서 에블린은 아버지에게 "절 자랑스러워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마침내 제가 자랑스러우니까"라는 말을 한다. 그러곤 딸 ‘조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사랑한다. 네가 엉망이어도 괜찮고, 네가 어떤 상태이든 난 너와 함께할 거라는 말과 함께.

 생각해 보면 살고 싶다거나 살아갈 용기가 생길 때는 사랑과 다정의 조각들이 있을 때였다. 당신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귀 기울여 듣고 있다는 눈빛, 고맙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응원한다는 손길, 따스하게 안아주는 포옹, 진심이 담긴 글과 같은 조각들 말이다.

 어느 누구도 본인이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각자만의 아픔이 있을 것이고, 때론 보이고 싶지 않은 면도 있는 인간적인 면모를 가진 사람일 것이다. 우리 모두 엉망진창인 사람들이지만 그 또한 받아들이며, 서로를 위해 아주 작은 다정함이라도 건네준다면 서로를 살게 하는 힘이 되지 않을까 싶다.

 

* 글쓴이 - 조안나

삶의 파도에 나를 내맡겨 살아가며,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감정과 생각들을 마주하고 기록합니다. 

인스타그램: @teeu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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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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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enla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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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days 전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기‘ 중학생 자녀를 키우면서 요즘 나도 작가님의 어머니처럼 하고있지 않은지 반성해봅니다.그래도 난 이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라며 나 자신을 다독여보는데, 그래도 아이가 열심히 생산적(?)인 일을 할 때 더 기특하고 사랑스러워보이는 건 어쩔 수 없네요^^ 어쨌거나 나를 돌아보게 하는 글이네요~ 영화도 보고싶어집니다.

    ㄴ 답글
  • penlady

    0
    13 days 전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기‘ 중학생 자녀를 키우면서 요즘 나도 작가님의 어머니처럼 하고있지 않은지 반성해봅니다.그래도 난 이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라며 나 자신을 다독여보는데, 그래도 아이가 열심히 생산적(?)인 일을 할 때 더 기특하고 사랑스러워보이는 건 어쩔 수 없네요^^ 어쨌거나 나를 돌아보게 하는 글이네요~ 영화도 보고싶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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