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콤비네이터가 추구하는 '스타트업 팩토리 모델'은 여전히 유효한가
이번 주 미국 시간으로 9월 6 - 7일 양일 간 실리콘밸리 대표 액셀러레이터인 와이콤비네이터 여름 배치(S23) 기업들의 데모데이가 진행됩니다. 금 번 배치는 전 세계를 휩쓸고있는 생성형AI의 대중화 이후 진행되는 첫 프로그램이란 점에서 AI 시대 스타트업 창업의 판도를 알아볼 수 있는 행사로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와이콤비네이터가 스타트업들에게는 명실공히 글로벌 브랜드를 가진 최고의 액셀러레이터인 것이 주지의 사실이지만 벤처캐피탈 투자자들의 입장에서 와이콤비네이터를 갓 졸업한 시드 단계 기업에 대한 투자는 자주 논쟁의 대상이 되곤 합니다.
과거에는 해당 논쟁이 배치 규모 증가에 따른 졸업 기업의 하향 평준화나 와이콤비네이터를 졸업했다는 사실만으로 형성되는 기업가치 프리미엄에 대한 적정성과 같은 기술적인 내용이 많았다면 최근에는 1년에 500개 이상의 스타트업을 배출하는 팩토리형 액셀러레이터에서 유니콘이 탄생하는 시대는 이미 끝났고, 20 - 30억 원씩 시드자금을 받아 PMF(Product-Market Fit)를 찾아가는 가설 기반의 린스타트업 모델도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보다 본질적인 비판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와이콤비네이터의 최고 수혜자, 이니셜라이즈드(Initialized)
2011년 당시 와이콤비네이터의 파트너였던 개리 탠(Garry Tan), 그리고 2005년 와이콤비네이터 첫 배치 기업 중 한 곳으로 참여했던 레딧(Reddit)의 공동창업자 알렉시스 오하니안(Alexis Ohanian)이 공동 창업한 이니셜라이즈드 캐피탈(Initialized Capital)의 투자 전략은 간단했습니다. 자신들이 가진 와이콤비네이터 내부자의 위치를 십분 활용, 배치를 졸업한 최고의 기업들만을 선별해 투자를 집행하는 것입니다.
2011년 약 90억 원($7Mn) 규모로 조성된 이니셜라이즈드의 1호 펀드는 이 전략으로 대성공을 거둡니다. 1호 펀드 편입 기업들 중 대표 사례를 살펴보면...
- 코인베이스 시드 (현재 시총 20조 원)
- 인스타카트 시드 (15 - 20조 원 가치 IPO 진행 중)
- 레딧 시리즈A (최근 라운드 15조 원)
- 플렉스포트 시드 (최근 라운드 10조 원)
- GOAT 시드 (최근 라운드 5조 원)
- 크루즈 오토메이션 시드 (2015년 GM이 1.3조 원에 인수)
- 플랜그리드 시드 (1조 원 규모 M&A)
...와 같은 조 단위 회수 기록을 세운 기업들이 즐비합니다. 와이콤비네이터 초창기 성공 사례로 언급되는 에어비앤비, 드롭박스, 스트라이프 이후 2012년부터 시작되는 2세대 YC 유니콘 기업들 대부분의 초기 투자에 성공하며 자신들의 역량과 전략을 입증한 것입니다. 이니셜라이즈드 펀드에 출자했던 한 LP에 따르면 이들의 1호와 2호 펀드는 이미 원금의 7배 이상을 돌려줬고 여전히 초대형 회수 건들이 남아있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이후 실리콘밸리에서는 이니셜라이즈드의 성공을 따라 와이콤비네이터 졸업기업 중 상위 10% 기업을 선별해 투자하는 전문 펀드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게 됩니다. SOMA Capital, Rebel Funds, Pioneer Funds, HOF Capital과 같은 곳들은 와이콤비네이터 매 배치마다 10 - 20개 기업을 선별해 투자를 집행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들의 성과에 대해서는 검증이 필요하다는 의견입니다. 팬데믹 버블기간 동안 스타트업들의 밸류에이션이 치솟으며 딜(Deel, W19), 오픈씨(OpenSea, W18), 지브스(Jeeves, S20) 등 몇몇 기업들이 펀드 성적을 돋보이게 만들었지만 유동성 버블이 꺼지며 투자 회수까지 성공한 사례는 아직까지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스타트업 '팩토리' 시스템의 종말 - 슬로우벤처스
와이콤비네이터나 안데르센호로위츠와 같이 유망 스타트업의 '인덱스'를 형성하는 투자 전략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해 온 대표적인 투자자로 슬로우벤처스(Slow Ventures)의 샘 레신(Sam Lessin)이 있습니다.
샘은 기술주 폭락 이후 '성과를 내는 스타트업에 투자하면 누군가 2년 후 더 높은 가격에 투자를 집행할 것이라는 기대'를 바탕으로 형성된 시드부터 시리즈 A, B, C를 거쳐 IPO까지 이어지는 가치 상승의 '팩토리 라인'이 이제 수명을 다했다고 선언합니다.
샘이 펼치는 주장의 핵심은, '컨센서스'를 기반으로 유망 스타트업에 대한 최대 다수의 익스포져를 가져가는 초기 단계 와이콤비네이터, 벤처 단계 안데르센호로위츠, 후기 단계 타이거 글로벌과 같은 벤처 인덱스형 투자 모델은 기술주 시장이 망가지면서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벤처 시드 투자 또한 미래의 홈런 아이디어를 찾기 위해서는 와이콤비네이터처럼 유망한 아이디어를 빠르게 복제하는 스타트업을 쫓아다니는 것이 아닌, 장인 정신과 역발상 마인드를 가지고 남들이 잘 알지 못하는 숨겨진 섹터와 창업자를 발굴하는 전통 벤처 투자 모델로 회귀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식상한 주장일 수 있지만 사람들이 샘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이유는 그가 이끄는 슬로우벤처스의 성과가 워낙 탁월하기 때문입니다. 와이콤비네이터 기업에는 10년 넘게 투자한 적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샘은 크립토나 이더리움이 대중화되기 훨씬 이전인 2018년 솔라나(Solana)의 시드라운드에 투자, 3년 만에 5,700배의 수익을 올린 바 있는 입지 전적의 투자자입니다.
솔라나같은 기업이 단계마다 벤처 자금을 펀딩하며 성장한 것이 아닌 것처럼, 뛰어난 시드 투자자가 되기 위해서는 20 - 30억 원씩 주기적으로 펀딩하며 몇 년씩 '가설 검증'을 하고 있는 와이콤비네이터형 창업자가 아닌, 역발상 아이디어를 조용히 실행하고 있는 사업가를 찾아나서야 한다는 것이 샘의 논지입니다.
다시 와이콤비네이터
아이러니하게도 와이콤비네이터는 팀을 재정비하고 액셀러레이터라는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해 이니셜라이즈드 캐피탈을 100억 원 규모 마이크로 시드펀드에서 10년 만에 수 조원을 운용하는 벤처캐피탈로 성장시킨 개리 탠을 새로운 수장으로 데려왔습니다. 이번 와이콤비네이터 데모데이는 개리 탠이 선장을 맡은 후 진행된 첫 배치인 것입니다.
그로쓰 펀드를 해체하고 기업가치가 아닌 매출을 중심으로 와이콤비네이터 기업을 집계한 새로운 Top 50 리스트를 발표하는 등 개리 탠의 방향성은 초기 기업 액셀러레이터로서의 정체성 회복과 실질적인 성과에 방점을 두고 있습니다. 와이콤비네이터는 액셀러레이터로서의 투자 성과도 중요하지만, 외롭고 고독한 창업자의 동반자 역할을 하는 커뮤니티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 개리 탠의 지론입니다.
하지만 얼마 전 배치에 참여한 인도 스타트업이 사기인 것으로 밝혀져 이름을 삭제하는 등 여전히 잡음도 존재합니다. 과연 와이콤비네이터가 세간의 우려를 딛고 벤처 혹한기의 데모데이를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됩니다.