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주차 세모] 내가 아직도 김치 싸대기 이야기를 하고 싶은 이유

막장 아니야!! 아니라고!!!

2024.02.02 | 조회 4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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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모

둥글지도 않은 것이 각지지도 않은 것이…

요일을 착각해 그만 하루 늦고 만 세모입니다 ㅜㅡㅜ

몬툔이..

[주절주절]

조금 옛날 이야기를 해볼게요.

2016년의 일인데요 MBC 일일 드라마 '좋은 사람' 제작 발표회였어요.

"제2의 김치 싸대기를 기대해도 될까요?"

'좋은 사람'은 김흥동 PD가 연출한 작품인데요. '모두 다 김치'에 나왔던 '김치 싸대기' 장면을 언급한 것이었죠. 대부분 이런 질문은 분위기를 밝게 환기하려고 하는데요, 김흥동 PD의 얼굴은 아주 무겁고 진지해졌어요.

김 PD는 이렇게 말했죠.

"진지한 작품에 대해 일부러 그런 장면을 연출한다는 건… 네, 저는 그런 일은 하지 않을 겁니다."

아주 예전 일이기 때문에 제 기억이 아주 정확하진 않겠지만, 내용은 확실해요. 김흥동 PD는 분명히 한 거죠. 자신은 일부러 막장을 연출하는 PD는 아니라는 것을요.

'막장의 대명사'라 불리는 어떤 장면을 만들어낸 연출가로서 의외의 발언 아닌가요?

여기서 제가 조금이라도 억울함(?)을 좀 풀어드리고 싶은데요. 사실 김치 싸대기는 막장 장면은 아니에요. (제 생각에는)

사진='모두 다 김치' 포스터(방송사 MBC)
사진='모두 다 김치' 포스터(방송사 MBC)

'모두 다 김치'는 김치 회사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드라마인데요. 딸에게 김치 공장을 넘겨줬는데, 사위가 그 회사를 빼앗아요. 그리고 바람을 피운 뒤 이혼을 했는데 그 후에 그 김치 회사에서 이물질까지 나온 거예요.

자신이 평생을 바쳐 일궈온 회사인데 그걸 빼앗아서 심지어 먹을 걸로 장난질까지 쳤다? 열받은 전 장모가 가방에 김치를 넣은 채로 찾아가서 사위의 뺨을 김치로 후려치는 게 바로 '김치 싸대기'의 결말입니다. 정말 막장같으세요? 막장이라면 김치로 싸대기를 날린 장모가 아니라 사위 아닐까요.

저는 사실 김흥동 PD의 연출을 매우 좋아하는데요. 일일 드라마는 사실 스토리 라인이 비슷한데, 거기서 한끗 차이를 만들어내거든요. 그 한끗이 굉장히 블랙코미디적이고요. 예를 들어 가정이 있는 남자를 사내 권력을 이용해 뺏으려다 그 남자가 사직서를 내고 가자 자신의 사무실에서 그가 내고간 사직서를 씹어 먹는다거나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여자가 길을 걷다가 갑자기 "아우 배고파"라고 혼잣말을 한다든가 하는 식이에요. 전형성에서 벗어나 있는데 그래서 오히려 더 현실과 가까운 기분이에요. 우리가 언제나 부조리한 상황을 목격했을 때 정의구현을 하고, 나쁜 일을 당하면 복수를 하고 그러면서 사는 건 아니잖아요. 속상한 일을 먹을 걸로 달래기도 하고 혼자 있을 땐 종이를 질겅질겅 씹어 먹는 웃기는 짓도 하고 그러고 사는 거죠.

그리고 재미있는게요 김흥동 PD는 왕가위 감독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거 아세요? 묘사가 주가 되는 감독의 영화에 영향을 받은 사람이 대사가 아주 많은 작품을 업으로 한다는 것. 그것도 인생의 블랙 코미디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이 다음 글론 제가 전에 썼던 김흥동 PD 인터뷰 후기(?)를 소개해 볼까 해요.

사진='중경삼림' 포스터(배급사 디스테이션)
사진='중경삼림' 포스터(배급사 디스테이션)

[김흥동의 인생, 극장] 20대엔 한 번 빠져야지, '중경삼림' 그리고 왕가위

영화의 힘은 세다. 한 편의 영화는 누군가에게 좌표이자 안내서가 되기도 한다. 저마다의 이유, 저마다의 감성이 담긴 한 편의 영화. '인생, 극장'은 감독들이 꼽은 인생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코너다.MBC 아침드라마 '좋은사람'의 김흥동 PD의 인생작은 누구나 한 번은 매료될만한 영화 '중경삼림'이다.

"대학 때 봤죠. 극장에서."

슬며시 웃는 얼굴. 그 눈빛은 잠시 20대 대학 시절로 돌아간 듯 했다. '레드 썬!' 누가 주문이라도 외운듯 머리에서 순간 노래 한 곡이 울리기 시작한다.

'캘리포니아 드리밍 온 서치 어 윈터스 데이. 올 더 리브스 알 브라운. 앤 더 스카이 이즈 그레이. 아이브 빈 워킹 온 어 윈터스 데이.

California dreamin' on such a winter's day. All the leaves are brown and the sky is gray. I've been for a walk on a winter's day.

캘리포니아 꿈을 꾸네 이 추운 겨울 날에. 낙엽이 지고 하늘은 잿빛이야. 이 겨울 날 나는 계속 걷고 있네.'

1965년 발표된 마마스앤파파스의 '캘리포니아 드리밍'은 1994년 '중경삼림'에 삽입되면서 홍콩은 물론 전 세계 젊은이들 사이에서 다시 애창됐다. 뉴욕의 잿빛 하늘을 보며 따뜻한 캘리포니아를 그리는 이 단조로운 멜로디의 노래는 지저분하고 복잡한, 하지만 왠지 감각적인 홍콩의 거리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노랑머리 마약밀매 중계자, 경찰 663, 경찰 223. 제대로 이름도 불리지 못 하는 서로 다른 네 명의 주인공들은 복잡한 홍콩의 거리에서 부유한다. 서로와 제대로 된 대화를 하는 대신 이들은 내레이션으로 자신들의 마음을 표현하는데, 그건 대화할 대상조차 자신으로 한정되는, 이를테면 고독이다.

"왕가위 영화에 안 빠지는 청춘이 있을까요. 저의 인생작이라곤 하지만 그때 그 시기는 다 그런 것에 빠질 시기니까… 마치 하루키를 좋아했던 것과 같은 그런. 괜히 서정적인 것을 동경했었죠."

청춘은 대개 불안하다. 안정된 게 없고 미래가 캄캄하다. 어른이 된 것 같은데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맘때쯤 깊은 사랑에 빠지고 또 이별도 한다. 한없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피워낼 방법을 몰라, 혹은 피워낼 수 있을지 자신하지 못해 음울한 청춘들의 이야기는 '중경삼림'에서 사랑을 잃은 두 명의 남자로 형상화돼 드러난다. 김 PD의 "왕가위 영화에 안 빠지는 청춘이 있을까"라는 말이 이해되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사진='중경삼림' 스틸(배급사 디스테이션)
사진='중경삼림' 스틸(배급사 디스테이션)

하지만 대부분의 청춘에게 '중경삼림'이 그저 위안이나 공감이라면 김흥동 PD에게는 감독의 길로 이끈 작품이다.

"영화에서 마마스앤파파스의 '캘리포니아 드리밍'이 흘러나오는데… 그때부터 '영화를 한 번 찍어 보고 싶다. 저런 걸 한 번 찍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지금 저는 상당히 구체적이고 대사 중심적인 작품들을 많이 하고 있는데 사실 그때는 왕가위의 영화처럼 시적인 작품들을 만들고 싶었어요."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많은 이들이 '중경삼림'을 떠올리며 홍콩을 찾는다. '기억이 통조림에 들어 있다면 유통기한이 끝나지 않기를. 만일 꼭 유통기한을 꼭 적어야 한다면 만 년 후로 적어야겠다.' 223의 독백처럼 '중경삼림'이 청춘에 가지는 효력도 이렇지 않을지.

 

형아들은 인생의 항로를 바꾼 영화나 음악 있으신가요?

생각해 보면 서로 다른 시간, 서로 다른 장소에 있던 우리가 같은 예술가의 작품에 영향을 받고, 그 영감으로 또 이 세상에서 무언가 멋진 일을 만든다는 것.. 참 멋지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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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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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스터의 프로필 이미지

    코스터

    0
    almost 2 years 전

    중경상림을 다시 보고 왔습니다. 전에는 잘 인지하지 못했던 조깅에 대한 이야기라던지 대략 20년이 지나고 다시 본 영화는 리미스터링된 화면만큼 다르게 와닿네요. 중경상림이 어떤 세계들을 거쳐 김치싸대기가 되었는지 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지만 그 김칫속에 캘리포니아드림이 있었다니 재미있고 신기합니다. 늘 좋은 글 잘 보고있어요’◡‘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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