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을 풍부하게 쓰는 즐거움

2023.12.18 | 조회 2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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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소일기 안부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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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님 잘 지내시죠, 뉴스레터 기능으로 인해 제가 구독자의 이름을 부르는 느낌이 될텐데, 저도 받는 입장에서는 참 새삼스럽더라고요, 

 

이번 주에 보았던 영상 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라면 끓이기 달인'이었습니다, 무려 인스턴트 라면을 끓는 물에 집어 넣는 소리를 듣고 어떤 라면인지 맞추는 것을 하더라고요, 쇼츠에서 무심코 지나가다가 봤는데 '생활의 달인' 프로가 종종 그런 진기명기나 차력쇼 같은 것을 보여주긴 하지만, 그 라면의 달인이 흥미로웠던 점은 면발의 굵기가 어떻고 질감이 어떻고 이런 것을 소리로 추정하는 과정이 상당히 설명력이 있더라는 점입니다, 면 소리만 듣고 못 맞춘 것은 스프를 뜯어서 넣는 소리를 듣고 마저 맞추는 식입니다, 

저는 사람을 관상을 보고 그 사람의 유형을 추론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정도의 사람이니, 그런 식으로 디테일한 감각과 추론이 그리 신기할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만, 그래도 막상 신기하긴 하더라고요, 정말 고민과 학습을 많이 하고 그 장르를 사랑해야만 가능한 일이겠죠, 

가끔 유별나게 원래 예민한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저는 대부분의 사람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것보다 감각을 예민하게 벼리려면 얼마든지 더 당장 현대인에게 필요한 것보다 그 감각 능력을 끌어올릴 수 있다고 믿는 편입니다, 최근 '도둑맞은 집중력'이라는 책도 인기를 끌고, 도파민이니, 숏폼 중독이니 얘기를 하지만, 주의 집중이 흐트러지는 것 이전에, 현대의 도시 생활이 사람들의 감각을 무디게 만드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만은 아니라 생각해요, 도시는 일단 너무 시끄럽고, 꼭 청각적 자극뿐 아니라 우리에게 제공되는 시각적 경험 심지어 음식의 미각 마저 계속 '나를 바라봐줘', '내 얘기를 들어줘'하는 것처럼 시끄럽다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감각을 풍부하게 쓰려면, 종종 아주 낮은 자극으로 돌아가는 것, 그리고 폭 넓은 자극을 추구하는 것 등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가끔은 일부러 싱거운 음식을 찾기도 하고, 일부러 조용한 시간을 갖습니다, 아이러니하지만 더 풍부한 자극을 언젠가 얻기 위해 종종 자극을 절제하는 것이죠, 학부 시절 동양철학 수업을 들으면서 명상이니 그런 것에 관한 수업을 들은 적이 있는데, 대단한 방법론까지 가지 않아도 불필요한 상상에 미혹되지 않고 그저 순수한 감각에 집중하는 것만으로 휴식 혹은 각성에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배웠었죠, 그럭저럭 사이비스러워보이는 동양의 무언가 중에, 정말 삶에 실질적 도움이 되었던 지혜 중 하나입니다,

물론 이 감각이라는 것은 곧 인지와 연관이 되어있어서, 다시 순전한 감각적 반응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 감각으로 인해 입력된 정보를 종합적으로 처리하는 과정까지 감각 경험의 일부입니다, 이를테면 음식을 먹는 과정은 처음 재료가 입에 들어가면서 느끼는 촉각과 미각의 경험뿐 아니라, 요리사가 의도한 배합을 해석하거나, 그 음식 배후에 있는 문화적 속성에 대해 연상하는 것까지 갈 수 있죠, 그래서 새로운 해석을 가미한 음식이나 혹은 반대로 과거의 추억을 불러 일으키는 오래된 레시피, 각자 모두의 매력이 있습니다, 결국 감각은 정보 처리이고 그 정보 처리는 제가 갖고 있던 기존의 지식이나 정보에 영향 받죠, 그만큼 찾아오는 손님의 배후에 있는 경험을 잘 자극하고 이끌어내는 것이 좋은 경험 설계이기도 할테고요, 

예전에 오랜 벗인 임미현 음악 감독과 나윤수 대표와 저녁 식사를 하다가, 레스토랑에서 음악적 자극이 만들어내는 경험에 대해 임감독에게 조금 엿듣고 배운 일이 있었습니다, 작곡가이자 영상음악 감독인 임감독은 오프라인 공간을 위한 작곡이나 플레이리스트를 만드는 일도 했는데, 저에게 '난이도는 은근히 중요한 요인이야'라고 알려주었죠, 좋은 음악을 튼다고 너무 어려워서도 안 되지만, 또 너무 쉬워서도 안 된다는 얘기였는데요, 그 전에는 의식하지 않았지만 듣고 보니 아주 일리 있는 얘기였습니다, 언젠가 너무 멋진 공간에 가서 유명한 스탠다드 재즈를 너무 식상하고 구태의연하게 어레인지한 곡을 틀어두는 것을 듣고, '이 밥을 먹으며 이런 음악을 들어야 한다니'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거든요, 누군가 들으면 좀 재수 없다고 느낄 수도 있는 모먼트이겠습니다만, 동네 카페에서 그런 음악이 나온들 그러려니 했겠지만, 테이블의 질감과 식기의 모양, 그리고 직원의 정중한 환대까지 음식 외의 경험까지 너무 세심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음악에서 더욱이 '깬다'는 생각을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역시나 감각적 경험은 결국 그 감각에 대한 정보를 처리하는 사람이 보유한 스키마에 의존적이겠죠, 그런 경험적 요소뿐 아니라 그저 정보 처리량의 난이도에 따라 저자극과 고자극이 달라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충분히 단순한 원버튼 게임이 재미있을 때도 있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상당히 복잡한 룰과 전략이 함께하는 디지털 게임을 즐깁니다, 그러니 이것은 '어려운 것 좋아한다'라고 해서 꼭 재수 없게 볼만한 것은 아니고, 역시나 인간에게는 저자극이 주는 매력과 고자극이 주는 매력이 각각 있다고 해석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최근에 저는 그런 면에서 언어적 자극에 갈증을 좀 느끼기도 했었어요, 저는 당연하게도 글을 쓰는 것 만큼이나 읽는 것도 좋아합니다, 그런데 에세이는 생각할 화두를 던져주는 것 외에 그 언어의 조합과 문장의 조형 안에서도 흥미를 이끌어내는 장르라고 생각하는데, 도대체 에세이라는 장르가 너무 단순하고 짧은 문장에 갇히게 된 것이 어쩔 수 없는 요즘 2020년대의 트렌드가 된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저도 대부분 쉽고 명쾌한 글을 좋아합니다만, 앞서 설명했듯 'play'의 본질은 약간은 어려운 문제를 풀거나 복잡한 규칙에 도전하며 인지 능력을 끌어올리는 과정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독서의 즐거움에도 종종 좀 더 함축된 단어를 포함한 글에서 무언가 더 느끼거나, 문장의 기교로 함의를 만들어내는 글을 재차 해석하는 과정이 포함될테니까요, 

감각을 풍부하게 쓰는 것은 큰 즐거움에 도달하는 방법인데, 그 과정을 위해선 스스로에 대한 자극도 조절해야하고, 또 그 감각을 잘 쓰거나 새로운 장르를 받아들이기 위해 이성과 훈련의 노력도 필요하고, 여러 단계가 있는 것 같아요, 그냥 대충 살면 되지 흥미로운 글에서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 맛있는 음식에서 행복감을 느끼기 위해, 좋은 음악에서 충만함을 느끼기 위해 뭐 그렇게까지 애를 써야하나 싶을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삶에서 그런 과정을 빼면 일하고 돈 벌고 잠자고 내일로 모레로 가는 와중에 다른 더 어떤 즐거움이 남나 싶기도 하죠, 물론 즐거움을 느끼는 감각 활동의 종류는 사람마다 다 다를 겁니다, 저는 근육과 관절을 활용하는 장르에 능하지 않지만 자신의 신체를 '복잡하게' 쓰는 데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죠, 운동이든 춤이든, 사실 사람들은 은근히 '어려운' 것들을 좋아해요, 학습이나 훈련, 창작, 표현 뭐 엄청 넓은 스펙트럼의 얘기를 할 수 있지만 역시나 시작은 감각을 풍부하게 쓰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안부 편지가 읽는 사람들이 언어에 대한 인지를 조금은 풍부하게 쓰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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