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워터폴 망령

2022.03.21 | 조회 3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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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다친 IT 업계의 당신에게

매주 월요일 하이퍼리얼리즘 글 한 뭉텅이가 당신을 찾아갑니다.

"... 그렇기 때문에 기존 애자일한 문화와는 전혀 차이 없는 개발방식일 겁니다."

 

정연은 진우가 하는 말을 들으며 기계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부터 지나치게 개발자들의 눈치를 보고 있는 팀장은 누가 질문할 새랴 여러 말을 덧붙였다. '이 방식은 이런 면에서 뛰어납니다.' '이런 단점이 예상되지만 이런 장점이 더 큽니다.' 이번 프로젝트의 PM(Project Manager)이자 시니어 PM(Product Manager)인 진우는 사실 프로젝트의 개발방식을 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자바로 개발돼야 할 것을 C++로 개발하자는 것도 아니고, 피그마로 그리는 화면들을 갑자기 AdobeXD로 그리자는 것도 아니다. PM으로서 이번 프로젝트에 가장 효과적인 개발방식을 제안하는 자리였다. 그건 당연히 PM 말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의문이 있습니다. 그 방식이 워터폴(Waterfall)과는 무엇이 다르죠?"

"워터폴과는 같아 보일 수 있으나 완전히 다릅니다! 각 phase의 첫과 끝에서 메이커들의 한 자리에 모여 토의한다는 점에서 가장 크게 다릅니다."

"하지만 그건 여전히 점진적 개발방식은 아닙니다."

 

시니어 개발자의 마지막 말에 진우는 잠시 입을 열었다 허공에 숨 몇 번만 토해내고 입을 다시 닫았다. 진우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다른 논리를 생각하는 듯했다. 시니어 개발자도 턱에 손을 괴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제가 내뱉은 단언이 얼마나 큰 울림을 주었는지는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다른 이들은 말이 없었다. 줌 화면 너머로 보이는 그들의 눈이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으며 계속 타자를 치는 듯한 손 움직임을 볼 때 이 회의에 집중하는지도 의문이었다.

정연은 조금 진저리가 났다. 연차가 낮고 이 프로젝트의 히스토리를 온전히 파악하지 못해 입을 다물고 있었을 뿐 이미 머릿속에선 여러 가지의 생각이 날 뛰었다. 정연은 진우와 왜 저렇게 개발자들에게 쩔쩔거리는지 몰랐다. 이 프로젝트의 데드라인은 찍혀있었고 회사의 사활이 걸려있다는 C레벨의 목소리에 따르면 어떤 방식이던지 가장 빠르게, 그리고 어떻게 서든 성공시켜야 하는 프로젝트다. 왜 시니어 개발자는 점진적 개발방식이 아니란 것을 운운하는지 모르겠다.

 

"... 점진적 개발 방식은 아닐 수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갑자기 문화를 바꾸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번 프로젝트는 회사의 미래가 걸린 만큼 가장 빠르고 효과적이게 달성할 수 있는 개발방식을 가져가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게 워터폴이고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워터폴과는 같아 보이지만 다릅니다."

 

진우는 다시 노션 페이지를 화면 공유하며 열변을 토했다. 워터폴과 어느 정도가 다른 지도 더 상세하게 설명하려는 듯했다. 정연은 진우가 하는 저 말들이 미팅을 시작하며 공유되었던 내용과 미세한 차이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녀는 왜 이 회의에 굳이 대면으로 참석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화면 너머로 회의에 집중하는 척 다른 일을 하고 있는 다른 비대면 참석자들이 부러워질 지경이었다.

 

"아직도 저는 다른 바를 모르겠습니다. 워터폴적인 개발방식이 진우 님이 다녔던 회사에서는 효과적이었을 수 있겠으나 여기서는 그런 문화가 지양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시니어 개발자의 마지막 말에 열 띄게 설명하던 진우는 멈칫이며 말을 멈췄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붉었고 무언가 토해내지 못한 말들로 가슴은 울렁이고 있는 듯해 보였다. 진우는 화면 속 시니어 개발자를 바라보았고 줌 미팅의 시니어 개발자도 진우를 응시했으나 그들의 시선은 교차하지 못했다.

 

"네 말씀 감사합니다. 이번 미팅은 그럼 여기서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각자 저희가 의논했던 것들을 한번 더 고민해서 다시 이야기해보는 시간을 잡도록 하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하는 건조한 말이 여러 개의 목소리로 들리고 회의는 중단되었다. 정연은 의식적으로 진우를 쳐다보지 않았다. 쓰던 회의록을 멈추고, 진우가 먼저 말을 하길 기다렸다. 진우는 잠시 무언가를 치더니 픽하고 기운 빠진 한숨을 내쉬었다.

 

"정연님은 워터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던져진 물음에 정연은 진우를 응시했다. 정연은 진우와 같이 대기업에서 일한 경험이 있었다. 사실 대기업에서 경험했던 워터폴 개발 방식의 단점을 그 어느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보고 온 사람이었다. 보고를 위한 보고, 숨기기 바쁜 결함들, 그리고 강하게 찍힌 납기일. 답답하고 강압적인 폭포수 속에서 몇 번을 허우적거리다 겨우겨우 스타트업계로 이직한 찰나였다. 

 

"그..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지금 개발자분들이 개발하고 계신 방법보다는 훨씬 효율적으로 보여요."

 

정말이었다. 애자일한 개발문화라는 하는 이곳에서 버튼 하나를 바꾸는 작은 피쳐에도 일주일이 걸릴 거면, 폭포수가 나았다. 폭포수면 하루면 충분했다. 어색하게 웃으며 답한 정연의 말에 진우는 살짝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다 노트북을 접고 회의실 책상에 놓인 얼음이 다 녹아버린 아메리카노를 입가로 가져갔다. 벌겋게 달아올랐던 진우의 얼굴은 살짝 가라앉아있었고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던 눈가는 조금 풀어져 보였다. 아직 경직되어있지만 그나마 풀어진 눈웃음을 지으며 진우는 낮게 웃었다.

 

"정연님도 위험한 말씀을 하시네요."

 

그렇게 말하는 진우의 말에는 경고의 느낌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쩐지 유쾌하기까지 들렸다.

 

* * * 

 

정연이 회사에 온지도 이제 두 달이 다 되어갔다. 대학생부터 입사하고 싶었던 이 회사를 경력 오 년 차가 되고서 들어오게 되었다. 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았다. 데이터 기반 기획, 회고를 통한 팀의 발전, 린한 프로덕트 개발 방식. 실리콘 밸리에서 넘어온 여러 언어들에선 어쩐지 햄버거 냄새가 났다. 롯데리아가 아닌 뉴욕 메디슨 스퀘어 파크 한가운데 있는 쉑쉑 버거 1호점의 냄새였다. 실리콘 밸리의 냄새라면 LA의 인앤아웃 버거 향이 났어야 했건만, 왜 쉑쉑이 가장 먼저 떠올려지는 정연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쨌거나 정연 저도 이제 어엿한 PM(Product Manager)로서 쉑쉑 버거의 기름 냄새가 밴 여러 방법론들을 익히고 싶었다. 훌륭한 PM이 되기 위해 입사 전부터 매일 밤을 공부했다. 그리고 입사 후에는 빠른 온보딩을 위해 매일 밤을 노션 문서를 정독했다. 그러나 그런 설렘들에 들뜨며 다녔던 한 달, 요새 정연은 어쩐지 회사에 출근하고 싶지 않았다. 얼마 전 진행했던 개발방식에 대한 지긋지긋한 토론의 여파인지 아니면 말없이 노션 문서만 쓰고 있는 옆 옆자리 진우의 분위기 때문인 지는 잘 몰랐다. 오늘도 여전히 저번 릴리즈 때 나갔던 피쳐의 A/B 테스트 결과 문서를 보고 있는데 희연이 다가와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커피 고?"

 

진우에게는 들리지 않게 조용히 속삭였다지만, 아마 진우는 들었을 테다. 에라 알바냐, 자율적인 분위기 퍼포먼스로 보여주는 문화! 이런 게 스타트업인데 여기까지 와서 상사의 눈치를 보고 싶지 않았다. 정연은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희연과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정연님은 어떤 스쿼드에서 일하세요?"

"잘 모르겠어요. 아직 배정받지 못했어요."

"오 아직 온보딩 기간이어서 그런가 보네요. 정연님은 서치 스쿼드 가시면 잘할 것 같아요."

"아, 안 그래도 서치 스쿼드에서 미팅 참여하면서 이것저것 듣고 있어요."

 

그럼 그 스쿼드 가시는 거 아니에요? 희연은 작게 웃었다. 그 스쿼드가 일하기 좋아요. 개발자들도 손이 빠르고, 디자이너들도 알아서 기획해서 딱히 정연님이 하실 게 없거든요. 희연은 일층 버튼을 눌렀고, 정연은 희연의 말에 의문이 생겼지만 눈알만 살짝 굴리고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개발자들도 알아서, 디자이너들도 알아서 일하는 스쿼드에선 PM은 뭘 하면 될까? 

둘은 초록색 인어가 그려진 카페 안으로 들어갔고, 이미 커피를 받기 위해 많은 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줄이 보였다. 현대인의 고로쇠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나란히 시키고 그들도 커피를 기다리는 줄에 합류했다. 어떤 삶을 살았는지, 주말은 어떻게 보냈는지 시시한 이야기를 주고받다 이제는 이야깃거리가 떨어진 둘은 자신들의 커피가 언제쯤 나올지 카운터 쪽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근데, 저.. 여기는 스프린트 때 날짜를 안 찍더라고요."

"찍어요? 뭐를요?"

 

네? 날짜요. 정연은 답했지만 희연은 여전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단 듯 큰 눈을 꿈뻑이며 정연을 바라보았다. 이 말이 그렇게 어려운 말이었나? 아니면 카페 안의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듣지 못한 걸까? 정연은 조금 더 큰 목소리로 희연에게 말했다.

 

"아 그 날짜요. 개발 완료되는 날짜."

 

정연의 말에 희연의 눈은 더욱 커졌다. 'B-12님 주문하신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 나왔습니다.' 희연이 정연의 말에 무언가 대답하기 위해 입술을 떼었지만 곧 그것은 우렁찬 바리스타의 목소리에 가로막혔다. 희연과 정연은 사이좋게 아메리카노를 한잔씩 들고 다시 카페를 나왔다.

 

"정연님 아직 저희 온보딩 하실게 많으시네요!"

 

하하 너스레를 떨며 웃는 희연을 보며 정연은 문득 데자뷔를 느꼈다.

 

"저희는 날짜를 '찍지' 않아요. 모두 신뢰 기반으로 일하고 있거든요. 개발 데드라인을 가지고 일하는 환경이 너무나 독성적이라 저희는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답니다."

"그럼 어떤 피쳐를 개발할 때 언제까지 개발될지는 어떻게 알 수 있나요?"

"그건 기다리면 금방 개발자분들이 해주세요!"

"그.. 음.. 그럼 한 스프린트 안에서 어떤 피쳐가 개발될지는 어떻게 이야기해요?"

"그건 개발자분들이랑 잘 이야기해보시면 되어요!"

 

어쩐지 같은 답변만 나오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정연은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았다.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1층에서 17층으로 올라가는 사이에 정연은 또 한 번 질문을 던졌다. 

 

"근데 디자이너분들은 언제까지 기획안이 나올지 말씀해주시던데요."

"아! 디자이너들은 Due date를 말씀해주시죠."

 

희연의 대답에 정연의 머릿속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커피 한잔을 사러 다녀온 짧은 사이에 무자비하게 들어온 이 정보들이 뿜어내는 혼란으로 머릿속은 안갯속이 되었다. 왜 두 그룹의 호칭이 개발자'분'이고, 디자이너인지 물어보고 싶었으나 어쩐지 명확한 답변을 얻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생글거리며 웃고 있는 희연 앞에서 이방인스러운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정연은 이 회사에 잘 적응한 PM처럼 보이고 싶었고, 그 첫 번째 임무는 개발자 중심 문화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일인 듯했다.


* * *

 

그렇게 진우와 개발자들의 긴장감 있는 회의가 끝난 후 정연은 이 회의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너무나 궁금해졌다. 폭풍전야와 같은 평화에 혹여 자신이 최근 입사자라 불편할 수 있는 미팅에 참석 요청을 하지 않은 것인지 궁금해, 진우의 구글 캘린더를 여러 번 훔쳐보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진우의 캘린더는 비어있었고, 그렇게 그 시니어 개발자의 1승으로 미팅의 잠정 결론이 지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정연은 망각했다. 진우는 PM이었고, 이렇게 모두의 의견이 갈리는 상황에서 결국 최종 의사결정 권한은 PM에게 있다는 것을. 띵동 하고 슬랙 채널에 쓰레드 하나가 올라왔다.

[... 이번 프로젝트는 기획과 개발의 단계가 나누어져 있는 이터레이션 형태로 갑니다. 몇몇 분들의 일반 대기업에서 애용하는 워터폴 형식이라고 우려를 주셨습니다. 한 가지 약속드립니다. 프로젝트가 소통 없고 유연하지 않은 워터폴 형태로 진행되지 않도록 제가 최전선에서 책임지고 노력하겠습니다. 지금까지 그랬듯 언제나 유연하고 소통하며 협업이 즐거운 PM이 되겠습니다.]

올라온 지 몇 분 되지 않은 쓰레드 였으나 급속도로 기도와 힘 이모지 같은 것들이 우르르 달렸다. 쓰레드에 댓글 하나 다는 일 하나 없었다. 분위기를 읽지 못한 옆 스쿼드 주니어 PM 한 명이 "화이팅!" 하고 남기고 간 댓글 하나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의 소통은 없었다. 같은 PM으로서 정연도 댓글을 남겨야 하나 한참을 쓰레드를 응시하고 있는데 톡톡하고 누군가 정연의 어깨를 두드렸다. 희연이었다.

 

"커피 고?"

 

좋아요. 활짝 웃으며 정연이 일어섰다. 아직 기도 이모지도 힘 이모지도 누르지 않았으니, 희연과 커피를 마시고 와서 댓글을 달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온보딩은 잘하고 있는지, 요새 친해진 직원이 있는지 적당히 가벼운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희연과 정연은 커피 한잔씩을 손에 들고 있었고, 이대로 바로 회사로 올라가기 아쉬워 역 근처를 산책하기로 했다.

 

"어디 가시나요?"

 

빌딩 회전문을 지나 희연과 정연은 오른쪽으로 갈지 왼쪽으로 갈지, 어디를 가야 이 회색 빛 도시에서 그나마 푸른빛을 볼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던 참이었다. 말을 거는 소리에 옆을 보니 그때 그 미팅의 시니어 개발자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는 반쯤 피운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신발로 몇 번 지르밟았다. 희연은 개발자와 원래 친한 사이인 듯 반갑게 그를 맞이 했고, 대화를 하고자 하는 사회적 신호였기에 정연은 어색하게 희연을 따랐다.

 

"성혁님! 여기서 혼담하고 계셨던 건가요?"

"네, 요새 담배를 부르는 일이 참 많네요."

"하하 회사가 다 그렇죠 뭐."

"예전엔 덜 그랬던 것 같은데요."

 

가벼운 인사들이었지만 어쩐지 작은 뼈가 있는 듯한 말에 정연은 뻣뻣하게 웃음 지으며 그들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었다. 성혁이라 지칭한 시니어 개발자는 희연과 몇 마디 주고 봤다 정연을 쳐다보았다. 그 미팅을 참석한 정연을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성혁은 정연에게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서 바로 희연에서 항의를 쏟아내었다.

 

"그러니까 아무리 경력이 화려해도 대기업 출신은 뽑으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희연님."

"하하 대기업 출신이라고 모두 같은 건 아니니까요!"

"애자일이 생명인 이런 스타트업 씬에서 대기업 출신들이 가져오는 납기일 맞추는 식의 문화는 오히려 독입니다."

 

정연은 이제 저가 없는 듯 불편한 대화를 주고받는 희연과 성혁을 바라보며 아메리카노만 연신 들이켰다. 불규칙하게 가끔씩 고개를 끄덕이면서, 저가 어떤 이야기를 듣고 있는지 아직도 그녀가 이 대화 속에 참여자로서 존재하는지도 의문이 들었다.

 

"진우님이 S기업 다니셨죠?"

"하하 아마 그럴 거예요~"

"작년에 퇴사한 개발 리더 분도 L기업 출신이잖아요. 간트 차트니 뭐니 별 효율 없는 것들을 그리더라니..."

 

성혁이 쯧 하고 혀를 차는데 정연이 화들짝 놀라버렸다. 그러자 성혁이 시선을 돌려 정연을 보았다. 아까 저가 급해 제대로 통성명도 하지 못한 게 걸렸던 듯하다. 성혁은 또 그 사회적인 미소를 머금도 정연에게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서치 스쿼드 개발 리드 한성혁이라고 합니다. 고인물입니다. 입사한 지 5년 되었어요."

"네! 안녕하세요 이정연이라고 합니다. PM으로 입사했고, 지금 회사 온 지 두달되었어요."

"아 그렇군요. 전 회사는 어디를 다니셨나요?"

 

성혁의 마지막 질문에 정연은 호호 있고 있던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다물어져야 할 때 다물어지지 않은 입꼬리는 어색하게 떨려왔다. 회사에 와서 가장 친해진 희연이었지만, 그녀도 묻지 않았던 질문에 정연은 희연을 슬쩍 바라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돌려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성혁을 바라보았다. 말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인더스트리만 말해볼까? 직무만 말해볼까? 더듬더듬 안 돌아가는 머리를 쥐어짜다 보니 수상쩍어 보일만큼 시간이 지나 정연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리고 최대한 사소해보이게 말을 내뱉었다.

 

"H기업에서 5년 정도 있었어요."

 

마음과 다르게 깔끔한 돌직구로 내뱉어진 마지막 말 이후로 마치 시간이 멈춘 듯 희연과 성혁을 더 뒷말을 잇지 않았다. 시시껄렁하게 주고받던 가벼운 이야기도 터져 나오지 않았다. 정연은 한여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든 손이 너무나 시렸다. 그녀는 깜빡 잊고 있었던 미팅이 있었다며 지금이라고 회사로 올라가버리고 싶었지만 그녀의 오늘 일정이 텅 비어있다는 것은 회사 모두가 확인할 수 있으리라. 희연은 평상시와 같이 웃고 있었지만 아무런 말도 잇지 않았고, 그녀의 새까만 눈동자는 오늘따라 더 깊이를 알 수 없는 저수지 같아 보였다. 정연이 이 침묵의 상황에 어색하게 두 눈을 깜빡이는데 성혁이 입을 열었다. 그의 살짝 열어진 입에서 반쯤 마른침이 거미줄처럼 두 입술에 붙어 쩌억하고 늘어났다 퐁하는 거품과 함께 떨어졌다. 그렇게 퐁하고 터진 거품이 정연 입가에 앉았다. 거의 초면인 남성의 담배 내음이 나는 침 방울이 거의 입에 들어갈 뻔 해서 였는지, 아니면 던져질 물음의 무게를 직감해서였는지 정연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성혁은 한치의 망설임 없이 그 질문을 던졌다. 

 

"정연님은 워터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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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택키링링

    0
    almost 4 years 전

    성혁아 눈치챙기자. 계속 연재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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