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는 스스로를 ‘결정장애’가 있다고 말하고 다니던 적이 있었다. 나는 혼자 중국음식을 주문해야 하면 짬짜면을 시키고, 냉면집에 가면 물냉면을 시켜 비빔양념장을 달라고 하는, 일명 ‘회색분자’다. 그러나 지난달 말 사전 투표에서는 나의 ‘융통성’을 발휘할 수 없었다. 연차까지 써가며 국외부재자 투표를 하러 가서 나의 소중한 한 표를 무효처리되게 만들 수는 없었다. 후보 이름 옆의 네모 칸, 12개의 네모 중에 단 한 곳에만 나의 선택을 표시해야 했다.
지난주까지 나의 SNS계정은 시끄러웠다. 자신이 지지하는 한 후보가 당선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이 저마다 확성기를 들고 ‘내가 선택한 사람’과 같은 사람을 선택한 사람을 불러모으고 있었다. 나아가 다른 사람을 택한 사람들에게 친구 관계를 끊어달라는 부탁인지 협박인지 모를 선언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나와 다른 사람을 찍은 사람들을 특정한 표현을 사용하며 노골적인 불편함을 드러내는 포스팅도 많이 보였다. 대선 결과가 발표된 이후에는 혼란이 더욱 심해졌다.
나와 같거나 비슷한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생김새가 비슷하거나, 나이나 성별처럼 직관적으로 드러나는 차이 뿐만 아니라 종교, 정치적 신념, 소비 성향, 대인관계 유형, 식습관 등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전에는 모르는 나와 같거나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동질 집단에 대한 호감, 우리 집단 밖의 존재에 대한 비호감이 어디서 오는지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연구결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가장 최근에 주목을 받고 있는 연구 중 하나는 ‘호르몬’ 이론이다.
이른바 ‘모성애’적 행위의 바탕이 된다고 믿는 ‘옥시토신’ 호르몬이 아이를 낳고 기르는 엄마 뿐 아니라 남성에게서도 발견된다는 것은 그렇게 놀라운 사실도 아니다. 관련 연구에서 신기했던 부분은 이것이다. 누군가를 아끼는 마음이 내가 속한 집단에 위험에 처해있다고 믿을 때는 ‘우리’를 지키기 위한 적대적인 행동으로 표출되기 쉽다는 것이다.
정치사회학적 관점에서는 인간의 이러한 본성을 이용하는 세력에 주의를 기울일 것을 당부하기도 한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집단이 내가 속한 ‘우리’의 삶에 불편을 끼치거나 나아가 해악이 될 수 있다는 논지를 펴면 확실하게 자신의 편을 만들 수 있고, ‘우리 편’이 소멸되지 않도록 더 많은 사람을 확보하고 집단 내 결속력을 다지려는 노력을 통해 ‘확실하고 공고한 우리 편’을 잘 지켜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행동이 과연 ‘옳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대선을 치르면서 많은 사람들이 궁금했던 걸 두 가지로 꼽아보자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 편이고, 상대편의 세력은 얼마나 되는지가 아닐까 싶다. 근소한 차이로 당선자가 결정되던 순간, 그리고 그 이후 쏟아진 홍수와 같은 포스팅에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들의 목소리까지, 확성기를 든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목소리 높여 외치는 듯 했다.
문제는 나의 선택과 옳고 그름을 결부시키려는 노력이 결합했을 때 일어난다. 상대편에 대한 적대감이 조롱과 멸시의 톤을 얹는 순간 나의 목소리가 폭력이 되거나, 상대방에 의해 공격받을 소지가 생긴다는 것을 우리는 가끔 잊는 것 같다.
2020년 늦가을에 치러진 미국 대선을 앞두고 내가 일하던 명상 센터는 쉴틈없이 바빴다. 명상과 대선의 상관관계에 대해 궁금해 할 분들을 위해 간단히 설명해보자면 2016년 대선 결과로 인한 실망감과 이로 인해 달라진 삶에 대한 트라우마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2020년 선거 결과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들을 위해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대해야 할지 생각해 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자비명상(Compassion Meditation)’은 이런 행사에 가장 어울리는 마음챙김 명상이다. 호흡에 집중하는 호흡 인식(Breathing awareness),, 내 몸에서 느껴지는 신체적인 감각에 집중하는 신체 탐색 (Body Scan) 명상과는 결을 달리하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이 내 몸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고, 감정을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명상이다.
지도자나 명상 시간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지만, 대개 자비명상은 ‘내 마음을 편안하고 사랑을 주고 싶은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시작해 ‘자기 자신’ ― ‘나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사람’ ―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 ―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지만 어디선가 삶을 지속하고 있을 지구상의 누군가’를 차례로 떠올리며, 떠올린 사람의 건강하고 안전한, 한 인간으로서 존중받는 ‘안녕한 삶’을 빌어주는 순서로 진행된다.
자비명상은 마음챙김 명상을 배우면서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명상이었다. 일단 나 자신의 안녕을 비는 것이 너무 부끄러웠고, 내가 나를 너무 함부로 다루고 있었나 하는 생각에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가이드 문장들이 낯간지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 사람’을 떠올릴 때면 상처받고 공격받았던 그 순간의 사건이 떠올라 도저히 명상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감정을 들여다보는 명상을 시도할 때 흔히 겪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에도 자비명상은 왠지 내키지 않았다. 대놓고 ‘선호하지 않는 명상’이라고 말하기도 했던 것 같다.
‘자비명상’에 닫혔던 나의 마음의 문은 마음챙김 워크숍에 참여하거나, 진행하면서 명상 참여자들의 소감을 나누는 과정에서 조금씩 열렸다. ‘자비명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중요한 포인트는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바라보는 나의 시각’을 점검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조금 쉽게 말하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경험을 통해 스스로를 몰아치던 나의 사고 패턴을 달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 시작이라 할 수 있겠다.
나아가 이름도 모르고 진심어린 대화를 해 본적도 없지만 나의 하루에 등장하는 수많은 단역 같은 사람들, 예를 들어 카페의 알바생, 마트의 점원, 건물의 경비원, 수화기 너머의 상담원이,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가족, 절친일 수 있다는 마음을 가져보는 경험으로 우리를 초대하기도 한다.
여기까지 무리없이 통과했는데 고비가 찾아오기도 한다. 나는 상당히 오랫동안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을 떠올리면 감정이 폭발했던 그 때로 돌아가 그 장면을 반복 재생하느라 요동치는 마음을 어쩔 수 없어 명상 자체를 중단하고는 했다. 몰론 마음에 불 덩어리를 안고 명상을 억지로 지속할 필요는 없다. 몸과 마음의 불편함이 명상을 지속하기 힘든 상태가 되면 중단하라는 일반적인 권고를 무기삼아 나는 한동안 ‘자비명상’ 자체를 피해다니곤 했다. 그러나 마음에 일어난 감정과 나를 동일시 하지 않는, 영어로는 ‘unwire’, ‘detach’ 라는 단어들로 표현되는 나를 분리하는 연습의 경험이 쌓여가면서 '불쾌하고 화가났던 사건 속의 등장인물인 나'와 '지금, 여기에서 명상을 하는 나'를 분리할 수 있게 되었다.
반복 연습을 통해 나와 감정, 나와 사건을 잘 분리할 수 있게 되면 내 마음에 비수를 꽂은 사람이 심정적으로는 밉지만, 저주를 퍼붓고 싶을 정도는 아닌, 그 나름의 사정을 헤아릴 수 있는 여유가 생기기도 한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 행동 거지 하나가 그 사람의 인간성을 대표한다라는 생각이 나의 편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억울하고 화나는 마음은 잠시 내려놓고, 그 사람이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표현되지 않은 메시지, 전달되지 못한 상황이 있을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게 된다. 꼭 ‘우리 편’으로 넘어오지 않더라도, 반인륜, 비인간, 미성숙이라는 단어가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그냥 ‘사람’으로 볼 수 있게 하는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된다고나 할까.
빨강과 파랑, 이외의 다른 색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모두가 안간힘을 쓰고 있던 지난주의 큰 ‘사건’은 지나갔다. 정치에서 분리된 삶을 살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그들의 대결구도를 내려놓고 누구라도 자신이 가진 힘을 남용할 수 없게, 깨어 있는 시민으로서 하루하루를 살아낼 수 있다면 좋겠다.
* 매달 17일, 27일 ‘일상의 마음챙김’
글쓴이 - 진아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뉴스와 시사 인터뷰를 맛깔나게 진행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미국 수도에 있는 한 국제기구에서 참여자들의 의미있는 경험을 비추기 위해 행사 진행을 돕는 사람이 되어가는 중.
<____>을 출간했습니다 라는 소식을 알리고 싶다는 마음 속 소망을 이루기 위해 오늘도 읽고, 쓰는 하루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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